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1화
그녀가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전에 두 사내는 서둘러 방문을 잠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사앵앵은 조심스레 창가로 다가갔다. 창을 힘껏 열어 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을 묻혀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내어 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은 잘 꾸며진 정원이었다. 청록빛 소나무와 잣나무가 심겨 있었고, 서리도 버텨 낸 노란 국화와 자색 국화도 활짝 피어 있었다. 그 옆에 있는 매화나무에는 자그마한 꽃봉오리가 가득 맺혀 있었다. 아마 큰 눈이 내린 뒤에야 활짝 피어날 터.
이렇게 커다란 정원이 있는 집인데도 밖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정원을 거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그녀를 이리로 끌고 온 두 사내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사앵앵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얼 하는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자그마한 걸상부터 동그란 탁자까지 무엇 하나 정교하지 않은 게 없었다. 침대 주변에는 분홍빛의 얇은 비단을 걸어 놓았다. 그녀는 천천히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어디에선가 한란 향이 났다. 손을 뻗어 비단을 걷으니 원앙이 수 놓인 새빨간 침구가 깔려 있었다. 혼례 때 쓰이는 침대 같았다. 침대 옆에 서 있으니 짙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탁자 앞에 앉았다. 주전자를 들어 보니 물이 담겨 있었다. 그 말은 평소 누군가 이 방을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앵앵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녀가 소리를 지르지 않은 건 진실을 찾기 위해서였다. 모든 진실을 쥐고 있는 것 같은 금정각의 주인을 뒤따르다 결국 이곳에 갇힌 것이다. 지난번 그자가 염춘루로 향했으니 어쩌면 이곳이 염춘루일지도 몰랐다.
밤이 되지 않았으니 여인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이렇게 조용한 것일 터. 정교하고 예쁜 가구들은 이곳이 여인네들의 규방이라는 걸 알려 주는 듯했다. 게다가 방에서는 분에 자주 쓰이는 향이 났고 원앙이 수 놓인 침구는 하루하루가 혼례라는 의미로 기루에서 흔히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허리춤의 비수를 만지작거렸다. 칼을 지니고 다니는 건 서북 지역에 있을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었다. 그곳에는 도적이나 짐승이 많아, 홀로 밖을 다닐 땐 미리 대비해야 했다. 그런데 도적도 짐승도 없는 도성에서도 여전히 칼을 지니게 될 줄이야.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적이나 짐승은 조금도 무섭지 않지만, 앞에선 웃고 뒤에선 등에 칼을 꽂는 자들은 정말 무서웠다.
어쨌든 칼이 있으니 겁날 것 없었다. 사실 그녀도 발골술에 능했지만, 금천아와 몇몇 시종을 제외하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장풍과 걸핏하면 다투던 때, 그녀가 온갖 발악을 해도 늘 패배의 쓴맛을 봐야 했다.
그에게 허무하게 굴복하기 싫었던 그녀는 무술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십 년을 배운다 한들 사장풍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에 금천아에게서 발골술을 배웠다. 사실 무술이 아닌 그저 칼질을 빠르게 익히는 것이었지만, 습격에는 그럭저럭 쓸모가 있었다.
발골술을 다 익힌 뒤에는 그녀가 역참에서 직접 양을 잡기도 했고, 목검으로 사장풍의 손등에 시퍼런 멍을 남기기도 했다. 사장풍을 이긴 경험이 있으니 그녀는 더더욱 두려울 게 없었다. 게다가 똑똑한 금천아는 그녀가 사라진 걸 알고 집으로 돌아가 도움을 청할 것이고, 위급한 상황엔 사 장군을 불러와 염춘루를 짓밟게 할 터였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졸음이 밀려왔다. 하지만 차마 잠들 수는 없었다. 갈증도 났지만 물도 마실 수 없었기에 그녀는 꿋꿋이 버텼다. 시간이 더 흐른 뒤에도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붙잡은 자들도 그녀의 존재를 잊은 듯했다.
그녀는 다시 창가로 향했다. 이번에는 반월문 근처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를 잡아 온 사내들 같았다.
기루에서 기녀들을 두고 다투는 손님들이나 말을 듣지 않는 기녀를 길들이기 위해 하수인을 둔다는 얘기는 그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두 사내가 그런 하수인인 것 같았다. 그 말인즉슨, 그녀가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다시 탁자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금천아는 대체 언제쯤 그녀를 구하러 올까……. 그때, 밖에서 철컹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어찌?”
그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사 여주인장이 어찌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사정우는 잠시 놀란 얼굴을 하다 곧장 웃음을 터뜨렸다.
“사 여주인장이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소이다.”
사앵앵이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죠?”
사정우도 더는 속내를 감추지 않고 거리낌 없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사 여주인장이 여기 있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앵앵은 힘껏 코웃음을 쳤다.
“개 같은 소리! 전 여기 잡혀 온 거라고요.”
“사 여주인장, 그리 거칠게 굴지 마시지요. 신분도 높은 이가 어찌.”
사앵앵은 사정우의 말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이런 때일수록 함부로 행동해선 안 된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러는 사 주인장은 이곳엔 무얼 하러 오셨습니까?”
사정우는 태연하게 두 손을 펼치며 말했다.
“사내가 기루에 무엇을 하러 오겠습니까? 당연히 즐거움을 찾으러 오는 것이지요. 다만 이곳에서 사 여주인장을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도 참 인연이 깊군요.”
“전 그쪽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인연은 개뿔!”
