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684)화 (683/1,192)

제684화

“어서 말해 보거라. 대체 무슨 일이야?”

“어제 부인께서 아가씨를 연회에 부르셨지만 아가씨는 머리가 아프다고 가지 않으셨지요.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시더니 밤새 고민하셨다며 가지 않는 건 안 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인께 시답잖은 말이 오가면 안 된다면서요. 그래서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소인에게 머리도 빗겨 달라고 하셨습니다.

부인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순 없다며 부인께 받은 머리 장신구도 전부 꽂으셨고요. 그리곤 아침을 드시고 연회장으로 가셨습니다. 소인도 따라가려 했지만 막으셨어요. 대신 제게 색실 꾸러미를 건네주시면서 공자의 양말에 수를 놓을 실이니 잘 정리해 두라고 하셨지요. 또 신발 본을 주시면서 색실을 정리한 후엔 가죽 재단을 해 두라고 하셨어요.

아가씨는 연회장에서 점심을 드시고 부인 처소에서 낮잠을 주무시다가 저녁까지 연회장을 지킬 거라고 하셨습니다. 알아서 돌아올 테니 데리러 올 필요도 없다고 하셨지요. 한데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려도 아가씨는 돌아오지 않으셨고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등잔불을 켜 보니 보석함 밑에 서신이 깔려 있었습니다. 소인도 그제야 아가씨께서 떠나셨다는 걸 알았습니다…….”

녹하는 이미 서신을 꺼내 등불에 비춰 읽고 있었다.

「언니, 대인, 전 떠납니다. 부디 찾지도, 그리워하지도 말아 주시어요.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날 테니까요.

언니와 대인의 크나큰 은혜를 갚을 길 없어 청아를 남기고 떠나니, 제 보답이라고 여겨 주십시오. 부디 언니께서 낳은 친자식으로 길러 주시고 제 존재는 알리지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언니가 아이의 친어머니입니다. 언니의 자식이 되는 건 청아에게도 큰 복이 될 테지요.

저와 대인은 잘못된 연을 맺었으니 계속 잘못을 더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은애하지 않는 사내에게 시집가길 원치 않듯, 대인께서도 은애하지 않는 여인을 맞기 싫으실 테지요. 언니를 향한 대인의 마음은 그토록 일편단심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저도 무척 부러울 정도였습니다. 훗날 저 또한 대인처럼 마음이 변치 않는 사내를 만나고 싶습니다.

언니, 대인, 제 걱정은 하지 마시어요. 전 더 이상 제 몸을 팔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려 했던 약한 여인이 아닙니다. 충분한 여비와 건량을 지녔고, 사람들을 어찌 상대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서 멀리서나마 언니와 대인, 청아의 복을 빌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어요.

심열 배상」

서신을 다 읽은 녹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얇은 종이는 유유히 날아 바닥에 떨어졌다. 녹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날 밤, 가동은 심열의 방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그녀가 저택을 떠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방에서 실마리를 찾아 뒤를 쫓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방 안을 꼼꼼히 살피던 그는 결국 의기소침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그녀를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물건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흐트러지거나 산만한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 뜻은 충동적으로 저택을 떠난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오늘 떠난 걸 보면 고민 끝에 적당한 날을 고른 것일 테지. 저택 대문도 활짝 열려 있고 오가는 사람도 많으니 그녀를 눈여겨 보는 사람도 없었으리라. 그녀가 떠나도 연회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일찌감치 저택을 나와 마차를 타고 성을 빠져나갔다면 북쪽이든 남쪽이든 서쪽이든 이미 멀리 떠났을 것이다.

문득 가동은 그날을 떠올렸다. 심열이 침대에 무릎을 꿇고 절하며 부디 몸 건강히 지내라고 하던 날. 기분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 전부터 심열은 저택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그 여인은 아이만 남겨둔 채 훌쩍 떠나 버렸다. 설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은혜 갚은 흰 여우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만 남긴 채, 속세를 피해 숨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을 정녕 미담이라 할 수 있을까.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소복을 입은 채 서럽게 울고 있었다. 당시 그는 연민을 느꼈지만 녹하 앞인지라 아무런 감정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날 밤 녹하와 침대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데 별안간 그녀의 얼굴을 떠올랐다.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될 비밀이었기에 영구에게마저 말하지 못하고 홀로 간직해 두었다. 그 뒤로 그는 줄곧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녀의 맑은 눈망울을 마주할 때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누구도 모독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한데 자신이 그녀를 모독했다. 그녀를 녹하로 여긴 채 탐하고 말았다. 그 당시 정말 조금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까? 어쩌면 그의 잠재의식은 정신을 차리지 않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꿈이라 여겼겠지. 결국엔 그도 평범한 사람이었고 나쁜 사내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으리라.

처음 그녀가 떠났을 때 그의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비열하다고 할지라도 그는 정말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 그러나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은, 그의 마음가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기뻐했고, 그녀를 부처님처럼 섬기며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다.

