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1화
묵용청양을 깨운 뒤, 백천범은 성 황자의 무덕궁으로 향했다. 이곳은 요대궁과 달리 곳곳에 궁인들이 넘쳐났고 그녀를 보자마자 다들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백천범이 손을 내저었다.
“성아는 일어났어?”
“마마께 아룁니다. 황자 전하께서는 이미 일어나셨습니다. 소인들이 막 세안과 환복 시중을 들고 있었사옵니다.”
백천범은 짤막하게 대꾸한 뒤 아들을 보러 갔다. 남자다운 어감이 강한 무덕궁은 사실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곳곳에 각양각색의 발과 장막, 얇은 비단이 휘감겨 있었는데 대부분 하얀색이 주를 이루었다. 이따금 보이는 청색이나 자색빛은 여인의 규방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여기에 향을 피우고 깔끔한 장식품까지 진열되어 있으니, 묵용성의 섬세함이 돋보였다.
묵용성은 마침 장미 향이 나는 물로 입을 헹구고 있었다. 은백색 장포가 새벽바람에 가볍게 살랑이고, 그림 같은 얼굴이 더해지니 어린 나이지만 덕과 재주를 겸비한 인재의 기개가 물씬 풍겼다. 백천범을 발견한 황자는 곧장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머니.”
백천범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구나. 오늘은 손님이 오시니까 어디 가지 말고 있으렴. 함께 맞이해야 해.”
황자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어떤 손님인데요?”
“어머니의 친구인데 그들 부부에게도 아이가 둘이 있어. 하나는 누나, 하나는 남동생이니까 같이 친구로 지내렴. 어때, 좋지?”
성 황자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또 누나와 남동생이란 말이에요. 여동생은 없어요?”
“가 대인네 집에 여동생이 있잖니?”
성 황자는 입을 삐죽거렸다.
“걘 안 예뻐요.”
백천범이 아이에게 꿀밤을 주었다.
“그렇게 어린아이를 두고 어찌 예쁘다 안 예쁘다 단정 지을 수 있겠어. 귀여우면 그만이지. 소타가 얼마나 귀여운데, 안 그래?”
그 말에 성 황자는 기억을 곰곰이 되짚었다.
“전병처럼 큰 얼굴에 눈은 자그마하니 제법 귀엽긴 하죠.”
* * *
영안은 활을 과녁에 조준했다. 막 활시위를 당기려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가 그를 맞췄다. 손에 힘이 풀린 순간, 화살은 시위를 떠났지만 과녁에서 빗나갔다. 화가 난 그는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묵용청양, 나가!”
풀숲에 숨은 청양 공주는 입을 가린 채 키득거렸다. 영안이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면 털을 세우는 고양이 같아,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옆에 있던 하인이 말했다.
“도련님, 공주께선 오늘 오지 않으셨습니다.”
영안이 코웃음을 쳤다.
“왔어. 냄새가 난단 말이야.”
청양 공주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개도 아니고 이렇게 멀리 있는데 어찌 자신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단 말인가?
“도련님, 청양 공주께서는 정말 오지 않으셨습니다. 잘못 아신 걸 겁니다.”
“아니래도.”
영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고약한 냄새가 나는데 내가 어찌 잘못 맡았겠어?”
그 말에 청양 공주는 벌컥 성을 내며 풀숲을 뛰쳐나왔다. 그리곤 곧장 팔을 영안에게 뻗었다.
“어디 맡아 봐. 어디가 고약하다는 거야. 내가 얼마나 좋은 향을 피우는데! 어디서 막말을 하고 있어. 부황께 일러서 네게 벌을 내리라고 할 거야.”
영안은 일부러 약을 올려서 그녀가 제 발로 뛰어나오게 만들었다. 그 역시 예를 갖추지 않고 반대쪽 손으로 청양 공주의 팔을 꺾었다. 그러나 청양 공주의 반응도 재빨랐다. 팔이 뒤로 꺾이면서도 영안의 무릎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영안은 팔을 뻗어 공주의 허리를 붙잡고 내동댕이친 뒤 그녀를 힘껏 눌렀다.
