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3화
금지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일어나셨습니까? 아가씨.”
금지는 서둘러 장막을 걷었다.
가동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심열이 몸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막 잠에서 깬 그녀의 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표정도 약간 나른해 보였다. 금지가 그녀의 허리에 푹신한 베개를 대어 편히 앉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심열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조금 몽롱한 듯했다.
“대인,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가동은 천천히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아무 일도 없어. 잠시 보러 온 거야.”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니 어딘가 조금 불편해 보였다.
“좀 괜찮은 거야?”
“아주 좋습니다.”
심열이 말했다.
“대인께선 공무로 바쁘시니 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언니께서도 매일 찾아와 주시는걸요.”
가동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선녀처럼 어여쁜 얼굴이었지만 예전에 비해 어딘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출산을 겪고 소녀에서 부인이 되었으니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 테지.
사실 그는 심열에게 줄곧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와 제대로 대화를 나눈 지도 오래였기에 이번 참에 안부를 세세하게 물었다. 심열은 눈을 내리깐 채 질문에 일일이 답했다.
문답이 끝난 뒤엔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가동은 그만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푹 쉬어, 짬이 나거든 또 보러 올게.”
발걸음을 떼려는데, 심열이 그를 불러 세웠다.
“대인.”
가동은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심열이 물었다.
“아이는 잘 지내는지요?”
“잘 지내지. 이따 녹하한테 아이를 보여 주라고 할게. 그새 커서 포동포동한 게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산후조리가 끝나면 산책도 하고 그래.”
“아이를 데려오실 것 없습니다. 지금은 몸도 좋지 않고 기운도 없으니 나중에 보겠습니다.”
심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근무를 마치고 오신 것 같은데 종일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어서 돌아가 쉬시어요. 전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언니도 자주 오시 걸요.”
“알겠어.”
가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볼게.”
발걸음을 떼려는데 문득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은 게 떠올랐다.
“맞아, 황상께서 아이한테 이름을 지어주셨어. 난청이야, 가난청.”
심열이 조용히 읊조렸다.
“난청이라… ‘효와 우의가 깊고 지조 있게 처신하며, 내면은 옥처럼 윤기가 흐르고 외면은 물처럼 맑다’는 구문에 쓰인 그 난청이요?”
가동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도 다 알고 있구나.”
심열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저 조금 아는 것뿐입니다. 대인께서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을 드리신 겁니까?”
가동이 고개를 저었다.
“녹하가 황후 마마께 부탁했어. 황상께 이름을 받고 싶다고 말이야.”
“언니께서 정말 지극 정성을 다하시는군요.”
심열이 말했다.
“제 몸이 좋지 않아 대인과 언니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이가 아직 어려 소란을 피울 때도 있겠지요. 혹여 귀찮으시더라도 제 체면을 봐서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어요.”
가동은 그녀의 말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난청이는 내 아이야. 자기 자식을 싫어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어? 녹하도 아이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아끼는데. 내가 아이에게 안 좋은 소리 한 번 했다고 당장 사과하라고 몰아세울 정도라니까. 온 집안사람들 전부가 아이를 보배처럼 여긴다고.”
심열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언니가 진심으로 아이를 아끼시는 게 느껴집니다.”
말을 마친 그녀의 얼굴에서 문득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목소리도 한층 어두워졌다.
“언니는 저택의 안주인이자 아이의 적모이십니다. 언니에게 아이를 맡기니 저도 마음이 놓입니다. 대인께서도 부디 마음을 다해 돌봐 주시어요. 대인과 언니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별안간 심열이 침대에 엎드려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 깜짝 놀란 가동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열은 가볍게 그의 손을 빼내더니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두 분께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송구한 마음에 감사 인사를 드리려는 것이에요.”
가동이 미소를 지었다.
“가족끼리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조만간…….”
가동은 갑작스레 말을 멈추었다. 그간 혼사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는 피하기만 했다. 녹하가 몇 번이나 혼사 얘기를 꺼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에, 그는 헛기침을 하며 하려던 말을 숨겼다.
“그럼, 이만 쉬어. 난 가 볼게.”
말끝을 흐렸어도 심열은 그의 속내를 훤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의 뒷모습을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대인, 부디 몸 건강하십시오.”
가동은 까닭 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발걸음은 결코 멈추지 않고, 나아갈 뿐이었다.
* * *
가난청의 만월이 다가오자, 가동의 저택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연회가 열렸다. 가동은 하루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녹하는 사흘간 연회를 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연회엔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손님을 받았으며, 선물이 없어도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 녹하는 더 많은 축하를 받을수록 가난청도 많은 복을 누릴 것만 같았다. 힘들게 찾아온 아이인 만큼 아이는 그녀와 가씨 집안에 너무나도 귀중한 존재였다. 아이에게 좋은 일이라면 그녀도 얼마든지 기쁘게 준비할 수 있었다.
가동은 인맥이 워낙 넓었기에 조정과 성안 관리들이 대부분 참석했다. 여기에 늘 가깝게 지내던 주루와 식당, 찻집, 장신구 가게, 비단 가게, 간식 가게, 쌀집 주인장들까지……. 그를 아는 사람은 전부 다 온 듯 북적였다.
