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7화
두 살이 된 가소타는 아버지와 함께 무술 연습을 즐겼다. 가 대인이 무술을 연마할 때마다 그의 동작을 흉내 내곤 했다. 동작이 조금 어설프긴 했지만, 제법 기개가 넘치고 눈빛도 날카로웠다. 자그마한 입으로 기합을 넣으며 혼자 요란하게 따라 하기까지 하니, 가 대인은 가소타의 기세에 휘말려 그녀와 함께 소리를 질러 댔다. 덕분에 옆에서 지켜보던 하인과 시녀들은 얼굴이 퍼렇게 질릴 때까지 웃곤 했다.
녹하는 가소타가 무술을 배우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가소타만큼은 자유분방하게 키우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가동은 아이가 힘들까 봐 소타에게 애걸복걸했다.
“소타야, 무술은 정말 힘들어. 네 오라비도 그 고생을 견디지 못했어. 무술은 배우지 말고 나중에 어머니한테서 자수를 배우자.”
가소타는 힘차게 고개를 저으며 고집을 부렸다.
“싫어요. 배울 거예요. 아버지처럼 시위 대인이 돼서 황상을 지킬 거예요.”
가동이 말했다.
“여인이 어찌 시위를 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게다가 황상 눈에 들면 후궁으로 가야 할 거야.”
계단에 서 있던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애한테 그런 말은 해서 뭐 해?”
가소타가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 후궁은 뭐 하는 데예요?”
가동이 중얼거렸다.
“후궁도 사람이 사는 곳이지.”
“어떤 사람이 사는데요?”
“예쁜 여인들.”
그러자 가소타의 목소리가 슬픔으로 젖어들었다.
“그럼 전 안 갈래요. 어머니가 그랬는데 전 얼굴이 크대요.”
“…….”
가소타가 세 살이 되고, 가동은 제대로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물론 시작은 기마자세였다. 가 대인은 여전히 옛 방법을 고수했는데 마침 가소타는 제법 쉽게 기마자세를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딸을 애지중지 아끼는 가 대인은 햇빛만 비췄다 하면 곧장 아이를 안고 그늘로 옮겼다. 해가 기우는 대로 아이를 이리저리 옮긴 탓에 가소타는 조금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결국 아이에게서 불평이 터져나왔다.
“아버지, 귀찮게 좀 하지 마세요. 제가 보따리도 아니고 왜 자꾸 이리저리 옮기는 거예요?”
딸의 원망에도 가 대인은 개의치 않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소타 네가 까매질까 봐 그렇지. 얼굴이 하야면 다른 단점들이 다 가려지는 법이야. 얼굴이 큰 것도 상관없어진다고. 조금만 더 하야면 훗날 널 원하는 사람도 나타날 거야.”
가소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하얀 얼굴은 기생오라비잖아요. 전 그렇게 되기 싫어요. 세상에서 무술을 최고로 잘하는 협녀가 될 거란 말이에요!”
“쿨럭쿨럭, 기생오라비는 사내들한테나 쓰는 거지! 네가 그렇게 될 일은 없어.”
가소타는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어쩐지 저번에 청양 언니가 성 오라버니한테 기생오라비라고 그러더라고요.”
“…….”
* * *
오수진 거리로 긴 행렬이 늘어섰다. 가장 앞쪽에서는 취고수들이 떠들썩하게 나팔을 불어 댔다. 그 뒤로 한 남자가 커다란 말에 올라탄 채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짙은 눈썹과 커다란 눈, 까무잡잡한 피부는 한눈에 봐도 용맹스러웠지만 화려한 금빛 비단옷을 입고 있어 조금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그 뒤로는 여덟 명의 가마꾼이 커다란 가마를 메고 걸음을 내디뎠다. 가마 또한 화려하긴 마찬가지였다. 금빛 지붕에 은색 장막이 둘려 있었고 반짝이는 술이 바람에 나부꼈다. 가마 뒤쪽으로는 상자를 짊어진 일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얼핏 헤아려도 족히 마흔 개는 넘는 커다란 녹나무 상자였다.
