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704)화 (703/1,192)

제704화

“나리.”

두소진이 걱정스러운 듯 그를 불렀다.

“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제게 말씀해 보세요.”

사정우는 심호흡을 하더니 손을 내저었다.

“괜찮소. 그만 나가보시오. 혼자 조용히 있고 싶소,”

평소 교양이 넘치던 그가 이리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추태를 부리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두소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넷째 아우에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할까요?”

사정우는 짜증이 치밀었다.

“아니오. 그만 나가시오.”

두소진은 말없이 물러났다. 사정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렇듯 자신의 부인들은 그를 하늘처럼 여기며 아첨을 떨었고, 정성스럽게 그의 시중을 들었다. 그 누구도 감히 그를 거역하거나 불경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는 이런 이유로 이토록 화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 * *

금천아는 창고에서 밀가루 한 포대를 들고나왔다. 사앵앵이 허리를 숙이고 고추기름을 만들고 있자 그녀는 주위에 있던 점원에게 밀가루 포대를 던졌다.

“이거 받아.”

점원은 황급히 손을 뻗었다. 어찌나 무거운지 점원은 몸을 휘청거리며 포대를 받았다. 금천아는 하찮다는 눈빛으로 그를 흘겼다.

“몸이 저리 부실해서야… 어찌 장가를 들려고. 어서 류 어멈한테 가져다드려. 기다리고 계시니까.”

점원은 끙끙대며 밀가루 포대를 옮겼다. 그는 속으로 금천아 같은 여자와 혼인을 한다면 인생을 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앵앵은 금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성에 왔으니 조금 더 얌전하게 행동해야지. 도성에서 신랑감을 찾겠다며? 그런데 그리 행동하면 어찌 신랑감을 찾겠어?”

금천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병아리처럼 부실한 놈은 거저 줘도 안 가질 거예요.”

“그럼 어떤 사람을 원하는데?”

사앵앵이 물었다.

“주자 같은 사내를 원하니?”

“주자 같은 사내는 서북에 널리고 널렸는데 무엇 하러 도성에서 찾겠어요.”

“그런 어떤 사내?”

금천아가 부끄럽게 웃었다.

“학식이 있는 똑똑한 사람이요.”

사앵앵이 웃음을 터뜨렸다.

“본인은 글도 모르면서 신랑감은 똑똑한 사람을 찾는구나.”

“그럼요. 그래야 서로 보완이 되죠.”

금천아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러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사앵앵에게 물었다.

“부인, 오늘 부인과 한 사내가 위층에서 얘기하는 걸 보았습니다. 장군께서 이 일을 물으신다면 전 어찌 답해야 합니까?”

사앵앵이 눈을 희번덕였다.

“허, 날 협박하는 것이야? 사실대로 말하거라. 누군가 날 흠모하니 긴장해야 한다고.”

“그 사내가 정말 부인을… 아니죠?”

“아니긴… 역참을 운영하면서 내가 온갖 사람을 다 만났잖아. 나쁜 맘을 품은 사람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지.”

사앵앵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리고 내가 훨씬 아깝지 않아? 애당초 장군을 불쌍히 여기지만 않았어도 나는… 됐다, 됐어. 이미 다 지나간 일을.”

금천아가 얼굴을 굳혔다.

“저도 그 사람 얼굴 기억해요. 감히 부인을 넘보다니… 다음에 또 오거든 제가 쫓아낼게요.”

“절대 안 돼. 그 사람이 누군지나 알아?”

“그 사람이 누구든 부인을 잘 지키지 못하면 장군께서 채찍으로 벌을 내릴 거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장군은 그저 종이호랑이일 뿐이야. 말은 그렇게 해도 너희에게 채찍을 든 적이나 있어? 나였다면 뱉은 말은 꼭 지킬 텐데 말이야!”

“…부인께서 장군이 아니신 게 정말 다행이네요.”

이런 시답잖은 말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온 사내는 품에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세 명의 아이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상에… 가 대인이 어찌 이곳에 공주와 황자를 데려왔단 말인가?

그녀는 서둘러 그들을 맞이했다. 가까이 가 보니 청양 공주와 성 황자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성 황자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난 일층에서 안 먹을 거야. 사람이 너무 많고 지저분하단 말이야.”

그에 청양 공주는 혀를 쭉 빼며 그를 놀렸다.

“난 아래층에서 먹을 건데.”

그녀가 우측 편청을 가리켰다.

“난 저기 있는 음식들을 먹을 거거든.”

가동이 조용히 타일렀다.

“존비가 유별하니 위층에서 먹는 게 좋겠습니다.”

“어머니가 그랬어요. 세상 사람들을 착한 마음을 가진 이들과 나쁜 마음 가진 이들로 구별할 수는 있어도 높고 낮음으로 나눌 순 없다고요.”

너무 심오한 말이었기에 가 대인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 황자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난 위층으로 갈 거야. 여긴 너무 더러워.”

사앵앵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이 많긴 해도 점원들이 부지런히 청소해서 아주 깨끗한데.’

그때, 청양 공주가 한 점원이 들고 있던 수건을 잡아당겨 성 황자의 옷깃에 문질렀다.

“하하, 이제 네 옷도 더러워졌으니 아래층에서 먹어야겠네.”

성 황자는 주먹을 꽉 쥐었지만 차마 공주를 때리진 못했다. 귀신보다 무섭다는 공주를 성 황자가 당해 낼 리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보던 사앵앵은 역시 공주에 대한 말들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 대인.”

그녀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혹여 공주와 황자의 신분이 탄로 날까 봐 문안까지 드리진 못했다.

사장풍은 도성에 돌아온 뒤로 절친한 친구인 가동과 몇 차례 만났다. 가동은 사앵앵에게도 친근하게 인사했다.

