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7화
비가 내린 뒤라 지면은 매우 미끄러웠다. 사앵앵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반면 그녀 옆을 따르는 금천아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다 그만 발을 잘못 디뎌 몸을 휘청거렸고 사앵앵은 서둘러 금천아를 붙잡았다. 사앵앵은 도저히 잔소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여인답게 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니. 똑똑한 낭군에게 시집가고 싶다며! 그리 덜렁대면 낭군이 도망갈 거다.”
말대꾸하려고 고개를 든 우연히 앞을 보고 멍한 얼굴을 했다. 사앵앵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흑의에 복면까지 쓴 사람이 삼 척 앞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궂은 날씨의 저녁이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절로 겁이 났다. 사앵앵은 적이 움직이기 전엔 꿈쩍도 안 할 생각인 듯 가만히 서서 그자를 주시했다. 금천아가 벌컥 화를 내며 호통쳤다.
“누구냐? 어째서 우리 앞길을 막는 것이냐?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복면을 쓴 사람은 금천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계집종이 이리 우람할 줄이야. 방해가 될 듯하니 거사를 성공하려면 계집종부터 먼저 해결하는 게 나을 듯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금천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금천아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사앵앵이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그녀에게 던졌다.
“천아야, 네 실력을 보여줘!”
금천아가 또랑또랑하게 답했다.
“예!”
날카로운 칼을 가슴 위로 들어 올린 그녀는 누구보다 위풍당당했다. 복면을 쓴 자도 그녀의 기개 넘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 무술까지 연마한 자였다니. 그는 가만히 서서 계집종의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지켜보기로 했다.
비수가 빠르게 춤을 추더니 이윽고 그의 눈앞에서 새하얀 빛을 내뿜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손등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보니 그의 손등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등의 상처는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었다.
“…….”
이 기이한 공격은 대체 무슨 술수란 말인가? 설마 저 계집종이 숨은 고수라도 된단 말인가? 그는 한 차례 고함을 내지르더니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내 다치지 않은 왼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리며 금천아를 노려보았다.
“대체 누구냐. 이름을 대거라!”
금천아는 그의 손등에 난 상처를 보며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금천아다. 어쩔 건데?”
“무슨 무술을 쓰는 것이냐, 사부는 누구고?”
금천아가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발골술이라고 하는데, 우리 아버지께 배운 것이지.”
“아버지가 누군데?”
“우리 아버지는 금희金喜라는 분이시다. 마을 사람들은 다들 아버지를 노희두老喜頭라고 부르지.”
“발골술이 무엇인데?”
“소나 양고기 뼈를 발골하는 것이지.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다들 발골을 잘하거든. 우리 아버지도 그렇고.”
그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버지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을 정도니까. 난 그런 아버지께 기술을 전수받았으니 날 뛰어넘을 사람은 아버지 말곤 없겠지?”
그녀가 턱을 들어 올렸다 내리며 그의 손을 가리켰다.
“방금 내가 반 촌寸만 더 들어갔어도 네 손은 살갗이 분리되고 뼈만 남았을 것이다.”
“…….”
그는 화가 치밀었다. 강호의 고수가 양 뼈나 발라내는 계집에게 공격을 당하다니! 엄청난 수치였다. 그가 조용히 기를 모아 왼손에 힘을 주려는데 금천아가 차갑게 말했다
“왼손도 발리고 싶어?”
복면을 쓴 자는 본능적으로 왼손을 뒤쪽으로 웅크렸다. 하지만 저 계집종을 무서워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 근본도 없는 시골 계집이 아니던가. 방금은 그가 미리 대비하지 못해 당한 것뿐이었다.
그는 기합을 넣으며 몸을 날렸지만, 순간 대나무 장대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았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려는 찰나, 왼손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곧장 지붕 위로 몸을 피했다. 그리곤 질겁한 얼굴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왼손을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 거센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사앵앵이 대나무 장대를 들고 그의 발을 힘껏 내리친 것이다.
“내려와!”
“…….”
그와 같은 무술 고수가 어찌 일반인 두 명에게 이런 모욕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 대장부는 머리에서 피를 흘릴지언정 기개를 잃어선 안 되는 법이었다.
그는 훌쩍 뛰어 밑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금천아의 예리한 눈빛은 그를 끈질기게 따라갔다. 그녀는 그의 발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는 헉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위로 올라가려 했다. 계집애의 발골술은 정말 신출귀몰했기에 발까지 다친다면 그에겐 죽음뿐이었다.
하지만 사앵앵이 그를 내버려 두겠는가. 그녀는 대나무 장대로 그를 내리쳤고, 이번엔 금천아까지 직접 나섰다. 금천아가 괴력을 써서 장대를 내리치자 대나무가 조각조각 쪼개지는 바람에 한 번의 공격에도 여러 차례의 공격을 받는 기분이었다. 복면을 쓴 자는 정말인지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땅바닥에 엎어졌다. 몸을 일으켜 보니 사앵앵은 대나무 장대를, 금천아는 비수를 쥔 채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앵앵을 잡기 위해 강호의 고수인 그가 고용된 것인데, 도리어 도살 직전인 양이 되다니? 그때, 뒤에서 누군가 목청을 높였다.