더 놀라운 풍경은 그들이 가는 길마다 붉은 융단이 깔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융단을 까는 일꾼들은 바빠 보였다. 그들이 오기 전 길에 한 장을 깔고, 또 뒤에 있는 융단을 잘 말아 앞에 있는 일꾼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들은 분주했지만 이어달리기를 하듯 손발이 척척 맞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언뜻 보기에는 신부를 맞이하러 가는 대열 같기도 했다. 하지만 말에 탄 사내는 붉은 꽃을 꽂고 있지도 않았고, 가마 또한 화려한 꽃가마가 아니었다. 게다가 혼수라고 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행렬의 정체가 궁금했던 사람들은 아예 그들을 따라나섰다. 어느 집으로 가는 행렬인지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다.
* * *
취선루의 관리인은 위층에 서서 주루 쪽으로 걸어오는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뒤, 붉은 융단이 취선루의 계단 밑에 깔렸다. 기쁨에 잠긴 관리인은 서둘러 이 일을 주인장에게 고했다.
“주인 어르신,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곧 저희 주루에 오실 겁니다.”
사성성도 떠들썩한 나팔 소리를 듣고 창밖으로 목을 쭉 빼고 밖을 살펴보았다. 세상에! 이토록 엄청난 인파라니. 귀한 손님이 틀림없었다. 저리 많은 사람들을 앉힐 탁자와 의자가 있던가. 그는 서둘러 점원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어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거라!”
모든 점원은 하던 일을 멈추고 새하얀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계단 양옆에 늘어섰다. 귀한 손님을 맞을 때 하는 취선루만의 규율이었다.
대열이 주루 앞까지 도착하자 사성성은 잰걸음으로 달려 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귀객을 모시게 되어 참으로 영광…….”
앞에 있던 사내는 말에서 내리더니 곧장 사성성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성성은 멍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에게 무릎을 꿇다니… 대체 이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사위, 장인어른께 인사드립니다!”
깜짝 놀란 사성성은 별안간 그를 지나쳐 가마 옆으로 걸어갔다.
시녀들이 가마 발을 걷자 그 안에서 사앵앵이 뛰쳐나왔다. 곧장 아버지의 품에 안긴 그녀가 흐느꼈다.
“아버지!”
부녀는 서로 부둥켜안은 채 목 놓아 울었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사장풍은 놀란 얼굴로 두 부녀를 바라보았다. 자신부터 일어나라고 하는 게 먼저 아니던가? 결국 알아서 일어난 그는 사앵앵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되었소. 돌아왔으니 응당 기뻐해야지, 어찌 우는 것이오?”
사앵앵은 여전히 흐느꼈다.
“몇 년이나 참고 또 참았는데… 울지도 못한단 말이에요?”
사성성은 곧장 사장풍에게 눈을 부릅떴다. 몇 년이나 참다니? 어쩐지, 그래서 이리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대체 억울한 일을 얼마나 많이 견딘 것이란 말인가. 가여운 우리 딸.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목 놓아 울부짖더니 다시 딸을 감싸 안고 통곡했다…….
“…….”
사장풍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애간장이 다 찢어질 때까지 울겠단 말인가? 한참을 울던 사앵앵은 그제야 딸과 아들을 떠올렸다. 눈물을 그친 그녀는 마차 옆에 서 있던 두 남매에게 손짓했다.
“어서 와서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렴.”
사실 외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했지만 사앵앵은 ‘외外’자가 싫었다. 거리가 먼 친척을 부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 앞에서는 할아버지라 불렀다.
두 아이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렀다. 사성성은 이렇게나 큰 외손주들의 모습에 기쁘기도,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다. 가엽기도 하지. 척박한 서북에서 아이를 낳으려면 분명 온갖 고생을 다 겪었으리라.
아이를 낳으면 알려 주겠다던 말과 달리, 서북에선 소식이 없었다. 오매불망 기다려도 기쁜 소식이 전해지지 않으니, 그는 조용히 기대를 거두었던 참이다. 그런데 손주들이 이렇게 큰 채로 찾아온 것이다. 이제야 만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시큰거렸다…….
