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6화
그날 녹하는 가난청에게 물었다.
“청아, 어머니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여동생이야? 아니면 남동생이야?”
가난청은 어머니의 배를 쓰다듬으며 의원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한참 후에야 말했다.
“여동생이요.”
차를 마시고 있던 가동은 입에 머금었던 차를 내뿜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아이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해 보아라!”
가난청은 위협에도 겁을 먹기는커녕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말했다.
“어머니 배 속에 여동생이 있어요.”
말을 마친 아이는 가동에게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가동은 정말… 매를 들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아이의 뒷배가 너무 든든했기 때문이다.
* * *
가 대인의 정성 어린 보살핌에 녹하의 배는 금세 불어났다. 잘 먹고 잘 잘 뿐만 아니라 기력도 좋았다. 배가 불러오고 몸이 조금 붓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해산의 시기가 다가왔다. 이번에는 가동이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아이를 낳는 것처럼 날뛰었다. 드디어 그도 요란법석을 떨던 황상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이가 너무 큰 탓에, 녹하가 고통을 못 이기고 몸부림을 쳤다. 그녀의 비명이 들리자 가동은 곧장 달려가려 했다.
다행히 영구 부부가 와 있었다. 영구가 그를 붙잡았지만, 우왕좌왕하던 가동은 아예 훌쩍 뛰어올라 지붕 위로 올라갔다. 마당에 있던 이들은 다들 깜짝 놀라 소리쳤다.
“대인, 어서 내려오십시오. 지붕으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부인께서 얼마나 놀라시겠어요.”
방 안에 있던 녹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영문을 알지 못했다. 지붕에서 발소리까지 들리니 마음이 초조해진 나머지 있는 힘껏 힘을 줄 수 있었다. 마침내,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응애응애 우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는 유난히 맑고 우렁찼다.
지붕 위에 있던 가 대인은 그 소리를 들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역시 그의 아들다웠다. 울음소리마저 이렇게 우렁차다니. 산파가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와 축하를 건넸다.
“대인, 축하드립니다. 예쁜 따님이십니다. 엥, 대인! 어째서 지붕 위에 올라가 계십니까?”
가동은 산파의 말에 다리 힘이 풀린 나머지 하마터면 지붕에서 떨어질 뻔했다.
“방금 뭐라 하였소?”
“축하드립니다, 대인. 예쁜 따님입니다. 어서 한번 보시어요. 동글동글한 얼굴이 대인을 꼭 닮았습니다.”
가동은 훌쩍 뛰어내려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를 바라보았다. 정말 전병처럼 동글동글한 얼굴이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들이면 몰라도, 훗날 어느 사내가 원할까?”
“…….”
이제 갓 태어난 아이거늘, 벌써 그런 일까지 걱정하다니!
“대인, 여자는 자라면서 얼굴이 열댓 번도 더 바뀌는 법입니다. 아가씨도 나중엔 부인과 많이 닮은 모습일 겁니다.”
가동이 말했다.
“날 닮는다면?”
“…대인을 닮는다면 위엄 있고 늠름한 여장부가 되시겠지요.”
그녀의 말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가동은 아이를 받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래, 여인이면 또 어떤가. 청양 공주도 무술을 배우는데 그의 딸이라고 못할까? 영구가 다가와 아이를 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한눈에 봐도 골격이 보통이 아닙니다. 무술계의 새싹이 되겠군요!”
“정말?”
가동의 기쁨은 더더욱 커졌다. 영구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구는 곧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당연히 대인을 달래려고 하는 말이지요. 녹하의 솜씨를 물려받으면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자수 공예가가 되겠지요. 훗날 청혼을 하러 오는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룰 것입니다.”
“…….”
자수 공예가라고……? 한 명이라도 아비의 업을 따르면 좋을 텐데, 어찌 이리 어렵단 말인가?
품에 안긴 아이는 눈을 반쯤 뜬 채 입을 연신 오물거리며 거품을 만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자기 자식은 역시 볼수록 더 예쁜 법이었다. 외모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랴? 아들이든 딸이든 중요치 않았다. 가동은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좀처럼 품에서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첫 아이 때와는 다르게 당당하게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둘째 아이의 이름은 황제에게 맡기지 않았다. 사흘 동안 가동이 직접 고민한 끝에 가소타賈小朵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가씨 집안의 한 송이 작은 꽃이란 의미였다.
녹하는 아이의 이름을 듣자마자 눈을 희번덕였다. 가난청은 어머니를 따르는 귀여운 보배였기에 그 또한 흰자위를 보였다. 녹하와 가난청 모두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갓 태어난 아이만큼은 까만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활짝 웃어 주었다. 그 모습에 가동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날아갈 듯 기뻐했다.
“이거 봐, 이렇게 웃어 주잖아. 이름이 마음에 드는 거야. 가소타, 소타야, 타타! 정말로 이 아비의 꽃이라니까.”
결국 가씨 집안의 천금 같은 딸은 가소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가 대인은 가난청에게 쏟아붓지 못했던 부정을 가소타에게 마음껏 발산했다. 녹하가 괜스레 다른 생각을 가질까 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녹하가 아침부터 밤까지 가난청을 안아 주었다면 이번엔 그가 밤낮으로 가소타를 안아 주었다. 밤에도 아이를 데리고 잠들 정도였다. 부녀는 함께 침대에 누워 서로를 바라보았다. 웃는 것조차 똑 닮은 모습이었다.
