제712화
사앵앵은 고개를 비틀며 할 말이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사정우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왔다.
“손수건을 빼 줄 테니 침은 뱉지 마시오.”
사앵앵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정우는 그녀의 입에서 손수건을 빼주었다. 그는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몸을 조금 뒤로 뺐다. 사앵앵은 약속대로 침을 뱉지 않았다. 그녀가 물었다.
“몇 시진이나 되었어요?”
“유시酉時(오후 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요.”
사정우가 말을 이었다.
“날이 이미 저물었소.”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
“배가 고프오?”
사정우가 눈을 반짝였다. 사앵앵의 반응을 보니 그의 말이 먹힌 듯했다. 그는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기다리시오. 먹을 걸 내어오라 분부하겠소.”
그는 문을 열고 밖을 지키는 이들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렸다. 그가 돌아오자 사앵앵이 물었다.
“여기가 당신 것이에요?”
사정우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장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오. 자주 놀러 오니 단골손님이라고 할 수 있소.”
사앵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사 주인장께서 이곳 단골이셨군요.”
사정우는 조금 민망해했다.
“이제는 당신이 있으니 앞으로 다신 오지 않겠소.”
사앵앵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밧줄에 묶인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날 계속 묶어 둘 작정이에요?”
사정우는 조금 머뭇거렸다.
“성질이 좀 고약해야지. 당신이 또 소란을 피울까 봐 정말 걱정이오.”
“주인장이 내게 예를 갖춰 대한다면 나도 소란을 피우지 않을 거예요.”
사앵앵이 그의 손을 힐끔거리며 가볍게 웃었다.
“걱정할 게 뭐가 있어요. 내겐 이미 칼도 없는 것을.”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가 칼도 없는 여인 하나를 이기지 못할까? 게다가 그도 자신이 가진 호의를 보여 주고 이 마음을 인정받고 싶었다.
“좋소. 풀어 주리다. 화가 나거든 날 욕하고 때려도 좋소. 내 절대 당신에게 맞서지 않을 것이오.”
사앵앵이 어깨를 으쓱이며 푸념했다.
“물론 화나죠. 입으로는 날 좋아한다면서 포박했잖아요.”
“내 잘못이오.”
사정우는 점점 자기생각대로 되어 가는 듯하자 기분 좋게 밧줄을 풀어 주었다.
“미안하오. 당신께 사죄하리다.”
밧줄이 풀리자 사앵앵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리고 별안간 사정우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얼얼한 뺨을 감싼 사정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앵앵, 어찌…….”
“사 주인장이 그랬잖아요.”
사앵앵이 낭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때려도 내게 맞서지 않겠다고요.”
“…….”
“개자식, 비겁한 소인배.”
“앵앵, 어찌…….”
“욕해도 괜찮다면서요.”
“…….”
그저 말만 그리한 것뿐이거늘…….
그때,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내가 음식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조용히 상을 차린 뒤 다시 소리 없이 방을 나갔다. 잽싸게 움직이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걸 보아 그들은 특별 훈련을 받은 것 같았다. 그들이 방을 나간 뒤, 사앵앵이 물었다.
“밥에 약을 타라고 한 건 아니겠죠?”
“물론 아니오.”
사정우가 말했다.
“내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소?”
“난 날 억압하려 들면 앞뒤 안 가리고 반발하는 성격이라고요. 만약 그런 얼토당토않은 짓을 했다면 숨이 붙어 있는 한 당신이 편히 살게 놔두진 않을 거예요. 알겠어요?”
“알겠소, 알겠소.”
사정우는 그녀를 자리에 앉히고 다친 손을 내보였다.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내 직접 경험하지 않았소.”
사앵앵은 정말 배가 고팠다. 한참 갇혀 있던 데다 한바탕 소란을 피웠으니 배가 고프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분명 금천아가 사람들을 데리고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기에 우선 배불리 먹은 뒤 체력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정우는 사앵앵이 얌전히 밥을 먹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의 환심을 조금 더 사고 싶었다.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옥패를 풀어 그녀에게 건넸다.
“앵앵, 오늘 집에서 급히 나오느라 증표를 가져오지 못했소. 괜찮다면 이 옥패라도 받아 주시오. 나중에 더 좋은 것으로 주겠소.”
사앵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옥패를 소매통에 넣었다.
“고마워요.”
그녀가 선물까지 받아주자 사정우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앵앵, 갖고 싶은 게 무엇이오? 내 미리 준비해 두리다.”
사앵앵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답했다.
“은자요.”
“…….”
은자를 선물로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저속한 꼴을 어찌……. 그때, 누군가 문을 세 번 두드렸다. 사정우는 고개를 돌려 잠시 문을 바라보더니 사앵앵에게 말했다.
“잠시 나가 보겠소.”
말을 마친 그는 사앵앵의 대꾸도 듣지 않고 급히 밖으로 향했다. 사앵앵은 왠지 초조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동요되었다. 설마… 그녀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엿듣고 싶었지만 괜한 짓을 했다 일을 망칠까 봐 망설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정우가 다시 돌아왔다.
“왜요?”
사정우가 그녀를 바라보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사 장군도 이런 곳을 좋아하는지 몰랐구려.”
사앵앵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사장풍이 그녀를 구하러 온 것이다.
“혼자서요?”
“물론 혼자 왔소. 기루에 많은 이들을 끌고 올 순 없지 않소?”