그는 사앵앵을 놓고 이번엔 두 아이를 껴안은 채 목 놓아 울었다. 사금언社錦彦은 이런 상황이 조금 불편했다. 아무리 할아버지라고 해도 사내가 어찌 이리 눈물을 뚝뚝 흘릴 수 있단 말인가? 할아버지는 정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사봉봉史芃芃은 역시 누이인지라 철이 더 들었는지 사성성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할아버지, 울지 마셔요. 너무 우시면 건강에 안 좋아요.”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사앵앵에게 말했다.
“어머니, 울지 말아요. 어머니가 울면 할아버지도 눈물을 그치지 않을 거라고요.”
“그래, 안 울게.”
사앵앵이 손수건으로 사성성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버지, 이제 올라가서 얘기해요.”
한바탕 울고 난 사성성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취선루의 점원들뿐만 아니라 오수진의 주민들도 그들이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수진의 제일가는 부자였던 그는 평소 체면을 제법 중시하며 살았다. 그런데 오늘 제대로 소탈한 보습을 보이고 말았다. 조금 부끄러웠던 그는 두 손을 모아 주민들에게 읍하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제 딸이 돌아왔으니 다들 와서 식사를 하십시오.”
주루에 들어선 사앵앵은 사장풍을 데리고 사성성에게 절을 올렸다. 뒤이어 두 아이에게도 절을 하게 했다. 예쁜 두 손주를 바라보고 있으니 사성성은 또다시 눈물이 났다. 세뱃돈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탓에 사봉봉에게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주려 했다. 하지만 사앵앵이 막아섰다.
“아버지, 반지를 주셔도 낄 수 없는걸요. 나중에 세뱃돈이나 조금 챙겨 주세요.”
사성성은 손주들을 양쪽에 하나씩 끼고 연신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애틋해지는 게,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은 사금언이 자신의 성씨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랬다면 더 완벽했을 터인데.
애당초 그는 데릴사위를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황상이 정해 준 혼사였고 이제 사장풍은 복직까지 하게 되어 다시 장군이 되었다. 이번 행차도 복직을 하기 위해 처자식을 데리고 도성에 가는 길에 들른 길이었다.
황제가 임명한 장군을 데릴사위로 삼다니… 사성성도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다. 그저 손녀에게라도 자신의 성씨를 따르게 해 준 것만으로 충분히 효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두 손주를 유심히 살폈다. 사봉봉은 제 어머니를 꼭 닮았다. 오히려 어머니보다 더 예뻐 어린 나이임에도 단번에 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반면 사금언은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영준한 이목구비에 다부진 골격까지 사장풍의 늠름한 기세가 느껴졌다. 이따금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까지 제법 어른스러워 보였다.
다시 자신의 딸을 바라보니, 어머니가 되었지만 여전히 하얀 얼굴에 가느다란 허리는 시집을 가지 않은 처녀처럼 보였다. 아무리 봐도 서북의 척박한 지역에서 고생을 한 사람 같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시선을 사장풍에게로 옮겼다. 엥? 어찌 이리 숯덩이처럼 까매졌단 말인가?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은 예전과 똑같았지만 피부색과 눈썹 색이 워낙 비슷하여 경계가 모호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예전엔 제법 호리호리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매우 우람했다. 서북 지역에서 양고기나 나귀 고기를 많이 먹은 듯했다. 사성성이 사장풍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북엔 부부가 함께 간 것이 아닌가? 앵앵이는 그대로인데 어찌 장군은 그리되었는가? 고생을 너무 많이 한 것인가? 본디 지역의 물과 흙이 그 지역 사람을 기르는 법이지. 우리 앵앵이는 그 점이 참 좋아. 어딜 가든 적응을 잘하지 않는가.”
“…….”
고생을 떠나 사앵앵이 저 고운 피부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은자를 썼는지 안다면 사성성은 또 눈물을 흘릴 테지. 사앵앵의 얼굴은 새하얀 은자로 뒤덮인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