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3화
성 황자는 알겠다고 대꾸하고는 사봉봉과 사금언을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온 세 아이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성 황자가 사봉봉 주변을 맴돌더니 물었다.
“누이는 무슨 향을 써? 냄새가 아주 좋네.”
사봉봉은 처세술에 능한 아이였지만 거침없이 다가오는 사내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절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전 향을 쓰지 않아요. 아마 옷에 밴 향 내음일 겁니다.”
사금언은 난처해하는 누이의 속내를 알아차리고는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다.
“전하, 궁에 백두루미가 있다던데 보여 주실 수 있으신지요?”
성 황자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가 또다시 사봉봉을 바라보았다.
“누이도 같이 가자.”
사봉봉이 단번에 거절했다.
“두 분이 가세요. 전 이곳의 꽃밭이 좋으니 실컷 볼게요.”
성 황자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럼 금방 갔다 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예, 천천히 다녀오세요, 전하.”
성 황자가 자리를 뜨자 사봉봉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입을 가린 채 가볍게 웃었다. 정말 재미있는 아이였다. 어린 나이에도 저리 풍류가인 척하다니 말이다.
황제는 꽃을 좋아하는 황후를 위해 정원 관리사를 시켜 승덕전 주변에 꽃을 가득 심어 두었다. 덕분에 온갖 진귀한 꽃이 궁전 주변을 에워쌌다. 전부 다 바깥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품종이었다. 곳곳에 만개한 꽃들은 제각각 눈부신 색으로 세상을 수놓고 있었다.
서북에서 자란 사봉봉은 이렇게 많은 꽃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신이 난 그녀는 꽃을 구경하다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매서운 호통이 터져나왔다.
“이런 못난 노비를 보았나! 감히 황후 마마의 꽃을 꺾으려 해?”
깜짝 놀란 사봉봉은 황급히 몸을 돌려세웠다. 위엄 넘치는 목소리와는 달리 목소리의 주인은 여덟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였다. 그녀보다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진 않았지만 키는 훨씬 컸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누구냐?”
찌푸린 눈매에 예리한 눈빛까지… 어린 나이에도 제왕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사봉봉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이분이……. 그녀가 대꾸도 하기 전에 함께 서 있던 어린아이가 입을 열었다.
“태자 형님, 혹시 오늘 오기로 했다던 손님이 아닐까요?”
역시 태자였다. 사봉봉은 서둘러 예를 갖췄다.
“소녀 봉봉,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태자는 안색을 누그러뜨렸지만 여전히 예를 갖추지 않고 말했다.
“네가 사 대인 댁 규수더냐?”
“예, 소녀 사봉봉. 어머니를 따라 황후 마마를 뵈러 왔습니다.”
“입궁할 때 규율도 배우지 않았느냐?”
태자가 물었다.
“궁 안의 꽃과 나무를 어찌 마음대로 꺾으려 한단 말이냐?”
태자의 꾸짖음에 사봉봉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태자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옆에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난청아, 어서 가자. 모후를 뵙고 다시 돌아가 두 판만 더 붙자꾸나.”
* * *
성 황자는 사금언을 데리고 태명호에서 백두루미를 구경했다.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성 황자는 백두루미를 보면서 상상에 잠겼다. 자신이 선인仙人으로 화하여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해진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사금언은 그와 너무 달랐다. 아이는 백두루미를 보더니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혼비백산한 백두루미들이 날개를 퍼드득거리며 도망치자 사금언은 손뼉을 치며 낄낄거렸다.
성 황자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봉봉 누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조용히 감상하며 번갈아 시를 읊을 수 있었을 텐데……. 사금언은 그야말로 묵용청양의 판박이야.’
그때, 귀신도 무서워 피하는 누이인 묵용청양이 그의 시야에 불쑥 나타났다. 영안을 데리고 나타난 그녀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성아!”
성 황자는 곧장 입이 쭉 나왔다. 짜증이 솟구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게 꼭 모후의 말투를 따라서 그를 성아라고 불렀다. 사실 그도 그녀를 청아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후환이 두려웠다. 사금언도 묵용청양과 영안을 발견하고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예요?”
성 황자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귀신도 무서워서 피하는 사람이야.”
“좀 차가워 보이는 저 형님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 앞에서 걸어오는 웃음이 간사한 누이 말이야.”
사금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와, 아주 예쁜 누님이시네요.”
“그건 위장일 뿐이야. 사실은 여기 금궁禁宮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지.”
“그럴 리가요. 제가 보기에는 너무 예쁘고 귀여운 누님이신데요?”
성 황자는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망했군. 너도 이미 청양한테 나쁜 물이 든 거야.”
성 황자가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사금언은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달려온 묵용청양은 가쁜 숨을 내쉬며 사금언에게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네가 사 대인 집안의 꼬마야?”
“공주 전하를 뵈어요. 저는 사금언이라고 해요.”
“몇 살이야?”
“조금 있으면 다섯 살이 되어요.”
“나는 여섯 살이야. 나를 청양 누님이라고 불러.”
생글생글 웃는 청양 공주를 보며 사금언은 의문에 빠졌다. 이렇게 귀엽고 친절한 공주 전하를 성 황자는 왜 귀신보다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는 걸까.
“청양 누님, 안녕하세요.”
“착하다.”
묵용청양이 영안을 소개했다.
“여긴 영 대인 가문의 공자야.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영안 형님이라고 불러.”
“영안 형님, 안녕하세요.”
“사 아우, 안녕하시오.”
영안은 공수한 손을 살짝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안은 이미 청양 공주에게 지칠 대로 지쳐 짜증이 가득 난 상태였다. 그건 성 황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묵용청양이 동생을 힐끔 쳐다보니, 역시 그는 잔뜩 경계하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사 아우가 이미 네 사람이니?”
