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8화
사장풍은 도성에 복귀해야 했기에 오수진에서 그리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며칠 뒤, 그는 처자식과 다시 길을 나섰다
아쉬운 마음을 달랠 길 없던 사성성은 딸과 사위를 따라 수성의 남문을 지나 북문을 관통할 때까지 함께했다. 교외에 다다라서야 그는 눈물을 쏟으며 딸 내외와 손주를 배웅했다. 함께 도성에 갈 수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까웠다. 돈을 그리 많이 벌면 무엇 하겠는가. 곁에 가족 하나 없이 지내야 하는 것을.
돈이란 그저 금빛과 은빛을 띠는 물건에 불과했다. 금자와 은자를 끼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성성도 포부가 남다른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고 손주까지 보고 나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여려졌다. 하지만 딸의 야심은 대단했다. 그녀가 호기롭게 말했다.
“아버지, 이번에 도성에 가면 제대로 해 볼게요. 우리 사씨 가문의 간판을 도성까지 올리는 거예요. 그럼 아버지는 강남에서, 저는 북쪽에서 서로 장사를 이어가는 거죠. 제가 아버지를 이 나라 최고의 부자로 만들어 드릴게요.”
사앵앵의 호기로운 말에 곧장 기운을 차린 그는 눈물을 닦으며 멈춰 서서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천 리 길을 배웅해도 결국엔 이별하는 순간이 오는 법. 앵앵아, 우리 이 나라 최고의 부자가 되는 날 다시 만나자꾸나.”
“…….”
사봉봉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어머니, 할아버지의 의지가 어머니보다 더 굳세신걸요!”
사앵앵이 사성성에게 말했다.
“아버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세요. 도성에 정착하면 얼마든 서로 왕래할 수 있는걸요. 볼 기회는 아주 많다고요.”
사성성은 그제야 도성은 서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도성은 서북보다 훨씬 더 다니기 수월했다. 수성에서 북으로 올라가든 도성에서 남으로 내려오든, 강을 따라 배편으로 가든 육지로 가든 다양한 방법으로 편히 오갈 수 있었다. 앞으로 서로 볼 수 있는 기회는 차고 넘쳤다. 이렇게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 그였다.
“그래, 도성에 정착하거든 내게도 방 하나 마련해 주렴. 나중에 도성에 올라가면 묵을 수 있도록 말이다.”
사앵앵이 호탕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아버지! 아주 큰 저택을 샀으니 몇 칸이든 마음껏 쓰세요.”
사성성이 말했다.
“나 혼자 쓰는데 그리 많은 방을 써서 무엇 한단 말이냐?”
“제가 말씀드렸죠. 외롭게 지내지 말고 첩을 맞으시라고요. 나중에 제게 남동생 하나 낳아 주세요. 아들딸 하나씩 두시면 얼마나 좋아요.”
사성성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세상 어느 집 딸이 손주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낯짝을 어디에 두라고?
사장풍은 점점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계속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다간 오늘 떠나지 못할 터였다. 그는 헛기침으로 사앵앵에게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사금언이 옆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야 알겠네요.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닮아서 꾸물대는 거였어요.”
사봉봉도 거들었다.
“할아버지 딸인데 어떻게 안 닮겠어.”
이 순간에도 부녀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사장풍의 암시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앵앵, 지금 떠나지 않으면 다음 마을에 늦게 도착해서 요기도 하지 못할 것이오.”
사성성이 황급히 말했다.
“그래, 어서 가야지.”
그는 이내 목청을 높여 사장풍에게 소리쳤다.
“장군, 내 딸과 손주들을 장군에게 맡기니 가는 동안 부디 고생하지 않게 잘 돌봐 주시게.”
사장풍이 대꾸하려는데 사앵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이 사람은 전투 말고 아무것도 몰라요. 제가 잘 돌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성성이 곧장 답했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 넌 큰일을 할 사람이니까. 그럼 장군과 두 아이를 잘 부탁하마. 가는 동안 세심히 살펴 주고 무탈히 당도하거라.”
“…….”
사장풍은 또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식구들은 마침내 길을 나섰다. 서북에서 출발할 땐 사람도, 말도, 짐도 많았기에 속도가 몹시 느렸었다. 말에 실어 온 커다란 나무 상자들은 모두 사앵앵이 사성성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오수진에 짐을 다 내린 지금은 짐이 간소해졌고, 임시로 고용했던 일꾼들도 임금을 받아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더욱이 사장풍은 이제 막 복직한 탓에 수하에 졸병 하나 없는 나 홀로 장군이었다. 이제 수성에서 도성까지는 그들 네 식구와 일손을 돕는 중년 부인, 어린 여종, 하인 둘과 비교적 단출하게 가야 했다.
류씨라고 불리는 중년 부인은 사실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이제 곧 마흔인 젊은 부인인데 팔자가 어찌나 사나운지,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열 살 나이의 외아들마저 연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 연이은 사고에 이웃들은 그녀를 불길한 사람이라 여기며 마을에서 쫓아냈고 결국 역참에서 부엌일을 도우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사앵앵은 손맛 좋은 류씨 부인의 음식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동작도 재빠르고 말도 많지 않은데다 성격도 좋은 덕에 식모로 삼아 곁에 남겼다. 혈혈단신인 그녀는 갈 곳이 없었기에 주인 어르신과 부인이 도성에 간다는 말에 자연스레 함께 따라나섰다.
