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1화
가동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마마께서 태자를 낳으실 때도 그랬잖아. 위 태의도 별일 아니랬어.”
“그렇다 해도 심열이는 처음 겪는 일이잖아. 하인까지 보내 증상을 알렸는데, 코빼기도 내밀지 않으면 심열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이를 낳아 주는데 불편한 점은 신경 써서 챙겨 줘야지.”
가동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가 봐도 되잖아. 게다가 여인들끼리는 편하게 말할 수 있어도 나는 사내라 그런 말을 건네긴 조금…….”
“당신은 아이 아버지야.”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녹하는 아예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그간 심열이를 찾지 않은 지도 오래됐지? 내가 기분 나빠할까 봐 그러는 거야?”
정답이었다. 가동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녹하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당신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심열이는 아이의 어머니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봐. 당신은 심열이에게 책임을 져야 해. 내가 당신 대신해 줄 수 있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있어. 난 당신이 심열이를 보러 가도 기분 나쁘지 않아. 심열이를 내 여동생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네 식구끼리 즐겁게 살자.”
가동은 녹하를 품에 안고 그녀의 이마에 턱을 맞댔다. 그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알겠어. 당신 말대로 할게. 같이 심열이한테 가 보자.”
저택에 돌아온 두 사람은 함께 심열의 처소로 향했다. 심열의 발을 유심히 살핀 녹하는 옛날 황후의 증상과 똑같아 보였기에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가동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두 여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만 힐끔 바라보았다. 날마다 심열을 찾아와 장난을 치던 일이 이제는 꿈만 같았다. 지금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때만큼 기운을 내기 어려웠다. 기이하게도, 그 때의 감정은 바람처럼 불어 닥쳐 그를 스치고 지나가 버린 듯했다.
심열은 녹하와 이야기를 나누며 곁눈으로 가동을 살폈다. 늘 웃는 얼굴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그 사내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앉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서 예전의 들뜬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녹하가 가동을 불렀다.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뭐 하고 있는 거야? 평소에는 그리 수다쟁이 같던 사람이.”
가동은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하품을 했다.
“오늘 너무 바쁘게 돌아다녀서 그런가… 조금 피곤하네.”
심열이 말했다.
“오늘 많이 피곤하셨지요? 어서 돌아가 쉬세요. 전 별일 없습니다. 금지가 괜스레 작은 일에 놀라 대인께 고하는 바람에 언니께도 심려를 끼쳐 드렸네요.”
“금지가 잘한 거야.”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심열이 넌 우리 저택의 보배니까 사소한 일이라도 그냥 넘어가면 안 되지. 그럼 우린 이만 가 볼게. 심열이 너도 푹 쉬어. 날이 선선해졌으니 옷도 더 많이 껴입고.”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언니.”
심열은 그들을 입구까지 배웅하며 슬쩍 가동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는 그녀에겐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저 녹하와 손을 맞잡은 채 성큼성큼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열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예전엔 혹여나 가 대인이 자신에게 다른 마음을 먹었을까 봐 걱정했었다. 지금 보아하니, 그녀가 너무 깊게 생각한 듯했다.
* * *
구월의 어느 가을밤, 심열은 진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동은 심열의 처소에 가지 않고 그저 소식이 오길 기다렸다. 그 또한 황제와 영구가 그랬듯 가슴 졸이는 감정을 느껴 보고 싶었지만 그의 마음은 유난히 잔잔했다. 아무래도 임신 초반에 너무 들떴던 나머지 때가 닥치니 차분해진 모양이었다.
차 석 잔을 비우고 나니 한 시녀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대인, 축하드립니다. 심열 아가씨께서 공자님을 낳으셨습니다. 부인께서 대인도 어서 오시랍니다.”
가동의 가슴은 순식간에 기쁨으로 물들었다.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아들이었다. 가씨 집안이 후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하늘이 내려 준 아들이었다.
심열의 처소로 향하자 밝은 웃음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니 녹하가 강보에 싸인 아이를 안고 한 송이 꽃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망울이 살짝 젖어 있는 걸 보니 그녀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를 발견한 하인들은 입을 모아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대인. 축하드립니다!”
가동은 대꾸할 겨를도 없이 아이부터 바라보았다. 자글자글 주름진 얼굴로 눈썹을 찡그린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꼭 애늙은이 같았다. 녹하는 아이를 그의 품에 안기며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안아 줘.”
가동은 익숙하게 아이를 안았다. 자식은 없었지만 태자와 공주, 황자까지 안아 본 덕분이었다. 게다가 영안도 있었다. 사내가 그토록 아이를 안고 싶어 한다는 게 소문이 나면 비웃음을 살 법도 한데 아무도 그를 비웃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아이를 좋아하는지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자신의 아이를 안았다. 코끝이 시큰해진 가동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정말 어렵사리 온 자식이었다.
그는 울음을 참았지만, 아이는 그렇지 못했다.
“응애, 응애…….”
가느다란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정말 재미있었다. 그는 서둘러 얼굴을 아이에게 가져다 댔다. 따스한 온기에 아이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자그마한 입을 납작하게 펼치더니 쌔근쌔근 잠들었다. 매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대인께서는 정말 대단하시다니까요. 아이를 구슬리자마자 울음을 그치다니요.”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부자간의 정인 거지. 아기가 아버지 품에 안긴 걸 아는 거야.”