철푸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진 데다 영안이 있는 힘껏 자신을 짓누르자 묵용청양은 절로 아야 소리가 나왔다. 옆에서 지켜보던 하인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하인이 서둘러 싸움을 말렸다.
“도련님, 그만하십시오. 금지옥엽인 공주 전하를 어찌 그리 깔아뭉개십니까. 주인 어르신께서 아시면 채찍으로 때리실 겁니다.”
영안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묵용청양이 성가셔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그저 조용히 활쏘기 연습을 하고, 훗날 아버지처럼 황상 곁을 지키는 시위가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피나는 노력이 필수이건만! 영안과 상극인 청양 공주는 시간만 나면 그를 괴롭혔다. 그 덕분에 연습은커녕 매를 맞거나 오랫동안 벽을 보고 벌을 받아야 했다. 그에게 그녀는 재앙에 가까웠다. 묵용청양은 그에게 짓눌려 꼼짝도 할 수 없으니 힘껏 소리쳤다.
“영 대인!”
깜짝 놀란 영안은 펄쩍 뛰어올랐다. 제대로 서지도 못했는데 누군가 그의 엉덩이를 힘껏 발로 찼다. 고개를 돌려보니 청양 공주가 그를 찬 발을 들어 올린 채 기세등등하게 웃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영안은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청양 공주가 또다시 소리 쳤다.
“영 대인!”
그녀의 표정과 말투는 정말 영안의 아버지가 뒤에 와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아버지가 조금 무서웠던 영안은 몸을 돌려 뒤를 확인했다. 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때… 그는 엉덩이를 또다시 걷어차였다. 잔뜩 화가 난 영안이 소리쳤다.
“묵용청양, 왜 이렇게 발로 차는 거야, 네가 당나귀 띠야?”
청양 공주는 가만히 누운 채 발을 들어 올리며 시시덕거렸다.
“무슨 띠든 상관없어. 널 찰 수 있기만 하면 되거든.”
“…….”
이런 못된 것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 집엔 왜 또 온 건데? 그렇게 큰 궁에서 행패 부리는 걸로도 부족해?”
청양 공주는 풀을 한 가닥 뽑아 입에 물더니 다리를 꼬았다. 정말 꼬마 산적 같은 모습이었다.
“큰 게 무슨 소용이겠어. 재미가 없는데. 그리고 기홍 고고의 간식이 먹고 싶어서 말이야.”
영안은 가슴이 저릿했다. 세상에 간식을 싫어하는 아이가 어디 있을까? 그도 자신의 어머니가 해 주는 간식을 좋아했다. 한데 이 못된 것은 오기만 하면 온갖 핑계를 대며 자신의 간식을 다 빼앗아 갔다. 간식을 목전에서 뺏겼던 그간의 설움이 울컥 솟아올랐다.
“아이고, 세상에.”
그때, 기홍이 치맛자락을 붙잡고 달려와 청양 공주를 일으켰다.
“어찌 바닥에 누워 계십니까? 이것 보세요. 또 더러워지지 않았습니까? 궁에 돌아가면 마마께 혼이 나겠습니다.”
어느새 영구도 다가와 아들에게 눈을 부릅떴다.
“네가 공주 전하를 넘어뜨린 것이냐?”
영안은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당당하게 말했다.
“공주가 먼저 절 때렸어요.”
“공주 전하는 주인이고 넌 노비다. 한데 때리는 것도 안 된단 말이냐?”
화가 난 영구는 아이의 머리에 꿀밤을 주었다.
“감히 윗사람에게 반항하는 것이냐?”
영안은 눈을 희번덕였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청양 공주보다 뛰어났지만, 그녀의 배경만큼은 넘어서지 못했다. 그 못된 것의 뒷배는 너무 강력하면서도 많았다. 영안의 어머니와 아버지마저도 그녀의 든든한 뒷배였다. 어딜 가든 전부 다 저것만 감싸는데 자신이 어찌 견줄 수 있겠는가?