여종의 이름은 금천아金釧兒였다. 이름은 예뻤지만 외모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서북의 여인들은 대체로 키가 크고 건장한 데다 성격도 사나운 편이었다. 가장 큰 특징은 힘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거칠고 힘든 일도 거뜬히 해냈다. 누군가 겁도 없이 천아를 희롱한다면 휙 하고 들어 엎어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세상에 두려운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오직 부인의 명령만 묵묵히 따랐다.
그녀는 서북 지역 토박이였는데 부모님과 형제자매까지 대식구가 함께 살았다. 가족들은 그녀가 타향으로 떠나는 걸 안타까워하며 말렸지만, 그녀는 주인 내외를 따라 세상 구경을 할 거라며 고집을 피웠다. 가족들이 말릴 때마다 그녀는 지붕을 다 뜯어낼 만큼 떼를 쓰며 소란을 피웠다.
두 하인은 주자柱子와 아하阿夏였다. 주자는 이름처럼 튼실한 기둥 같은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각진 얼굴에 짙은 눈썹, 거무죽죽한 피부를 가진 그는 고지식한 성격을 지녔다. 아하는 원숭이처럼 말랐는데 서북 사람은 아니었다. 본관이 어디인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좁고 긴 홑꺼풀 눈을 가진 그는 서북에서 보기 드문 하얀 피부를 가진 덕에 제법 말쑥해 보였다.
어른 여섯 명과 아이 두 명이 탄 마차 두 대는 도성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늘 미리 움직이는 사앵앵은 임명장이 도착하기도 전에 사람을 써 도성에 집과 가게를 사 두었다. 올라가기만 하면 곧장 어마어마하게 큰 저택에서 묵을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을 도와준 사람은 사앵앵의 친구 원천림袁天林이었다. 원래는 한 상대商隊의 부두목이었는데, 그녀의 역참 단골손님이라 몇 차례 왕래하다 보니 제법 가까워졌다. 원천림은 호탕한 성격에 의리도 있었다.
원래 도성 사람이었던 그는 부모님이 연로해지시자 더는 멀리 다니지 않고 도성에만 머물렀다. 때마침 사앵앵이 도성에서 집과 가게를 사려 한다는 걸 알게 된 그는 곧장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가게는 다름 아닌 주루였다. 장사를 하기 위해선 익숙한 주루부터 시작하는 게 가장 수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취선루를 운영하고 자신도 역참을 운영한 경험이 있으니 경력만큼은 누구보다 화려했다.
게다가 주루를 운영하면 장점이 많았다. 문을 활짝 열고 전국 방방곡곡의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은가. 사앵앵은 다른 이들을 사귀는 게 좋았다. 첫 만남은 낯설어도 두 번째 만남에서는 친해지고, 세 번째 만남 땐 오랜 친구처럼 친근해졌다. 옛 속담에도 외지에 나가면 친구에게 의지해야 하고 친구가 많으면 일을 처리하기 좋다고 하지 않던가.
두뇌회전이 빠른 그녀는 시원시원한 성격 덕에 서북 일대 장사꾼 사이에서 제법 알려져 있었다. 그녀에게 도성은 번화한 곳이자 그녀가 늘 동경해 마지않던 세상이었다. 도성으로 떠나는 그녀의 마음에는 굳건한 결심이 자리 잡았다. 아버지와 가문을 빛내기 위해 제대로 해 볼 작정이었다.
* * *
여의루如意樓는 금성대로에 있었다. 금성대로는 임안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로, 주루와 객잔,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다만 다른 가게들과 비교하자면 여의루는 장사가 그리 잘 되는 편은 아니었다.
원천림은 상대에 있던 사람이기 때문에 가게를 운영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다. 다행히 사앵앵도 그리 큰 요구를 하지 않았기에 돈을 얼마나 버는지는 상관없었고, 그저 근근이 장사가 이어지기만 하면 되었다.
이날 저녁도 주루는 손님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점원들은 궤짝에 기댄 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어린 여자아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얼핏 보기엔 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예쁘장한 얼굴에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린 아이는 살구빛 치마를 하늘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 점원이 말했다.
“엥, 갑자기 웬 아이가. 얘야,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구나.”
어린아이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왔는데 응대하는 이가 한 명도 없다니! 대체 이게 무슨 꼴이오?”
점원들은 어린 나이와 달리 노숙한 말투에 절로 웃음이 났다.
“꼬마 아가씨, 아가씨가 손님이라면 은자는 있소이까?”
“당연히 있지.”
아이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허리춤의 돈주머니를 탁탁 쳤다.
“하지만 먼저 돈이 있는지부터 묻고 밥을 차려 오는 경우는 없소. 이건 손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오!”
아이가 얼굴을 굳히고 날 선 말을 늘어놓으니 점원들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 점원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가, 나가. 어서 집에 돌아가. 애가 사라졌으니 부모님이 얼마나 찾으시겠어.”
“난 밥을 먹으러 왔소.”
아이는 당당히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종업원, 우선 따뜻한 차부터 내주시오.”
다들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삐쩍 마른 한 점원만큼은 예외였다.
“예, 소인이 금방 차를 내어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이가 방금 대꾸한 점원에게 물었다.
“관리인은?”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계실 겁니다.”
“식사 시간이 다 되었는데 어찌 주루를 돌보지 않는단 말이오?”
점원이 양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보십시오. 관리인이 신경 쓸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이가 재차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오?”
점원이 찻주전자를 가져와 아이에게 한 잔 따라주었다.
“소인이 집에서 셋째인데 부모님이 글을 모르시어 그냥 나삼羅三이라고 부르십니다.”
아이는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들이켜더니 제법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네. 오늘부터 나삼 자네가 이 가게의 관리인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