“사 여주인장.”

가동이 공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청양이 봉봉이와 만나고 싶다고 해서요. 여의루의 맛있는 음식도 먹을 겸 찾아왔습니다.”

사앵앵은 그들의 안전이 걱정스러웠다.

“위층에서 강남 음식을 드시어요. 아래층의 음식들은 어디 내놓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괜찮아요.”

청양 공주가 말했다.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저도 어디 내놓을 만한 게 못 된대요. 그러니 제겐 아래층이 딱 맞는걸요.”

사앵앵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넓은 곳으로 안내하지요.”

하지만 성 황자는 기분이 나쁜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양 공주가 성 황자 앞에서 주먹을 휘둘렀다.

“사람들 앞에서 누이한테 맞고 싶어?”

성 황자는 울먹거리며 가동을 바라보았지만, 가 대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산적처럼 괴팍한 청양 공주의 등 뒤에 황제까지 있으니 말이다. 그때 영안이 성 황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되었어요. 밖에서는 괜히 일을 저지르면 안 돼요.”

그리곤 그가 성 황자의 귓가에 대고 빠르게 한 마디 덧붙였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은 법이니까요.”

성 황자는 그 말에 결국 단념했다. 그는 미래를 약속하며 떨떠름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앵앵은 가동 품에 있던 가소타를 제 품에 안았다. 순둥순둥한 가소타는 사앵앵이 손을 뻗자마자 곧장 그녀의 품에 안겼다. 앵앵 이모의 품에선 어머니처럼 좋은 향기가 났다. 어머니는 잘 안아 주지 않았지만, 앵앵 이모는 그녀를 아주 꽉 안아 주곤 했다. 사앵앵이 입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소타야, 나중에 커서 이모 며느리하렴.”

가동이 웃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네요. 저와 장풍이는 형제니까 소타와 금언이에게 정혼을 맺어 주죠.”

사앵앵이 말했다.

“두 아이한테도 의견을 물어야지요. 소타야, 나중에 크면 금언 오라버니한테 시집올래?”

가소타는 시집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귀엽게 대꾸했다.

“네.”

사앵앵은 하인에게 사금언을 불러오라고 분부했다. 쏜살같이 달려온 사금언은 청양 공주를 먼저 발견하고 기쁘게 인사를 건넸다.

“청양 누이가 오셨군요! 절 보러 오신 거예요? 무얼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전부 다 사드릴게요…….”

사앵앵은 몇 차례나 아들의 이름을 불렀지만, 사금언은 들은 척도 않고 청양 공주 주변만 맴돌았다. 가동이 웃으며 말했다.

“허, 금언이는 우리 소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구나.”

그가 손을 뻗어 가소타를 다시 안았다.

“우리 딸, 걱정 말아라. 나중에 이 아비가 좋은 신랑을 찾아 줄 테니.”

가소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어느새 사봉봉도 내려왔다. 얌전한 사봉봉은 어머니를 먼저 바라보았다. 사앵앵이 말했다.

“이름을 부르렴, 괜찮아.”

사봉봉이 곧장 인사를 건넸다.

“청양, 성, 영안, 소타야, 안녕!”

가동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봉봉이는 예의가 참 바르구나.”

성 황자는 자신의 새하얀 장포를 단정히 정리하더니 사봉봉에게 인사를 건넸다.

“봉봉 누이, 안녕. 오늘은 무슨 향을 썼길래 이렇게 향기가 좋아?”

그 말을 들은 청양 공주가 경멸스럽게 그를 흘겼다.

“성아, 넌 대체 여인들 향을 연구하는 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너……!”

성 황자는 화를 내며 맞섰다. 영안은 탁자 아래에서 가볍게 그의 발을 건드리며 눈짓을 보냈다. 성 황자는 코웃음을 치고는 속으로 영안이 해 준 말을 연신 되뇌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은 법,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은 법…….”

* * *

정원에서 물건을 정리하던 사앵앵이 원천림에게 물었다.

“찻잎은 이게 다예요?”

“예.”

원천림이 말했다.

“영감님이 다음 찻잎은 내년 초봄쯤 되어야 나온다고 하시더군요. 영감님이 일찌감치 물건을 쟁여 둘 테니 여의루에 일 년 동안 공급하는 건 충분할 겁니다.”

“옷감은 어떻게 돼 가요?”

“영감님이 주인장의 말을 듣고는 날이 추워지기 전에 물건을 잔뜩 사들였어요. 작년에 사둔 목화솜이랑 올해 나온 목화까지 다음번에 다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사앵앵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 창고는 찾아봤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다 찾아 뒀으니까요. 앞뒤로 마당이 나 있어서 마차를 끌고 짐을 운반하기도 아주 편합니다.”

사앵앵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가을비가 쏟아지는 계절이 오겠군요. 다음번엔 지우산을 가져와 주세요. 곧 중추니까 계화주도 함께 가져다주시고요. 북쪽에서도 계화주를 담그긴 하지만 강남의 것과는 맛이 다르니, 여의루의 강남루에선 강남의 계화주를 제공할 겁니다.”

원천림은 알겠다고 대꾸한 뒤, 그녀에게 보고했다.

“주인어른, 사 주인장을 알아보라 하셔서 수소문해 보았습니다. 역시 도성에서 기반이 꽤 탄탄한 집안이더군요. 승상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맞이할 정도로요. 워낙 조용조용한 사람이라 다들 그가 금창錦昌 포목점의 주인장이라는 것밖엔 모르더군요.

한데 들리는 소문에… 비단 사업만 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성 밖엔 대규모 농장이 여러 개 있고 성안에도 가게가 여러 개 있는데 자세한 내막까진 확인이 힘들었습니다. 아무튼 사정우謝靖宇라는 자는 어쩐지 비밀이 많은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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