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0화
원천림의 집안 식구들은 전부 임안성에 살고 있었고 기반도 제법 탄탄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도 주인장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도 주인장과 그의 가족들은 꼭 속세를 떠난 듯 종적을 감추었다. 그뿐만 아니라 예전에 살던 집도 전부 팔아 버린 것 같았다. 조사해 보니 지금 창륭 쌀집의 주 주인장 처남에게 판 것이었다. 이젠 사앵앵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주인어른, 쌀집과 집까지 전부 판 걸 보면 돈을 마련해 고향으로 내려간 것이거나 빚을 져서 재산을 전부 넘긴 것 같습니다.”
사앵앵이 물었다.
“둘 중 어느 쪽인 것 같아요?”
“글쎄요. 두 가지 모두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군요.”
원천림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도 주인장은 사람이 꽤 괜찮았습니다. 누군가의 원한을 샀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으니 빚을 졌을 일도 없을 터인데…….”
사앵앵이 물었다.
“도 주인장의 성향 같은 건 알아보셨어요? 예를 들어 기루에 자주 들락거린다든지 말이에요.”
“…그런 얘긴 들어본 적 없습니다.”
“조금 더 알아봐 주세요. 사람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수는 없어요.”
“예.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원천림이 떠난 후, 사앵앵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들 사이에 무언가 복잡한 관계가 얽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복잡한 관계가 하나의 거대한 음모를 그려 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히려 진상을 알기 힘들었다. 어쩌면 이 수렁엔 핏빛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지도 몰랐다.
적당히 손해를 보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사건 조사는 포졸들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천 냥을 이렇게 공연히 날리는 건 그녀에겐 그냥 넘어가기 힘든 일이었다.
빙산의 일각을 찾아냈으니 더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장군인 지아비가 그녀의 뒤를 든든히 지켜 주는데 겁낼 게 뭐가 있겠는가.
사앵앵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금천아를 데리고 연지를 사러 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거리에서 사정우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사앵앵은 재수가 나쁘다고 여기고 그저 못 본 척 지나치기로 했다. 하지만 사정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사 여주인장, 오랜만입니다.”
그가 인사를 건네니 사앵앵도 더는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이런 데서 다 만나는군요.”
사앵앵의 냉담한 얼굴과 달리 사정우는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리 공교로울 데가. 듣자니 사기를 당해 금정각을 되넘기셨다고요.”
그는 대놓고 그녀를 조롱했다. 사정우는 사앵앵이 열 받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담담하기만 했다.
“예. 어느 개자식에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
사정우가 잠시 뒤에 대꾸했다.
“하면 이제 어찌할 생각입니까? 추궁하지 않을 겁니까?”
“추궁할 게 뭐 있겠습니까.”
사앵앵이 말했다.
“실수한 것이니 패배를 인정하고 그저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야지요.”
“마음이 참 넓소이다.”
“아뇨. 넓지 않아요.”
사앵앵이 말했다.
“매일 밤 인형의 배를 찌르는걸요. 개자식이 고통스럽게 죽길 저주하면서요.”
사정우가 억지로 두어 번 웃었다.
“풍 관리인을 저주하는 것입니까?”
“아뇨.”
사앵앵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금정각의 원래 주인이요. 진작 나타났으면 풍 관리인도 절 속이진 못했을 테니까요. 그런 죽어 마땅한 인간 같으니! 하!”
사정우가 말했다.
“…사 여주인장, 그래도 신분이 있으니 그런 거친 언행은 삼가는 게…….”
사앵앵이 코웃음을 쳤다.
“돈 냄새 풀풀 풍기는 장사꾼한테 신분은 무슨 신분이요? 그 개자식은 절 잘 피해 다녀야 할 겁니다. 안 그랬다간 가죽을 벗기고 뼈를 다 발라 버릴 테니까요! 발라낸 살은 개 먹이로 줄 겁니다!”
그녀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금천아는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손가락으로 칼날을 쓸어내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사정우가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사 여주인장, 전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말을 마친 그는 황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금천아가 킥킥거렸다.
“부인, 겁을 먹었나 봅니다.”
“그날 네 발골술을 직접 보았으니 무섭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사앵앵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정우도 그들과 관련이 있을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들과 연관된 어떠한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급히 발길을 옮기던 사정우는 한참 걸어가고 나서야 발걸음을 늦추고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사앵앵은 이미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무서운 여인들이었다. 사앵앵이 눈을 부릅뜨고 눈썹을 치켜세울 땐 정말이지 오금이 저렸다. 그녀가 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건 아닌지 잠시 의심될 정도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의 면전에서 대놓고 그를 저주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껏 감히 그의 면전에서 저주는커녕 욕을 퍼붓는 사람도 없었거늘…….
금정각을 되찾은 후, 그는 기가 죽은 사앵앵의 얼굴을 보고 싶어 일부러 거리에 나와 있었다. 한바탕 놀려 주어 그가 당했던 모욕을 전부 씻어 낼 생각이었는데, 그 결과는…….
사정우는 인파 속에 서서 다시 머리를 굴렸다. 사앵앵, 이 말을 안 듣는 여편네를 정말 완전히 무너뜨려야 한단 말인가? 그냥 내버려 두자니 늘 그에게 맞서 난처하게 했고, 그렇다고 무너뜨리자니 하늘을 찌를 듯한 호기나 그 미색이 조금 아까웠다. 지금껏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우면서 미웠던 여인은 없었는데.
결국 답을 내지 못한 사정우는 긴 탄식을 내뱉으며 자리를 떴다.