사정우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런, 이런. 집안에 무술을 하는 자가 있으니 말씀이 거치시군요. 무인들은 행동거지가 좀 거친 편이지요. 장군이 되어도 좀처럼 건달 같은 습관을 고치지 못하니 정말 품위가 떨어집디다. 사 여주인장은 외모가 뛰어나는 건 물론 똑똑하고 능력도 좋잖습니까. 좀 더 단아한 품행을 갖춘다면 남들에게 호감도 많이 살 텐데 말이지요.”
“누구의 호감을 사야 한다는 거죠?”
사앵앵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당신처럼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위선자들의 호감이요?”
“위선자라니?”
사정우는 그녀의 폭언에도 화를 내기는커녕 실실 웃었다.
“사 여주인장 앞에서만큼은 진정한 군자입니다. 사실 난 사 여주인장을 매우 흠모하고 있었지요. 이왕 이곳에서 이렇게 만났으니 이 아름다운 순간을 저버리지 맙시다.”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오자 사앵앵은 찻잔을 집어 던졌다.
“흠모라니, 누구 마음대로? 저리 꺼지시오!”
사정우는 무술 고수는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 집에 무사를 들여 호신용으로 권법을 배운 적 있었기에 제법 민첩했다. 몸을 살짝 틀어 찻잔을 피한 그는 껄껄 웃으며 계속 사앵앵에게 다가갔다. 사앵앵은 허리춤에 있던 비수를 꺼냈다.
“멈추지 않으면 나도 봐주지 않을 것이오.”
사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여인이 칼부림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입니까? 그만하고 말 들으시지요. 내가 잘 모실 테니.”
역겨운 그의 언행에 사앵앵은 절로 눈썹이 치켜세워졌다.
“이것 보시게, 사 씨. 감히 날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오!”
“화내는 모습이 어찌 이리 예쁘단 말인지. 꼭 작은 고추같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서 검이 반짝이더니 손등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잽싸게 몸을 틀었지만, 손등에는 이미 피가 맺혀 있었다.
“사 여주인장…….”
사앵앵은 지금 같은 상황에선 아예 끝장을 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제공격에 성공했으니 서둘러 사정우를 제압한 뒤 이곳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검을 쥔 채 그에게 달려들었다.
사실 양고기를 발골한 적은 있어도 진짜 사람을 찌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녀도 잔뜩 긴장된 상태였다. 게다가 그의 손등에 흐르는 피를 보고 있으니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 순간, 사정우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여봐라!”
그 소리에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잇달아 들어왔다. 그들은 사정우와 사앵앵 사이를 갈라놓았다. 다들 하나같이 무술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사앵앵의 손에 있는 비수를 낚아채더니 그녀의 두 팔을 뒤로 꺾고 무릎을 꿇렸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사정우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의 손등에 노란색 가루를 뿌리더니 무명천으로 손을 감쌌다. 팔이 꺾인 사앵앵은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사정우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화가 난 사정우가 호통쳤다.
“저년의 고개를 숙이게 하거라!”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그녀의 머리를 짓눌러 고개를 숙이게 했다.
“되었다, 되었어. 포박하거라.”
결국 사앵앵은 의자에 앉은 채 밧줄로 꽁꽁 묶였다. 사정우는 손을 내저어 하수들을 내보냈다. 사앵앵 옆으로 다가온 그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사앵앵은 그의 얼굴에 힘껏 침을 뱉었다.
사정우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은 뒤, 그대로 손수건을 사앵앵의 입에 욱여 넣었다. 그리곤 그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사 여주인장, 굳이 이렇게 해야겠소? 보시오. 둘 다 감정이 얼마나 상했는지.”
사앵앵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기에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정우는 그녀에게 공격당한 손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난 속이 좁은 사람이라 누군가가 나에게 해를 입히면 열 배는 갚아 준다오. 유일하게 사 여주인장 당신에겐 손을 쓰지 않았지. 우린 둘 다 상인이고 돈을 좋아하지 않소? 취미가 같다고 할 수 있지. 만약 우리가 손을 잡으면 분명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오.
사 여주인장, 난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고 친하게 지내고 싶소. 하지만 당신은 매번 내게 모욕을 주고 날 무시하지 않았소. 이리하는 건 당신에게도 좋지 않소. 우리 사謝씨 집안은 대대로 장사를 하여 그 근간이 매우 탄탄하오. 내게 아부하려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소. 그자들에게는 내 눈길도 주지 않지만… 당신만큼은 예외요.”
사앵앵의 날카롭던 눈망울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사정우는 진지하게 경청하는 그녀의 모습에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돈을 좋아하지 않소? 내겐 돈이 많소. 당신은 장사도 좋아하지. 난 당신에게 엄청난 장사 기회를 줄 수도 있소. 그저 우리가 너무 늦게 만난 것이 아쉬울 따름이오.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분명 당신을 내 부인으로 삼았을 터인데.
당신은 이미 시집도 갔고 아이도 있지만, 난 다 상관없소. 당신이 이혼만 해준다면 나도 지금 부인과 이혼하고 당신을 내 정실로 삼겠소. 만일… 자식들과 떨어지기 아쉽고 명성에 누가 될까 걱정이라면 혼사를 치르지 않고 몰래 만나기만 해도 괜찮소.
앵앵, 난 진심으로 그대가 좋소. 그간 당신 때문에 잠도 편히 자지 못하고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소. 오늘 이리 어렵게 만났으니 이제 내 말을 들어주지 않겠소? 당신이 승낙만 해준다면 뭐든 다 당신 말대로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