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2화
“멍하니 서서 뭐 하고 있어요? 소타 아버지.”
청양 공주가 그를 불렀다.
“가서 기저귀 좀 가져와요. 기저귀를 갈아야 하니까요.”
“…….”
“소타 아버지, 왜 그래요? 걱정이라도 있는 거예요? 나한테 말해 봐요.”
“…….”
“오늘 조정에서 황상께 꾸중을 들은 거예요?”
“…….”
“소타 아버지, 귀가 먹었어요?”
영안은 언짢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귀는 네가 먹었지!”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가서 기저귀 좀 가져와요.”
“안 가!”
“왜요?”
청양 공주는 큰 눈을 깜빡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아이가 쉬를 했단 말이에요!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어요?”
“아버지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시녀한테 가져다 달라고 해.”
“이 놀이에 시녀는 없단 말이야. 어머니랑 아버지랑 아기밖에 없어.”
“…….”
옆에서 지켜보던 녹하는 웃겨 죽을 것 같았다. 청양과 놀아 줄 땐 누구든 난감한 역할을 맡아야 했다. 짜증이 난 영안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녹하에게 물었다.
“고고, 난청이는요?”
“아버지랑 입궁했어. 아마 태자께 간 것 같아.”
녹하가 두 아이에게 물었다.
“오늘은 상서방에서 공부 안 하니?”
청양 공주가 가소타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으며 장난을 쳤다.
“부황께서 공부하기 싫을 땐 안 가도 좋다고 하셨어요. 자신을 힘들게 하지 말라고요.”
“…그건 황상께서 공주를 너무 아끼시기 때문이지요. 한데 영안이는 어째서 가지 않은 거예요?”
“제가 부황께 청을 드렸거든요. 영안도 저랑 똑같이 대우해 달라고요. 제가 볼 땐 얘도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요.”
“…….”
누가 싫어한다고. 그는 상서방에서 공부하는 게 정말 좋았다. 청양 이 못된 것은 늘 자기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니, 정말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녹하는 딸을 다시 품에 안았다. 순한 가소타는 청양 공주가 마음대로 조몰락거려도 칭얼대지 않았다. 그렇다고 활짝 웃어 주지도 않았다. 청양 공주가 아이를 보며 웃었다.
“소타는 정말 착하다니까요. 성아랑은 너무 달라요. 걘 어릴 때 얼마나 시끄러웠는데요.”
“…….”
시끄럽게 울던 아이는 성 황자가 아니라 공주 본인이었다. 성 황자는 얼마나 얌전하고 말도 잘 들었는데. 성 황자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것처럼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영안은 입을 삐죽거릴 뿐이었다.
“성 황자랑 동갑이면서 뭘 안다고?”
“내가 더 많거든. 난 누나잖아.”
“쌍둥이라 동시에 태어났잖아.”
“어쨌든 내가 먼저 태어났어. 그래서 나한테 누나라고 부르는 거고.”
“성 황자가 누나라고 부른다고 해도 어쨌든 나이는 같아.”
“허튼소리, 내가 더 많다니까.”
“같은 날 태어났는데 어떻게 더 많을 수 있어?”
“몇 시진 정도는 더 많을 수 있잖아?”
“내가 듣기론 몇 시진은커녕 일각 차이도 안 난다던데.”
영안이 코웃음을 쳤다.
“토끼가 새끼를 낳는 것도 못 봤어? 한 마리가 태어나자마자 또 한 마리가…….”
깜짝 놀란 녹하는 영안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찌 황상의 자손을 토끼에 비할 수 있단 말인가. 황상께서 아셨다면 영안은 또 봉변을 당할지도 몰랐다.
녹하가 겨우 달랜 끝에 두 아이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서둘러 궁으로 돌려보내야 그녀도 조금은 쉴 수 있을 터였다. 문 앞에 서서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던 녹하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청양처럼 악동을 낳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소타는 조금 넙데데한 얼굴이긴 했지만 말은 잘 듣는 온순한 아이였다.