고개를 숙이고 아이를 지켜보던 가동은 별안간 녹하에게 물었다.
“심열이는 괜찮지?”
“그럼.”
녹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산인데도 그리 애먹지 않고 무사히 순산했어. 옆방에서 산파랑 시녀들이 돌봐 주고 있어. 지금은 피비린내가 심해서 아이를 데리고 나온 거야. 환기 좀 시킨 다음엔 다시 어미 품에 돌려보내야지.”
가동이 다시 물었다.
“유모는 부른 거야?”
녹하 옆에 서 있던 한 부인이 무릎을 굽혔다 펴며 예를 갖췄다.
“대인, 소인이 유모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자께서 포동포동해지실 때까지 소인이 잘 먹이도록 하겠습니다.”
가동이 부인을 유심히 살폈다.
“자네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나 되었는가?”
“곧 육 개월입니다.”
유모가 답했다.
“벌써 미음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가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우리 애만 먹이다 자네 아이를 굶길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는 아이를 유모에게 안겼다. 그녀가 아이를 익숙하게 안자 가동은 마음을 놓았다. 녹하가 그를 끌고 문 앞으로 향했다.
“심열이한테도 가 봐.”
가동은 슬쩍 옆방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방 안에서 산파가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밤이라 피가 섞인 물은 그저 검게만 출렁였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킨 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심열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곳곳에 등잔불을 켜 놓은 덕에 은은한 불빛이 사방에서 번져 꼭 꿈속에 있는 듯했다. 가동은 조용히 불빛을 뚫고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심열이 천천히 그를 바라보더니 어여쁜 미소를 지었다.
“대인, 아이는 보셨습니까?”
“봤어.”
가동이 말했다.
“고생 많았어.”
“아이는 예쁩니까?”
“아주 예뻐.”
“마음에 드십니까?”
“들고말고.”
그가 말했다.
“정말 좋아.”
심열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 그만 돌아가 주시어요.”
가동은 조용히 몸을 틀고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 서 있던 녹하는 그가 금세 나오자 팔뚝을 한 차례 꼬집었다.
“더 많이 얘기하지 않고, 지금 심열이는…….”
“피곤해서 쉬고 싶대.”
가동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도 고생 많았어. 이제 가서 쉬자. 아이는 유모랑 시녀들이 돌봐 줄 테니 괜찮을 거야.”
녹하는 알겠다고 대꾸하고는 유모와 시녀들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렸다. 이내 아이에게 입을 맞추고 가동과 함께 처소로 돌아갔다. 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가슴이 벅찼던 녹하는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계속 몸을 뒤치락거렸다. 가동이 팔로 그녀를 감싸며 하품을 했다.
“나더러 잠을 자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녹하가 말했다.
“당신은 어서 자. 난 잠이 안 와서 아이를 보러 가야겠어.”
가동은 눈을 감은 채 단호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렇게 늦었는데, 무슨 소리야? 어서 자.”
녹하는 조금 의아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차분해? 아이를 봤는데 들뜨거나 벅차지도 않단 말이야?”
가동이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말했다.
“난 진작에 들뜨고 벅찼었지.”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그렇게 들뜨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도 녹하와 비슷한 상태였으리라.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난 녹하의 두 눈가엔 퀭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시녀들에게 세수 준비를 시켰다. 어서 아이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그녀가 조급하게 굴수록 가동의 느긋함은 더욱 돋보였다. 그녀가 가동에게 물었다.
“당신은 빨리 아이를 보고 싶지 않아?”
가동이 말했다.
“그렇게 서두르나 여유롭게 가나 매한가지지. 아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녹하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아침을 대충 먹은 뒤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가동이라고 어찌 아이가 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의 혈육인 것을. 하지만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중하며 진중하게 행동하려 했다.
그는 아침을 먹고 뒷짐을 진 채 성큼성큼 심열의 처소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이곳은 시끌벅적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이를 안고 어르는 녹하 주변으로 하인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가동은 문 앞에 서서 고개를 쑥 내밀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겨우 하룻밤 지났을 뿐인데 아이의 얼굴이 조금 변한 듯했다. 어제보다 더 예뻐진 얼굴에 속눈썹은 또 어찌나 길고 고운지. 똘망똘망한 두 눈은 매우 영리해 보였다. 사람들 틈에 둘러싸인 아이는 별안간 입을 헤벌쭉 벌려 웃었다. 하늘에 뜬 태양보다 더 찬란한 미소였다.
그 순간 가동의 마음은 사르르 녹아내렸고 절로 표정도 온화해졌다. 하지만 곁눈으로 느껴지는 녹하의 시선에 그는 미소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녹하가 그를 불렀다.
“이리 와서 안아 봐. 얼마나 잘 웃는지 몰라.”
가동은 괜스레 내숭을 떨었다.
“아니야. 늦었으니 어서 가자. 입궁해야지.”
녹하가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나 가. 난 마마께 며칠간 휴가를 청했으니까.”
가동은 하는 수 없이 홀로 돌아가야 했다. 발길을 돌린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찌 휴가 낼 생각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녹하도 참, 그에게도 알려 줬어야지.
하지만 그는 끝내 마음을 접었다. 앞으로 그는 엄한 아버지가 되어야 했다. 아들을 자신처럼 바보로 키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