저택에 들어오지 않겠다는 말에 바깥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주었고 매일 선물을 사 들고 그녀를 찾아갔다. 필요한 것을 챙겨 주는 것은 물론, 화원에 몰래 기이한 화초를 심은 듯 매일 물을 주고 살뜰히 살피며 다른 이들에게 숨겨 왔다. 훗날 예쁜 꽃이 그의 눈앞에서 활짝 필 순간을 기대하며,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 왔다.

그녀가 저택으로 돌아온 뒤로도 그는 여전히 매일같이 선물을 사 들고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그때에도 온 정신은 그녀의 배에만 머물러 있었다. 어서 배가 부풀고 아이가 태어나길 고대했다.

당시 그는 정말 얼이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녹하가 저택을 나가 궁에서 지낼 즈음에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목숨처럼 사랑하는 아내를 아프게 했음을.

그는 녹하를 은애하고 존경했으며 늘 그녀에게 의지했다. 녹하는 그의 굳건한 하늘이자 따스한 피난처였다. 그와 녹하는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며 동고동락해 왔다. 녹하는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의리 있고 강인한 여인이었다.

황후가 납치되었을 때도 녹하는 황상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대신 자신의 목을 베어 달라고 청하기까지 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이번 생에 그녀에게 절대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설령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해도 첩을 들이지 않았다. 녹하의 마음이 상할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낙천적인 그는 황후를 잃은 황제의 머리가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는 것을 보고도 좀처럼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도 절실히 깨달았다. 정이라는 한 글자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칼보다, 강력한 독약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실수를 바로잡고 잡념을 떨쳐 내어 모든 걸 예전으로 돌려놓은 그는 여전히 단순하고 낙천적으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은연중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심열이 떠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막상 그녀가 떠나고 나니 말할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그녀는 아주 잠깐 하늘을 빛낸 후 저 멀리 사라지는 유성처럼, 그와 짧은 시간을 함께하고 닿지 못하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때 누군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사뿐사뿐한 발소리와 바닥에 드리워진 가냘픈 그림자에 가동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얼른 고개를 드니 녹하였다. 그녀가 얇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심열이 남긴 서신이야. 읽어 봐.”

그는 서신을 건네받고 한 글자 한 글자 유심히 읽었다. 짤막한 몇 줄이 다였지만 그의 시선은 한참 동안 서신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녹하를 바라보자, 녹하가 그를 품에 안았다. 나직한 위로의 말이 그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걱정하지 마. 동월에 있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야.”

가동은 그녀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익숙한 향기가 안도감을 주었다.

“찾을 필요 없어. 그 애도 원치 않을 거야.”

가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관리인을 불렀다.

“오늘부터 부인이 청아의 친어머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이렇게 알리거라. 그 누구도 다시는 심열의 이야기를 꺼내선 안 된다. 청아 앞에선 더더욱. 만약 이를 어기는 자가 있거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엄숙한 태도로 지시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관리인의 목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이윽고 그는 다른 하인들에게 명을 전하러 떠났다. 가동도 녹하를 데리고 방에서 나왔다.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이 처소는 봉쇄하는 게 좋겠어. 아무도 쓰지 못하게.”

* * *

그날 이후로, 가씨 저택의 하인들은 두 번 다시 심열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지금껏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녹하는 아예 관직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는 데만 전념했다. 혹여나 아이가 잘못될까 봐 어찌나 애지중지 돌보는지,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반면 가동은 계속해서 근엄한 아버지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다.

녹하가 아이를 아낄수록 그는 엄격해졌다. 한번은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망치는 법이니 그리 감싸지 말라고 녹하를 타일렀을 정도였다. 그러나 녹하는 들은 척도 않고 아이 곁만 맴돌았다. 가동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정말, 자식의 노예 같다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가동은 녹하가 부러웠다. 아이를 그녀가 독차지한 탓에 그는 늘 멀리서 바라만 봐야 했다. 심지어 아이를 한번 안아 볼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대부분은 거들떠볼 필요도 없는 척 꾸며 낸 행동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녹하가 목욕을 하러 갔을 때 재빨리 유모에게서 아이를 데려와 품에 안았다. 그리곤 아무도 보지 않는 틈에 아이에게 입을 맞췄다. 아이에게는 아무리 사랑을 주어도 늘 부족했다. 제 어머니를 쏙 빼닮은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녹하가 거의 다 씻었을 즈음, 가동은 아이를 유모에게 넘기며 괜스레 신경질적인 어투로 말했다.

“볼일을 본 것 아닌가? 고릿한 냄새가 나는 듯한데.”

유모는 아이의 자그마한 엉덩이를 만지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문득 그녀가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았다.

“얼굴에서 냄새가 조금 나는 듯한데, 혹 대인께서 입을 맞추셨습니까?”

“…아니네, 내가 무엇 하러 입을 맞춘단 말인가?”

유모는 아이를 안고 방으로 향하며 중얼댔다.

“가서 얼굴을 닦아야겠군요. 부인께서 냄새를 맡으시면 소인에게 화를 내실 겁니다.”

“…….”

날 그리도 싫어한다고? 난 그 애의 아비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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