돈이 많은 이들은 좋은 선물을 가져왔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직접 만든 호랑이 신발이나 시장에서 산 딸랑이 같은 것들을 가져왔다. 모두가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다. 가 대인과 부인은 빈손으로 오는 이들에게도 웃는 얼굴로 맞이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이튿날이 아이의 만월이었다. 황제와 황후가 찾아왔다는 소문이 퍼지긴 했지만, 평복 차림으로 잠행한 두 사람은 안채에서 술을 마신 뒤 곧장 돌아갔다.
저택 대문은 아침부터 밤까지 활짝 열려 있었고 극단 공연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덕분에 많은 손님이 줄지어 오가며 떠들썩한 한때를 보냈다.
정신없이 손님을 맞던 녹하는 이튿날이 되어서야 심열이 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산후조리도 끝나가고 몸도 어느 정도 회복했으니 이런 날 그녀가 빠지면 되겠는가. 녹하는 관리인을 보내 그녀를 데려오라고 했지만 관리인은 심열의 몸이 좋지 않다고 전했다.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 어찌 친어머니가 자리를 비운단 말인가. 녹하는 혹여나 심열의 마음에 응어리가 생길까 봐 그녀의 처소로 향했다. 심열은 한눈에 봐도 조금 불편해 보였다. 이마에 젖은 수건을 얹고 침대에 기대앉은 그녀는 기력이 쇠한 모습이었다. 녹하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어쩌다 몸이 이렇게 안 좋아진 거야?”
녹하가 고개를 돌려 금지에게 물었다.
“아가씨가 이렇게 아픈데 어째서 고하지 않은 것이야?”
금지는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열이 입을 열었다.
“언니, 혼내지 마시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바깥이 너무 시끄럽다 보니 머리가 좀 아픈 것 같아요.”
녹하가 곧장 말했다.
“조금 시끄럽긴 하지. 가서 공연을 중단하라고 할게.”
“언니, 그러지 마시어요. 오늘처럼 좋은 날에 어찌 공연을 중단시킬 수 있겠어요. 게다가 전 담이 작아 사람이 많으면 조금 무섭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나가지 못할 듯하니 언니와 대인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어요.”
“심열이 넌 청아의 어머니잖아. 어머니가 자리를 비우다니 말도 안 돼…….”
“전 괜찮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식으로 시집을 온 게 아니라 명분이 없는걸요. 전 이곳에 있는 게 낫겠어요.”
녹하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 머리가 아프다는 것은 가짜였고 난처한 심열의 신분이 진짜 이유였던 것이다. 녹하는 자신이 너무 소홀했다며 자책했다. 혼사부터 치른 뒤에 만월 연회를 열었어야 했다. 안 그래도 부끄러움이 많은 심열이 지금처럼 불분명한 신분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길 꺼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엔 그녀가 더 주도면밀하게 신경 쓰지 못한 탓 같았다.
“사실 별거 아니야. 심열이 네가 청아의 어머니인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손님들도 청아가 잘생겼다고 칭찬하고 대인도 심열이 네 칭찬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다들 널 보고 싶어 해.”
그러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심열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녹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 내 탓이야. 원래는 아이를 낳자마자 혼사를 치러 줄 생각이었는데 산후조리 기간 동안 네가 기력이 없어서 좀 미뤄야겠다고 생각했어. 다 이 언니 탓이야. 날 원망해.”
“언니가 그리 말씀하시면 전 너무 부끄럽습니다. 제가 나가고 싶지 않은 것이니 언니 탓이 아니지요.”
심열이 말했다.
“언니, 제 걱정은 마시고 어서 가 보시어요. 언니가 자리를 비우셔서 대인 혼자 바쁘실까 염려됩니다.”
물론 연회도 걱정이었기에 녹하는 위로의 말을 몇 마디 건네고 자리를 떴다. 사흘간의 연회를 잘 마치고 나서 심열이와 제대로 얘기해 볼 생각이었다.
드디어 사흘째 연회 날, 마지막 손님까지 정성껏 배웅한 녹하와 가동은 녹초가 되고 말았다. 겨우 한숨 돌린 두 사람은 함께 방으로 돌아와 한 사람은 푹신한 평상에, 한 사람은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그때 관리인이 황급히 들어왔다.
“대인, 부인, 큰일 났습니다. 심열 아가씨가 떠났습니다.”
옅은 잠이 들어 있던 녹하는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다니, 어딜 떠나?”
관리인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신 한 통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언제 떠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던 가동은 잠시 넋을 놓는가 싶더니 별안간 밖으로 나갔다. 녹하가 물었다.
“어디 가?”
“심열이 방에 가 보려고. 흔적을 남겼을지도 모르니까.”
녹하가 관리인에게 물었다.
“금지는? 금지도 모른다던가? 어서 금지를 불러오게.”
밖에 서 있던 금지는 녹하의 말에 제 발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부인, 소인은 정말 쓸모없는 인간입니다. 심열 아가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저택을 떠나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