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0화
아니나 다를까 계산대로 가자마자 해고된 점원들의 원망이 쏟아졌다.
“이봐, 나삼! 우리가 그간 너한테 어찌 대해 주었는가? 우리를 손가락만 빨게 만들 셈이야?”
“평소엔 그리 굼뜨더니 다 가짜였구만. 주인마님 따님이 오시니까 그리 잽싸게 움직이고 말이야.”
“그렇게 잘 보이고 싶었어? 네가 그렇게 눈에 띄는 행동을 하니 우리가 다 멍청해 보이는 거 아냐?”
“하, 어디 두고 보자고. 원 관리인도 못 하는 걸 쟤가 할까 봐? 이 여의루가 쟤 손에 망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일찍 나가는 게 더 나아. 안 나가더라도 조만간 곧 망할 테니까!”
나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함께 일한 시간이 얼마인데,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도 훤히 꿰고 있었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주인마님께 사정해 볼까 잠시 고민도 했지만, 게을리 일하는 데 익숙해진 그들은 머지않아 또 해고될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헛고생만 하는 것이니 차라리 지금 떠나보내는 게 더 나았다.
해고된 점원들 역시 불평은 했지만 열다섯 냥을 얹어 받으니 좋아했다. 점원을 해고하며 이리 인심을 쓰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들이 돈을 주머니에 하나하나 담고 있을 때, 지켜보던 사앵앵이 웃으며 말했다.
“돈을 담기 전까진 모두에게 기회가 있었네. 진심으로 이곳에 남고 싶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나 보군. 만약 있었다면 내게 사정하고 애원했을 터인데. 그랬다면 다시 의논해 볼 수도 있는 일이지.
안타깝게도 투정만 부리고 빈정대느라 희망의 끈을 다 놓아 버리다니. 다들 내가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하게. 자네들이 놓친 건 일이 아니라 기회였다는 것을.”
다들 그제야 사앵앵의 의도를 깨닫고 머리를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사앵앵은 그들을 시시각각 관찰하고 있던 것이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일자리를 잃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다들 화만 낼 뿐 주인마님께 사정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삼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더구나 갸냘픈 여인이 저리 말하다니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다만 계산을 다 마치고 나자 조금 의아한 점이 생겼다. 그가 사앵앵에게 물었다.
“주인마님, 부엌의 일꾼들까지 전부 다 내보내면 일할 사람이 없는데 가게를 어찌 운영합니까?”
사앵앵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금처럼 부엌부터 종업원까지 쓸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장사를 할수록 적자일세. 차라리 가게 문을 닫고 계획을 잘 세운 다음 다시 여는 게 낫네.”
나삼은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주인마님, 그럼 전 무얼 해야 할까요?”
“도성을 잘 아는가?”
“그럼요. 전 임안 토박이인걸요.”
“잘됐군.”
사앵앵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필요 없고 내일부터 나와 함께 온 성의 산해진미를 맛보면 되네.”
“…….”
* * *
황제는 묘시에 잠에서 깼다. 천천히 눈을 뜨니 품 안에서 단잠을 자는 여인이 보였다. 그녀의 옅은 숨에서 달큰한 향이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옅은 숨결을 삼켰다. 벌써 세 아이의 어머니였지만 여전히 새하얀 피부에 고운 얼굴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그만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자마자 백천범은 본능적으로 꿈틀거리며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그리며 그녀를 안고 잠시 더 누워 있었다. 이윽고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학평관이 그를 깨우러 오는 것이겠지.
근면 성실한 황제인 묵용감은 매일 황후와 사랑을 속삭인다 한들 조정에 늦는 법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팔을 슬쩍 빼냈지만 결국 백천범을 깨우고 말았다. 그녀는 비몽사몽한 채 반쯤 눈을 뜨고 물었다.
“몇 시진이에요?”
“아직 이르오.”
황제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등을 토닥였다.
“어서 조금 더 자오.”
“아니에요.”
백천범은 눈을 비비며 머리카락을 움켜쥐더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저도 일어날래요.”
황제가 그녀를 다시 눕히며 말했다.
“이리 일찍 일어나 무얼 한단 말이오?”
“오늘 사장풍과 앵앵이가 입궁한다면서요.”
오랜 친구가 찾아오는 날이 아닌가. 백천범의 눈이 절로 반짝였다.
“빨리 보고 싶어요.”
황제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사장풍이든 사앵앵이든 그들에게 아직 마음의 응어리를 품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 모두 그의 연적이 아니던가. 당시 둘 다 백천범을 죽자 살자 쫓아다녔으니.
백천범을 넘봤던 사람이라면 누가 됐든 다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백장간도 구실을 찾아 도성 밖으로 내보냈다. 이해타산이 맞지 않았다면 사장풍 부부도 불러들이지 않았을 터……. 되었다, 대국이 더 중요하니 자신이 좀 참고 말지.
“입궁하려면 아직 멀었으니 좀 더 자시오.”
할 일도 없는데 이렇게 일찍 일어났다간 옛 추억을 되새길 게 분명했다. 그는 이렇게나 옹졸한 사람이었다. 추억일지언정 그녀의 머릿속에 다른 사람이 떠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뭐 하는 거예요.”
백천범은 눕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다.
“이미 다 깼는데 뭐 하러 더 자요!”
두 사람이 침대에서 엎치락뒤치락하자 시중을 들려고 장막 앞에 모여 있던 내관과 궁녀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들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학평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야 예전 그대로였지만 황제는 날이 갈수록 더 점잖지 못했다. 어린나이도 아닌데 어찌 기침마저 이리 요란하단 말인가.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배우는 태자가 이 소식을 접하면 무어라 생각하겠는가?