“조상님들 위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반성하거라!”
영안은 몰래 청양 공주를 노려본 뒤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잠깐.”
청양 공주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 대인, 오늘은 모후의 명을 받고 온 것이에요. 영안을 궁으로 데려오래요.”
순간 영안의 마음에 한 줄기 햇살이 비쳤다. 공주가 못되긴 했어도 양심은 있는 듯했다. 그러나 공주의 말은 더 이어졌다.
“반성은 궁에서 돌아온 뒤에 시키세요.”
“…….”
양심은 개뿔. 영안이 이를 박박 갈았다. 영구가 청양 공주에게 물었다.
“마마께서 영안을 무슨 일로 궁에 부르시는지요?”
“오늘 손님이 오시는데 언니와 아우도 온대요. 그래서 다 같이 만나게 해 주신대요.”
영구는 곧장 황후의 뜻을 이해했다. 그 역시 사장풍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입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후가 아이들을 소개해 서로 친구로 지내게 해 주려는 거겠지. 그가 즉시 아들에게 분부했다.
“공주 전하를 따라 입궁하거라. 궁에서는 규율을 잘 지켜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아버지.”
영안은 사실 궁이 싫었다. 지켜야 할 규율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가령 누구를 만나기만 하면 곧장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래도 조상님들 위패 앞에서 무릎을 꿇는 건 더 싫었기 때문에 청양을 따라 입궁하는 걸 선택했다.
마차는 탈탈거리며 석판이 깔린 길 위를 나아갔다. 청양 공주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기홍이 가는 길에 먹으라며 싸 준 간식이었다.
영안과 함께 먹으라고 싸 준 것이었지만 청양은 자신에게만 싸 준 것이라고 여겨 영안 앞에서 혼자 먹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영안의 코를 자극하니 절로 손이 근질거렸다.
빼앗아 먹으려면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녀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눈을 몇 차례 굴린 영안은 슬쩍 손목을 움직이며 간식을 재빨리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곁눈으로 묵용청양이 혀를 날름거리며 남은 간식에 일일이 침을 묻히는 게 보였다. 이 못된 것은…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너도 먹고 싶어?”
묵용청양은 간식을 그에게 들이밀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흥, 누가 못 봤을 줄 알고? 감히 간식을 빼앗으려 하다니, 꿈도 야무지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영안은 고개를 홱 꺾고 발을 걷어 밖을 구경했다. 그녀를 상대하는 것도 귀찮았다.
청양 공주는 오만방자하게 웃어 댔다. 영안을 화나게 하는 건 정말 일생일대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영안이 익숙한 거리를 알아차리고 흠칫 놀랐다.
“궁에 간다며 왜 이리로 온 거야?”
청양 공주가 코웃음을 쳤다.
“모처럼 나왔으니 실컷 놀다 들어가야지.”
영안은 입을 삐죽거렸다. 귀신보다 무서운 공주가 출궁을 하여 제멋대로 군다 한들 누가 감히 그녀를 막겠는가? 그녀가 궁 문을 드나드는 빈도에 조정 신하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가 숙부 댁에 가려고?”
“응, 가서 소타를 가지고 놀자.”
영안은 또 한 차례 입을 삐죽거렸다. 소타가 장난감도 아닌데 뭘 가지고 논단 말인가? 하지만 청양 공주는 돌이 조금 넘은 가소타를 정말 장난감처럼 여겼다. 가동의 집에 오자, 공주는 아이를 품에 안고 토닥이며 잠을 재우려 했다. 그녀가 영안을 바라보았다.
“우리 놀이하자. 내가 소타의 어머니, 네가 아버지를 하는 거야.”
영안은 뚱한 표정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역할을 하는 건 상관없지만 청양 공주가 부인이 되는 건 싫었다. 아무리 놀이라 해도 안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