“웬 놈이냐? 감히 대낮에 폭력을 휘두르다니. 여봐라, 어서 저자를 잡아들이거라!”
사앵앵이 고개를 돌리자 사정우가 하인을 데리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복면을 쓴 자는 그의 말에 순간 마음을 놓았다. 그래, 사 주인장이 그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사정우의 명령에 그의 하인들은 곧장 복면 쓴 자에게 달려갔다. 하인들은 달려오면서도 은근슬쩍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복면인은 상황을 곧장 파악하고 꽁무니를 내빼며 도망쳤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정우가 사앵앵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뒤늦게 도착한 탓에 사 여주인장을 놀라게 했습니다.”
“너무 일찍 오셨는걸요.”
사앵앵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다 잡았는데 사 주인장이 오시는 바람에 놓쳤잖아요. 일부러 훼방을 놓으러 오신 거예요?”
“어찌 그런 말을.”
사정우가 억울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저 지나가던 길에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 도와주려 한 것뿐인데… 훼방이라뇨?”
사앵앵이 그를 흘겼다.
“하면 주인장의 하인들이 저자를 잡아 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럴 것이오.”
사앵앵은 코웃음을 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의 하인들이 다시 돌아왔다. 역시나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빈손이었다. 사정우가 물었다.
“그자는?”
“무술을 익힌 숙련자라 소인들이 당해 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도망쳐 버렸지요.”
“이런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
사정우가 매섭게 소리쳤다.
사앵앵이 혀를 차며 자신의 여종을 불렀다.
“천아야, 가자.”
“사 여주인장.”
사정우가 그녀를 뒤쫓았다. 사앵앵이 고개를 돌려 대꾸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
어찌 입을 떼야 한단 말인가. 사앵앵을 위기에서 구해 주는 상황을 만든 후에 친분을 쌓을 생각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가 조금만 늦게 나타났다면 소위 강호의 고수라 불리던 자는 사앵앵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만약 그자의 진술을 받아냈다면 그는…….
골목으로 사라지는 사앵앵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정우는 치솟는 화를 누르지 못하고 옆에 있던 하인을 걷어찼다.
“어디서 저딴 놈을 강호의 고수라고 찾아온 것이냐. 두 여인네도 이기지 못하는 쓸모없는 것을! 이런 머저리들 같으니!”
돌아가는 길에 금천아가 물었다.
“부인, 오늘 일 아무래도 조금 수상쩍지 않습니까?”
“맞아. 평소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인데 오늘은 한 사람도 없었잖아.”
금천아가 말했다.
“그럼 누군가 길목을 막았단 말씀입니까?”
사앵앵이 냉소를 지었다.
“누군가 일을 꾸민 거지.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네 발골술에 깜짝 놀라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거고.”
“사 주인장이 이 일을 꾸몄단 말씀입니까?”
“그자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사앵앵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궁금한 건 우리가 그자에게 방해되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못살게 구냐는 거야.”
금천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혹 사 주인장이 부인을 흠모하는 게 아닐까요?”
사앵앵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날 보는 눈빛이 정말 조금 이상하더라고.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똑같았어. 장군이 돌아오거든 알려 줘야겠어.”
금천아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
“장군께서 아시면 사 주인장은 죽은 목숨이겠네요!”
금천아는 그래도 사 장군에게 이 일을 꼭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어느 날 정말 사달이 난다면 알고도 모르는 척했다며 사 장군이 그녀에게 채찍질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사 장군이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사정우의 일을 장군에게 낱낱이 고했다. 사장풍은 다른 일은 몰라도 부인의 일만큼은 하늘처럼 중요시했기에 곧장 호위병을 데리고 사정우의 저택을 찾아갔다. 흉악하게 생긴 관병들이 찾아오자 저택 관리는 질겁한 얼굴을 한 채 사정우에게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사정우가 재빨리 달려 나와 병사들에게 예를 갖췄다.
“군사 나리들께서 저희 집은 어쩐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사장풍은 사정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런 꼴같잖은 게 감히 자신의 부인을 탐내다니. 마음 같아선 목을 베어 공으로 삼아 뻥 차버리고 싶었다. 그가 목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물었다.
“자네가 이 집의 주인인가?”
“예. 공정히 장사하는 사씨라 합니다. 군사 나리께서 저희 집엔 어인 일로…….”
사장풍이 손을 내저었다.
“별다른 일은 아니네. 그저 지나가는 길에 목이 말라 물 한잔 얻어먹으러 왔네.”
“…….”
흉포한 모습을 보아하니 물을 얻어먹으러 온 것은 아닌 듯했다. 게다가 그의 집안은 임안에서도 제법 명망 높은 가문이었기에 감히 저택에 쳐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역시 사장풍을 위아래로 훑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밝게 빛나는 눈빛, 영기가 넘치는 미간까지. 그는 순간 마음이 동요되었다.
“감히 여쭙건대, 군사 나리의 존함이…….”
사장풍이 그에게 손짓했다. 사정우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자 사장풍은 별안간 검을 뽑아 들었다. ‘칭’하는 소리와 함께 눈부시게 새하얀 검이 어둑어둑한 주변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