황후와 한바탕 뒤엉키던 황제는 결국 딴마음을 품고 방자하게 손을 놀렸다. 백천범이 그의 손을 힘껏 내리쳤다.
“황상, 이러다 늦겠어요.”
그 틈을 타 학평관이 헛기침을 했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접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녁에 꼭 갚아 줄 것이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기침했다. 황제는 먼저 부인에게 옷을 입혀 준 뒤, 자신은 내관과 궁녀들의 시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황제가 옷을 입을 때, 월규는 황후의 머리를 빗겨 줄 빗과 장신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황제가 월규에게 말했다.
“오늘은 짐이 직접 황후의 머리를 빗겨 줄 것이다.”
백천범이 웃으며 물었다.
“황상, 오늘은 어떤 모양으로 빗겨 주시려고요? 양쪽으로 동그랗게 말아 올리는 머리는 안 돼요. 앵앵이가 보면 비웃을 거라고요.”
황제는 이제 몇 가지 머리 모양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양쪽으로 둥글게 말아 올리는 머리였다. 다만 일국의 황후가 그런 머리를 하는 건 말이 안 되었기 때문에 종종 단둘이 장난을 칠 때나 빗겨 주곤 했다. 평소에는 주로 머리를 비스듬히 틀어 올리는 머리를 해 주었다. 여기에 화려한 장신구까지 꽂으면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는 다정스레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잔머리를 쓸어내렸다. 세심한 손길로 장신구를 꽂아준 그가 거울을 힐끗 바라보았다. 거울 속 백천범은 맨얼굴이었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이 세상에 당신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없을 것이오.”
백천범이 얼굴을 붉히며 그를 밀어냈다.
“됐어요. 어서 일 보세요. 이러다 늦겠어요.”
옆에 있던 시종들은 느긋하게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황후를 향한 황제의 두터운 애정은 천하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으니, 너무나 익숙해진 광경이었다. 마침 월규가 황후에게 연지를 찍어 주려는데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화장할 것 없다.”
백천범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요?”
황제가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맨얼굴이 더 아름답소.”
그가 예쁘다고 하니 백천범도 굳이 화장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치장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녀였기에 곧장 월규를 물렸다.
“황상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오늘은 화장 안 할래.”
함께 아침밥을 먹은 후 한 사람은 급히 조정으로 가고 다른 한 사람은 여유롭게 아이들을 돌보았다. 이제 세 아이 모두 각자의 궁전을 가지고 있었다. 태자는 장영궁長英宮, 즉 동궁에서 지냈고 청양 공주는 황제가 직접 이름을 지어 준 요대궁瑶臺宮에서 묵었다. 요대란 신선이 사는 곳을 일컫었는데, 청양 공주를 향한 황제의 사랑이 짙게 묻어났다. 백천범은 요대궁을 떠올릴 때마다 미소를 짓곤 했다. 신선이라니… 묵용청양은 귀신보다 더 무서운 아이라고 불리는데 말이다.
성 황자의 궁은 청양의 요대궁 옆에 붙어 있었다. 본래는 남녀유별이라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했지만 황제는 쌍둥이인 두 아이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거처를 가까이 붙여 주었다.
성 황자의 궁에도 ‘무덕궁武德宮’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성 황자는 남자다운 기질이 부족하고 늠름함이 느껴지지 않으니, 궁전에서라도 그런 느낌이 나도록 고려한 것이다. 정작 성 황자는 거처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천범을 찾아가 코가 헐도록 울기도 했지만 황명을 어찌 거스를까. 결국 성 황자는 무덕궁의 주인이 되었다.
이미 훌쩍 커 버린 태자는 자기 관리 능력이 특출났다. 근면함은 황제보다 훌륭한 수준이었고 무슨 일을 하든 걱정할 필요가 없이 든든했다. 지금은 상서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리라.
그녀는 먼저 청양 공주를 보러갔다. 그러나 요대궁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녀는 의아함에 사로잡혔다. 청양 공주 곁엔 시종도 적지 않은데 어찌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곧장 침전으로 향하니 그곳도 텅 비어 있었다. 백천범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창문에 걸린 은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방울이 달린 줄 끝은 침대 기둥에 연결되어 있었다. 백천범은 줄을 당겨 보았다. 맑고 청아한 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다.
이렇게 큰 인기척을 냈는데도 침대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장막을 걷고 들어간 백천범은 이불 위에 대자로 뻗어 자는 묵용청양을 마주했다. 백천범이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공주를 너무 아낀 황제는 그녀에게 황궁의 규율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 덕에 청양의 성격은 날이 갈수록 사나워졌다. 아무래도 시종들이 청양을 직접 깨우기가 무서워 방울을 달아 놓은 거겠지.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서 방울을 흔들어 깨우는 모양이었다.
이런 묵용청양도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다. 백천범이 손을 뻗어 그녀를 찰싹 때렸다.
“청양아, 어서 일어나야지.”
청양 공주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백천범은 공주의 몸을 뒤집었다. 발그스레한 공주의 얼굴엔 담요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고개까지 옆으로 축 늘어뜨린 게 꼭 얼룩 고양이 같았다.
백천범은 결국 공주를 들어 올렸다. 공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안고 있던 손을 놓으니 공주는 곧장 고꾸라지더니 엎드린 채 잠을 청했다. 백천범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
“청양아, 일어나. 오늘은 손님이 오니까 너도 손님을 맞아야 해.”
청양 공주는 손님 접대를 좋아했다. 궁에서 만나는 이들은 늘 뻔했기에, 그녀는 새로운 사람이라면 늘 기쁘게 맞이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청양 공주의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늘어졌다. 머리카락을 한 움큼 집어 올리니 반쯤 뜬 눈이 보였다. 공주가 부정확한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어머니… 누가 오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