그들 남매는 더 어릴 때부터 물건을 사이에 두고 다투곤 했다. 청양 공주는 항상 성 황자의 물건을 차지했고, 성 황자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금 더 자란 지금, 성 황자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사금언의 팔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먼저 알았으니 당연히 내 사람이야.”
청양 공주는 생긋 웃으며 사금언을 바라봤다.
“성아를 따를 거야? 아니면 나를 따를 거야?”
그녀가 영안을 가리켰다.
“이 사람도 내 사람이야.”
영안은 마음속으로 백 번이나 눈을 부라렸다. 누가 자기 사람이라고?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는 것이지.
“영안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야. 포고를 하면 적수가 없다니까.”
영안은 청양 공주가 너무 싫었지만, 칭찬을 받으니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는 뒷짐을 지고 고개를 쳐들며 도도한 태도를 취했다.
“성아는 번갈아 가며 시를 읊는 것만 좋아해.”
청양 공주는 다시 성 황자를 가리켰다.
“얘는 계집애처럼 어떤 향을 쓰는지 연구하지. 같이 놀면 하나도 재미가 없을 거야.”
면박을 당하고 어찌 참을까. 화가 치민 성 황자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네가 계집애지!”
청양 공주는 득의양양하게 받아쳤다.
“난 원래 계집이야!”
사실 사금언은 누군가를 따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무예를 좋아하는 그는 시를 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주저 없이 성 황자의 손을 뿌리쳤다.
“저는 청양 누님을 따를래요.”
“그래.”
청양 공주가 사금언의 작은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좋아. 앞으로 나를 따르는 거야. 본 공주는 자기 사람을 잘 챙겨. 못 믿겠으면 영안에게 물어봐.”
입이 툭 튀어나온 영안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렇게 청양 공주는 지나가다가 또 한 명의 자기 사람을 만들었다. 그녀는 장군을 양쪽에 거느린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멀어져 갔다.
홀로 남겨진 성 황자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귄 지 반 시진도 안 된 친우를 순식간에 빼앗아 버리다니! 분개한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삭여야 했다. 그래, 그깟 꼬맹이가 뭐 어떻다고, 봉봉 누이한테 가면 되지.
청양 공주가 걸으면서 사금언에게 물었다.
“너희 누나는? 성아가 빼앗아 가지 못하게 내가 미리 거두어야겠어.”
“…….”
공주의 말을 듣다 보니 왠지 자신과 누이가 요괴라도 된 것 같았다. 어떻게 사람을 거둔다고 말하지? 영안이 그녀에게 미리 귀띔해 주었다.
“사 누님은 공주보다 나이가 많아서 놀아 주려 하지 않을 거예요.”
청양 공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너도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그래도 나랑 노는 걸 좋아하잖아.”
차마 답을 할 수 없는 영안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난 네가 강압적으로 몰아세우니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는 거라고.’
승덕전에 들어간 후, 청양과 영안이 앞으로 나와 절을 올리자 백천범은 예를 갖출 필요 없다고 만류했다. 그리곤 사앵앵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이 아이가 바로 청양이라 부르는 내 못난 딸이야. 그리고 저 공자는 영 대인의 도령인 영안이고.”
백천범은 두 아이에게 다시 명했다.
“사 부인께 인사드리렴.”
아주 영리한 청양은 조그마한 입으로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사 부인, 안녕하세요.”
“공주 전하, 반갑습니다.”
사앵앵으로서는 이렇게 귀여운 청양 공주가 황후 마마를 깊은 근심에 빠뜨린 연유를 알 리가 없었다.
이윽고 영안을 바라본 그녀는 깊은 인상을 남겼던 영구를 떠올렸다. 늘 황제의 곁을 지키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듯한 냉혈한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그래서일까, 아들도 똑같았다. 영안도 아버지처럼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이윽고 사봉봉을 발견한 청양 공주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사 언니, 안녕하세요.”
사봉봉은 시원시원하게 답례했다.
“공주 전하를 뵈옵니다.”
백천범은 꽃처럼 예쁘장한 소녀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계속 보고 있으니 두 사람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어린 백양나무처럼 똑바른 자세로 서 있는 사봉봉은 의복이 새것처럼 깨끗하고, 머리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했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만인이 좋아할 아이였다.
다시 묵용청양을 바라보니, 이리저리 건들거리며 서 있는 자세에 머리는 흐트러진 채였다. 더욱이 치맛자락에는 뭔지 모르는 얼룩까지 묻어 있었다. 얼굴에는 태양처럼 해맑은 미소가 피어 있었지만, 너무 헤프게 웃는 것도 좋은 건 아니었다.
백천범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겨우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어찌 이리 차이가 크단 말인가? 그녀도 사봉봉처럼 얌전하고 철이 든 딸을 원하지만… 어쩌겠는가. 부모에게는 아이의 행복이 가장 중요했다. 어쨌든 아직은 어린 나이인 만큼 청양이 제멋대로 난리를 쳐도 봐줄 수 있었다. 좀 더 자라면 그녀도 자연히 철이 들겠지.
청양 공주는 사봉봉도 자기 사람으로 거두고 싶었지만, 막상 만나 보니 그런 생각이 없어졌다. 겨우 한 살 많았지만, 성숙한 사봉봉 앞에서는 그녀가 무엇을 하든지 유치해 보일 뿐이었다. 묵용청양은 조금 낙담했지만, 곧 대범하게 사실을 받아들였다. 태자 오라버니가 있으니 언니가 한 명 더 생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