* * *
금정각 사건을 알게 된 사장풍은 분은 이기지 못했다.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금정각을 찾아가겠다며 소란을 피웠다. 사앵앵이 눈을 희번덕였다.
“됐어요. 관리는 언행 하나하나가 전부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법이에요. 그리 위세를 부리며 백성의 주루를 강탈하는 건 아주 무거운 죄명이라고요. 이미 말했듯 제 일엔 관여하지 마세요.”
“내가 어찌 관여하지 않을 수 있겠소?”
사장풍이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리 힘들게 운영하던 주루인데 순순히 물러나야 한단 말이오? 밤낮없이 일해 결국 다른 사람 배부르게 한 격이라니. 이리 남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천하에 또 어디 있단 말이오?”
“걱정하지 말아요.”
사앵앵이 그를 위로했다.
“당신도 나더러 늘 사납다고 했잖아요. 언젠가 주루를 내 손으로 꼭 되찾고 말 거예요.”
사장풍이 이리 화를 내는 건 다 그녀가 걱정되어서였다.
“부인, 차라리 여의루와 금수 포목 이 두 가게만 잘 지키는 건 어떻소? 그 두 가게만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 문제 없지 않소. 게다가 내 녹봉도 있으니…….”
“당신 녹봉은 당신이 잘 갖고 있어요. 지금은 그거까지 건들 생각은 없으니까요. 언젠가 급하게 필요할 때가 있을 거예요. 내가 장사를 하는 건 돈뿐만이 아니라 장사가 좋기 때문이라고요.”
사앵앵이 그의 턱을 쓸어내렸다.
“당신도 그랬잖아요. 내가 기쁘면 당신도 기쁘다고요. 잊었어요?”
사장풍은 별수 없이 한숨을 내쉬곤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난 당신이 걱정돼서 그런 것이오. 당신이 기쁘면 되었소. 하지만 도성은 서북과는 다른 곳이오. 특히 상업은 그 내막을 잘 파악하기도 힘드니 조심하시오. 내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말만 하시오. 당신은 내 부인이잖소. 사실 어떤 땐 사내대장부 같기도 하지만…….”
사앵앵이 웃으며 그를 한 대 내리쳤다.
“쓸데없는 소리!”
* * *
사앵앵은 짬을 내어 금정각으로 향했다. 가게를 직접 운영하겠다던 건물 주인은 보이지 않았고, 웬 낯선 관리인이 그녀를 맞았다. 새로운 관리인은 건물 주인을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했다. 금정각의 주인장이 또다시 미궁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풍 관리인이나 도 주인장에 대해서도 역시 아무런 소식 없었다. 연말이 다가오자 할 일이 많아진 사앵앵은 금정각은 잊고 우선 가게 두 곳만 잘 돌보기로 했다.
류 어멈 밑에는 일을 도와주는 두 명의 제자가 생겼다. 그들 때문에 주자와 금천아는 여의루를 지키는 대신 사앵앵을 따라다니며 일손을 도울 수 있었다. 다행히 가게가 서로 붙어 있기에 급한 일이 생겼을 땐 크게 소리지르면 되어서 무척 편했다.
오늘은 유독 날이 추워 솜이 잘 팔렸다. 때마침 솜을 가득 저장해 두었기 때문에 장사를 못 할까 봐 걱정할 일은 없었다. 손님들은 포목점에서 옷감을 산 뒤, 곧장 여의루로 들어가 국수를 사 먹었다. 추운 날씨에 먹는 뜨끈한 국수 한 그릇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두 가게 모두 인산인해를 이루자 사앵앵도 기분이 좋았다.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두 가게 모두 잘 되고 있으니 그간 공연히 헛물만 켠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금천아를 데리고 초와 향을 사러 갔다. 새해가 밝으면 조상들께 바치기 위해 미리 준비해두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골랐다. 그때, 갑자기 금천아가 사앵앵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조용히 말했다.
“부인, 앞에 저자 좀 보십시오…….”
금천아의 시선을 따라간 사앵앵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금천아가 가리킨 자는 금정각의 옛 주인장이었다. 그날처럼 부티가 나는 차림새는 아니었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행색이었다. 그는 연지를 파는 가게에서 고개를 숙인 채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나이도 제법 많은 사내가 연지를 구경하다니, 부인에게 사 주려는 것인가? 아니면……. 사앵앵이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 따라가 보자꾸나.”
얼마 뒤, 그자는 연지를 몇 개 사서 품에 찔러 넣고는 가볍게 손을 털며 가게를 떠났다. 사앵앵과 금천아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미행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느긋하게 거리를 걸었다. 사앵앵과 금천아도 그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시장 어귀를 벗어날 땐 더 이상 그들을 가려줄 인파가 없었기에 앞뒤로 흩어져 각각 따로 걸어갔다. 사앵앵이 앞을, 금천아가 그 뒤를 따랐다.
그자는 골목으로 들어서더니 별안간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앵앵은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빠르게 뒤쫓았다. 그자를 따라 모퉁이를 돌고 돌며 점점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조금 이상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니, 금천아가 미처 그녀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사앵앵은 그녀가 골목에서 길을 잃었을까 봐 걱정되기 시작했다.
금천아부터 찾아야 하는 건 아닌지 잠시 고민하던 찰나, 앞에서 걸어가던 옛 주인장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쭉 내밀고 이곳저곳 살펴보았지만, 텅 빈 길들만 마구잡이로 얽혀 있을 뿐이었다. 더는 그자를 뒤쫓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풀이 죽은 채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몇 발짝이나 내디뎠을까. 대뜸 길가에 있던 대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단번에 사앵앵을 안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사앵앵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꼼짝없이 그들에게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