* * *
성큼성큼 남서방 안으로 들어온 사장풍은 상석에 앉아 있는 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신 사장풍, 황상을 뵈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일어나게.”
황제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앉아서 얘기하게, 사 장군.”
“황송하옵니다, 폐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장풍은 거침없이 자리에 앉았다. 황제가 그를 유심히 살폈다.
“서북에서 여러 해 동안 지내느라 고생 많았네.”
“황상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 일한다 한들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까맣게 탄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황제는 괜한 경계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사장풍이 자신보다 어리니 백천범과 더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서북으로 보낸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사장풍은 서북의 강한 모래바람과 햇살에 족히 몇 살은 더 늙어 보였고, 황제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황제는 안색도 밝아졌다.
“이제 막 돌아왔으니 어려운 게 있거든 짐에게 말하게. 사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왔으니 응당 관저를 하사해야 하지만, 국고 형편이…….”
“황상, 신 걱정은 마십시오. 신의 부인이 워낙 능력이 좋아 이미 좋은 집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황제가 기뻐하며 웃었다.
“자네 부인의 수완이 좋은 건 짐도 잘 알고 있지. 그런 부인이 곁에 있으니 짐도 걱정할 필요 없겠군.”
“황상, 신의 직위는…….”
“그건… 짐이 다 생각해 두었네.”
황제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성 외곽에 황성을 보위하는 정예 부대 주둔지가 있네. 자네가 그곳을 통솔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걸세. 말을 달려 한 시진이면 도성에 돌아올 수 있으니, 부부가 함께 지내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을 걸세. 어찌 생각하는가?”
사장풍이 조금 주저하다 말했다.
“신은 무관이니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집안의 모든 일을 부인이 도맡아야 하니…….”
“걱정 말게. 자네 부인은 능력이 좋으니 집안일도 잘 돌볼 수 있을 걸세.”
“…….”
역시 교활한 황상은 어디 가지 않았다. 예전 모습 그대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 * *
사앵앵을 만난 백천범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려는 사앵앵을 황급히 일으키며, 백천범이 살갑게 말했다.
“이런 허례허식은 차릴 것 없어. 오수진에서 지냈던 것처럼 똑같이 대해 줘.”
그녀가 사앵앵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
사앵앵도 백천범을 만나 기쁘긴 마찬가지였다. 예전의 갈등은 오래전에 잊었으니, 이제는 애틋한 우정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그녀도 백천범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마마야말로 더 예뻐지셨습니다.”
사앵앵을 다정히 자리로 끌어당긴 후, 백천범은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여자아이는 짙은 눈매에 시원시원한 성격이 드러나는 게 사앵앵을 닮았다. 남자아이는 씩씩해 보이면서도 커다란 눈망울이 아주 똘똘해 보였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가벼이 손짓했다.
“이리 오렴. 이 이모에게 얼굴 좀 가까이 보여줘.”
황후가 자신을 이모라 칭하긴 했지만, 여자아이는 엄격히 예를 갖춰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폈다.
“봉봉, 마마를 뵈옵니다.”
뒤이어 봉봉이 동생의 손을 붙잡고 백천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착하구나.”
아이들을 바라보던 백천범의 눈에 기쁨이 넘쳐났다.
“두 아이 모두 똘똘한 것 좀 봐. 앵앵이 너랑 사 장군이 아주 잘 가르쳤어.”
“과찬이십니다, 마마. 보잘것없는걸요. 마마의 황자와 공주 전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말도 마.”
굳이 비교를 하자니 백천범은 한숨이 절로 났다. 특히 묵용청양은 사흘에 두 번꼴로 그녀의 성미를 돋우고 있었다. 그녀처럼 성격 좋은 사람마저도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녀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
“청양이랑 성아를 불렀는데 어찌 한 명도 오지 않는 거야?”