“못 믿겠어요.”
사정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면 직접 한번 보시오.”
사앵앵도 그를 만나는 걸 간절히 바랐지만, 겉으론 애써 태연한 척 속내를 숨겼다.
“직접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진짜라면 나한테 약점을 잡힌 셈이니까요.”
사정우가 앞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나갑시다. 내 당신에게 직접 보여 주겠소.”
한나절이나 갇혀 있던 사앵앵은 마침내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앞쪽에서 희미하게 떠들썩한 소리가 전해졌다. 그녀는 아무래도 후원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조용했던 것이다.
그녀는 사정우를 따라 위층으로 향했다. 복도를 따라 건물 절반 정도를 돌았을 때쯤, 사정우가 창문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화원 응접실을 가리켰다.
“보시오. 사 장군이 아니오?”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응접실 등불은 환히 밝혀놓은 덕에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한 사내가 둥근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그 옆에는 어여쁜 여인들이 떠들썩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사앵앵은 눈을 가늘게 뜨며 사내의 얼굴을 응시했다. 저게 사장풍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그녀가 화를 내며 욕을 퍼부었다.
“사장풍, 감히 날 배신하고 기녀랑 술을 마셔!”
사정우가 웃으며 말했다.
“사내들은 종종 심심풀이로 이런 델 오곤 한다오. 서로 공평한 처지가 되었으니 이제 당신도 그리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소.”
몹시 화가 난 사앵앵은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식식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정우는 그녀를 위로했다.
“화내지 마시오. 저자는 알아서 술을 마시게 내버려 두고, 우린 돌아가서 우리끼리 한잔합시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던 사앵앵은 줄곧 분을 참지 못하더니 별안간 아이고 소리를 내며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사정우가 황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오?”
“아녜요.”
사앵앵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에 돌이 걸렸나 봐요.”
사정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잘 보고 걸어야지, 일부러 돌을 걷어찬 것 아니오?”
반월문에 다다랐을 때, 사앵앵은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사정우가 물었다.
“또, 왜 그러시오?”
“오늘 달이 정말 크네요.”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사정우도 함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려. 정말… 악!”
순간, 사타구니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사앵앵이 그를 발로 힘껏 걷어찬 것이었다. 그는 극심한 통증에 허리를 푹 숙였다. 사앵앵은 그 틈을 타 토끼처럼 쏜살같이 반월문을 나갔다. 사정우는 고통스럽게 소리쳤다.
“다, 당장 저자를 잡아라!”
문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람뿐이었다. 사정우의 외침에 그는 곧장 사앵앵을 뒤쫓았다. 사앵앵은 침착히 돌을 주워 자신을 뒤쫓는 사내에게 던졌다.
“독이 묻은 것이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사앵앵은 그대로 화원 응접실을 향해 내달렸다.
“사장풍!”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사장풍은 곧바로 응접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발끝으로 연못을 가볍게 디디며 훌쩍 뛰어오른 여인을 품에 안았다. 그가 곧장 큰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그의 호령에 횃불을 든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와 사장풍과 사앵앵을 에워쌌다. 후원에서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튀어나왔지만 병사들의 모습에 곧장 나무 뒤로 모습을 숨겼다.
어두운 곳에서 몰래 이 장면을 지켜보던 사정우는 사앵앵이 자신을 또 속였다는 생각에 머리끝까지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당장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에 조용히 신호를 보내 검은 무리를 후퇴시켰다. 그리곤 그 역시 뒷문으로 재빨리 도망쳤다.
염춘원 측에선 자신들이 사앵앵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들도 갑작스레 나타난 그녀의 존재가 기이하기만 하다는 것이었다. 사앵앵은 날카로운 눈매로 그들의 연기를 지켜본 뒤, 사장풍을 데리고 후원으로 향했다.
낮부터 후원을 지키던 검은 무리는 단체로 실종이라도 된 듯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사정우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사앵앵은 그들이 자신을 가뒀던 방으로 향했다. 다른 건 전부 다 똑같았지만, 탁자에 놓여 있던 음식은 다 정리된 상태였고 침대에는 웬 여인이 잠을 자고 있었다. 병사들이 우르르 들어오자 그 여인은 잠에서 깨 곧장 몸을 일으켰다. 얇은 두두만 입은 그녀의 모습에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사앵앵은 화를 내며 사장풍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너무나 명백했다. 이미 모든 증거를 다 없앤 것이다. 사정우의 손에 상처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걸로는 아무 소용도 없으리라. 그라면 분명 백 명이 넘는 사람을 동원해서라도 그의 상처가 사앵앵과 무관하다는 걸 증명해 보일 테니까.
사앵앵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사장풍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등불 아래에서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걱정스러운 그의 눈빛을 보고 사앵앵이 말했다.
“괜찮아요. 거기서 밥도 한 끼 얻어먹은걸요.”
사장풍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곳에서 밥이 넘어갔단 말이오?”
사앵앵이 입을 삐죽거렸다.
“당신은 술도 마시는데, 전 왜 밥도 못 먹는단 말이에요?”
“당신을 찾으러 간 것이 아니오. 나도 어쩔 수 없이 마셨소.”
사앵앵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술만 마실 것이지 아가씨들은 왜 그리 많이 불러가지고는.”
사장풍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당신이 그러지 않았소. 연기해야 할 땐 제대로 하라고. 그자들은 그저 흥만 돋았을 뿐, 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