매일 이 시간만 되면 그는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정말 하늘이 그에게 후한 인심을 베푼 게 아닐까. 후사가 끊긴 줄 알았던 그에게 아들과 딸이 연달아 생기다니. 인생의 즐거움 중 아들과 딸을 두루 낳은 것보다 더 좋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영구보다 제가 더 행복한 것 같았다. 그는 곤히 잠든 가소타를 조심스레 감싸 안으며 눈을 감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 *
가난청의 나이가 세 살하고도 반년이 지났을 무렵, 녹하는 아이를 데리고 입궁했다. 상서방上書房(황자와 황손들이 공부를 하던 곳)을 지날 때 안에서 책을 낭독하는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호기심에 곧장 문 앞으로 달려갔다. 안에는 저보다 커 보이는 형과 누나들이 선생을 따라 책을 읽고 있었다.
이제껏 자유분방하게 자란 가난청은 아직 공부를 배워 본 적이 없었다. 그 광경이 신기하기만 했기에, 아이는 홀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황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녹하는 아이가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화들짝 놀라 끌고 나오려 했다.
그러나 가난청은 기둥을 붙잡은 채 손을 놓지 않았다. 자그마한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버티며 이곳에 있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청아가 마음에 들어 하니 여기 있게 내버려 둬요. 청양이 좀 봐요.”
황후의 말에 녹하는 손을 내려놓았다. 그 말대로, 가장 뒷줄에 앉아 있던 청양 공주는 서책을 든 채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장난치고 노는 것만 좋아하던 아이에게 가만히 앉아 책을 읽으라고 하니 정말 죽을 맛이었으리라.
풀려난 가난청은 빈자리를 찾아 의자에 앉더니 그럴싸하게 흉내를 냈다. 형과 누나들이 무얼 공부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바른 자세로 꼿꼿이 앉아 다른 아이들의 말을 따라 했다.
황후 마마의 허락 덕분에 이날부터 가난청은 매일 가 대인과 함께 입궁하여 상서방에서 공부를 했다. 가난청은 배우는 속도가 유난히 빨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해 알 듯 말 듯한 수준이 되더니, 또 금세 깊이 깨닫는 수준에 도달했다. 선생이 질문을 건네면 나름대로 자신의 견해를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몇 살이 더 많은 청양 공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가난청은 책을 읽는 게 좋았다. 아이는 태자에게서 두꺼운 서책을 빌려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매일 밤 등불을 환히 밝히고 책을 읽는 아이의 모습에 녹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저리 많은 책을 읽다니… 저러다 책만 읽는 바보가 되진 않을까? 그녀는 가난청이 예전처럼 그저 종일 뛰어놀길 바랐다.
가 대인은 아이가 읽는 책이 궁금해 몇 장 넘겨보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조용히 책장을 덮었다.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심오한 책을 읽는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가난청에게 내용을 물어보았고, 가난청은 뒷짐을 진 채 자그마한 입을 들썩거리며 책의 내용을 읊었다.
“…….”
역시나, 가동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가난청은 상서방 선생에게 점점 더 신임을 받았다. 자리도 뒤쪽에서 점점 앞으로 옮겨졌고 매일 선생의 칭찬을 받는 모범생이 되었다. 더 나중에는 한림원 대원사 양승해의 제자이자 태자 전하의 사제師弟(한 스승의 제자로 다른 사람보다 늦게 제자가 된 사람)가 되었다. 그는 늘 태자와 함께 책을 읽고 학문을 논했다. 그의 독특한 견해는 매번 대원사와 태자를 놀라게 했다.
태자와 가동은 매우 친한 사이인 데다 가난청은 사부의 아들이니, 태자는 아우가 생긴 셈이었다. 아우가 무척 마음에 든 태자는 어딜 가든 늘 가난청을 데리고 다니며 종종 그의 의견을 구했다.
그렇게 가난청은 태자 전하의 가장 최측근이 되었고, 신분도 크게 상승했다. 난청의 아버지인 가 대인조차 그의 높은 신분을 질투할 정도였다.
한번은 가동이 가난청과 입궁을 하는데 한 소태감이 그들에게 다가와 예를 갖추려 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했던 가동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뒷짐을 진 채 그의 인사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았다. 하지만 소태감은 알랑거리는 얼굴로 가난청에게 먼저 인사를 올렸다.
“소인, 가 공자를 뵈옵니다.”
그는 뒤늦게 가동에게도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가 대인.”
처음은 예를 갖춰 문안을 드리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인사치레로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여도, 따지고 보면 의미하는 바가 컸다. 황궁을 오가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문안은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만 드릴 수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에겐 평범한 인사를 건넸다.
“…….”
가동은 심히 불쾌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아들이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똑똑한 가난청이 아버지를 그리 좋아하지 않더라도 가동에게는 소타가 있었다! 그는 가난청에게서 받은 상처를 가소타에게서 위로받을 수 있었다.
가소타는 늘 아버지의 꽁무니만 쫓아다녔다. 걸음마를 뗀 후부터 가동이 저택에만 돌아오면 곧장 그에게 걸어와 다리를 붙잡고 올라탔다. 가동은 아이를 번쩍 들어 안아 하늘로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점점 더 높게 던졌다가 받아도 가소타는 겁을 먹기는커녕 신이 나서 까르르 웃었다. 그렇게 두 부녀는 마냥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옆에 서 있던 유모만이 질겁한 얼굴로 손을 어쩔 줄 몰라 했다. 혹여 가 대인이 아이를 받지 못해 가소타가 다칠까 봐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딸은 역시 다르다더니 다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 살밖에 되지 않은 가소타는 가동이 권법 연습을 마치면 까치발을 든 채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 주려 했다. 이 시간만 되면 가 대인은 가슴에 꿀을 발라 놓은 듯 달콤한 기분을 느꼈다. 역시 자신의 딸은 달랐다. 청양 공주와는 머리가 다 뽑힐 정도로 격렬하게 놀 뿐, 살가운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