월규가 답했다.
“성 전하께서는 환복 후에 오신다 하였고 청양 공주께선 출궁을 하셨는데… 곧 오실 겁니다.”
백천범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손님이 온다 했건만 어째서 출궁을 한 거야?”
“영 대인 댁에서 영안을 데려와 함께 손님을 맞을 거라 하셨습니다.”
백천범은 웃으며 사앵앵에게 말했다.
“우리 딸이 영 대인의 아들과 워낙 친해서 늘 함께 놀거든. 좋은 일만 생기면 영안부터 떠올린다니까. 청매죽마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셈이지.”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던 시종들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영 대인 댁 공자는 청양 공주가 사사건건 자신을 찾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을 텐데.
이야기를 나누는데 성 황자가 들어왔다. 머리에 자색 빛 금관을 쓰고 금테를 두른 월백색 장포를 입은 황자는 우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한눈에 봐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 모습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곧장 백천범에게 예를 갖춘 뒤, 사봉봉의 얼굴을 훑더니 슬며시 시선을 거두었다.
“이분이 사씨 누이인가요?”
그림 같은 외모에서는 은은한 기개가 느껴졌다. 어린 나이에도 이미 육왕야의 진수를 물려받은 것 같았다. 어여쁜 여인을 앞에 둔 그의 행실은 여느 때보다 부드럽고 다정했다.
“전하를 뵈옵니다.”
사봉봉이 살짝 무릎을 굽혔다 펴며 예를 갖췄다.
“예를 갖출 것 없어.”
성 황자가 웃으며 말했다.
“모후께서 누이와 친구로 지내라고 하셨는걸.”
그가 백천범에게 말했다.
“예전에 누이를 본 적 있어요.”
백천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봉봉이는 오늘 처음 입궁했는데 어디에서 보았다는 것이야?”
성 황자가 뒷짐을 지더니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고민에 잠겼다.
“아마도 꿈에서 본 것 같아요.”
“…….”
“…….”
“…….”
사앵앵과 두 아이는 말문이 막혔고, 백천범은 민망함을 느꼈다. 여인에게 너무 다정한 것도 육왕야에게서 배운 것일 터.
“흠흠.”
그녀는 상황을 수습하고자 사금언을 가리켰다.
“이리 와서 금언이도 보렴. 성아보다 어린 아우야.”
성 황자가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위로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사 아우, 안녕.”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사봉봉을 바라보았다.
“누이의 이름은 참 재미있네. 한자가 뭐야?”
사봉봉이 공손히 말했다.
“시경詩經에 나온 말이에요. ‘내가 지나온 저 들판에 보리가 무성하네’에서 무성하다는 의미로 쓰인 봉봉芃芃입니다. 전 어머니 성을 따랐고, 어머니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에요.”
성 황자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 봉봉이구나. 부인께서는 정말 고상한 정취를 가진 분이시군요. 누이에게 이렇게 예쁜 이름을 지어 주시는 걸 보니까요.”
어린 황자의 칭찬에 사앵앵은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정취는 잘 모르지만 풍성하다는 의미가 좋아서 지어 주었습니다. 상인에겐 다다익선보다 좋은 건 없거든요.”
성 황자가 다시 백천범을 보았다.
“어머니, 봉봉 누이는 어째서 부인의 성을 따르는 거예요? 저도 어머니의 성을 따를래요. 백씨가 더 좋아요.”
백천범은 대번에 안색을 굳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넌 묵용씨의 혈통이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성씨인데 어머니의 성을 따르겠다니. 부황 앞에서는 절대 그런 말을 해선 안 돼. 네 뺨을 내리치실지도 모를 일이니까.”
성 황자는 조금 분했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은 성 황자가 또다시 같은 이야기를 꺼낼까 봐 서둘러 그를 내보냈다.
“어머니는 부인과 얘기를 좀 해야겠으니 누나와 아우를 데리고 나가서 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