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0화
녹하가 입을 삐죽였다.
“아이는 심열이한테 가르치라고 해. 나도 학식은 별로 없으니 가르치는 건 잘 못 할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가동이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황후 마마의 유모는 글을 모르셨지만, 마마를 얼마나 잘 가르치셨어. 당신이 가르치는 아이도 다르지 않을 거야.”
“어찌 고명 부인에 견줄 수 있겠어. 그분은 얼마나 지혜로운 분이신데.”
가동의 칭찬에 녹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난 그저… 사납기만 하지 딱히 장점도 없는걸.”
“왜 없어.”
가동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더니 진지한 눈을 반짝였다.
“그간 내 행동을 깊이 반성했어. 생각할수록 당신에게 미안해지더라. 불당 일도 그래. 저택을 지은 후로 거의 발길을 들이지 않는 곳이었잖아. 당신이 그곳에서 아이를 위해 예불을 드리면서 묵겠다는 말에 난 그리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었어. 그곳이 얼마나 적막하고 불편한 곳인지는 생각도 못 했어.
당신은 평소에도 예불을 드린 적 없는데, 머릿속에 아이만 가득해서 당신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 당신이 궁에서 묵었을 땐 집안일을 내팽개친다고 원망만 했어. 나한테 집안일을 맡기려는 줄 알고 당신과 말다툼이나 했으니, 난 정말 인간이 덜된 것 같아. 미안해, 녹하야…….”
녹하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이고, 우리 가 대인이 그리 많은 걸 깨우치다니, 철 다 들었네.”
가동이 멋쩍게 웃었다.
“난 모자란 놈이라 당신만 날 감당할 수 있어. 앞으로 두고 봐, 절대 예전처럼 행동하는 일은 없을 거야. 아이가 뭐라고, 어디 부인보다 중요할까…….”
녹하가 얼른 그의 말을 끊었다.
“철들었다고 칭찬해 줬더니 또 엇나가네. 아이는 부모의 심장이나 다름없는데 중요하지 않다니 말이야? 방금 한 말, 심열이가 못 들었으니 다행인 줄 알아. 들었다면 얼마나 상처를 받겠어.”
심열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가동은 말없이 녹하를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아이가 생긴 뒤 그도 당연히 심열과 혼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혼란스러웠고, 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때의 혼돈 속에서 빠져나온 지금, 그는 자신의 마음을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심열은 그저 사내가 예쁜 여인을 바라보는 것에 불과했다. 그는 심열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에겐 오직 녹하뿐이었다. 심열과의 일은 뜻밖의 사고였고, 그녀와 혼인을 하는 것도 그저 안식처를 제공하려는 것일 뿐, 영영 마음은 줄 수 없었다.
심열의 입장에서 이는 너무 불공평했다. 그렇다고 혼인을 하지 않자니… 그의 아이를 낳아 주는 사람에게 도리에 어긋난 일이었다. 휴,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녹하도 옅은 서글픔에 잠겨 있었다. 부부 사이가 다시 좋아졌다고 해도, 심열은 두 사람 사이에 솟은 가시였다. 심열의 배가 제법 부른 탓에 아직 정식 혼사도 치르지 못했다.
그나마 지금 심열과 가동이 함께 있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뒤 혼사를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된다면, 가동은 더 이상 그녀 혼자만의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가동이 그녀를 더 사랑한다고 해도 마음속의 가시는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자신의 부군을 다른 이와 함께 나눌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한들 누굴 탓하겠는가? 결국 아이가 없어서 생긴 문제인 것을.
그날 밤 가동은 유난히 활력이 넘쳤다. 밤새 침대를 엎치락뒤치락하다가 하마터면 녹하의 허리를 부러뜨릴 뻔했다. 녹하는 그간 그가 답답했을 걸 알기에 그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에도 그는 또 뒤치락거리기 시작했다. 녹하는 언짢은 목소리로 그의 손길을 막았다.
“아직도 안 끝났어?”
그녀의 얼굴에 착 붙은 가동이 메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부인, 난 우리 둘의 아이를 낳고 싶어.”
녹하는 별안간 가슴이 쿵 부딪히는 기분에 손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사실, 두 사람은 같은 마음이었다. 그녀라고 어찌 그와 자신의 자식을 갖고 싶지 않을까?
결국 두 사람은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녹하는 황후 마마 곁을 지키는 일이니 그리 문제 될 게 없었지만, 가동은 영구의 꾸지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가동은 개의치 않았다. 영구에게 혼이 날지언정 녹하와 조금이라도 더 침대에 누워 있고 싶었다.
며칠 전부터 조금씩 대화를 주고받긴 했지만 두 사람은 어젯밤 진정으로 가까워졌다. 남녀 사이에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룻밤 사이의 정은 무서운 법이었다. 네 안에 내가, 내 안에 네가 있는 기분은 다시 없을 짜릿함이었다.
그 후, 나란히 입궁한 가동과 녹하는 각각 말과 가마에서 내린 뒤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일터로 향했다.
군대를 엄격히 다스리는 영 대인은 군법을 어긴 자라면 형제애를 나눈 가동이라고 해도 혼을 내는 사람이었다. 막 입을 떼려는데 가동이 봄기운이 가득 담긴 얼굴로 거들먹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축 처져 있던 최근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얼핏 보면 늘 기운 넘치던 예전의 바보 가동이 돌아온 것 같았다. 영구는 꾸짖는 것도 잊고 물었다.
“좋은 일이 있어 보입니다, 가 대인?”
가동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헤헤 웃던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조용히 속삭였다.
“어제 녹하랑 같이 잤어.”
영구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보였다. 그도 가동과 녹하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정말입니까?”
가동은 영구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며 말했다.
“당연히 진짜지!”
말을 마친 그는 부끄러움 반, 거만함 반인 표정으로 목을 꼿꼿이 세웠다. 그렇고 그런 일까진 말하지 않아도 되는 법이었다.
“…….”
가동은 영구가 아무 말도 없자 더 기세등등해져서는 뒤로 물러났다.
“안 혼낼 거면 나 먼저 갈게!”
영구는 쏜살같이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오랜만에 바보 가동이 돌아왔으니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 * *
바람이 들어오자 책상에 놓인 촛불이 흔들리며 방 안에 어지러운 그림자를 남겼다. 심열은 화장대 앞에 앉아 방금 빼낸 머리꽂이를 든 채 금지의 말을 들었다.
“대인께서 좀처럼 아가씨를 보러 오지 않으시네요.”
심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언니가 오시든 대인이 오시든 똑같으니까.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구분할 필요 없지.”
그녀는 머리꽂이를 보석함에 넣어 두었다. 앞으로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기러기가 그려진 이 머리꽂이는 가동이 시장에서 사다 준 것이었다. 그에게 선물을 받은 날부터 늘 머리에 꽂았지만 이제는 넣어 둘 때가 되었다.
“창문 좀 닫아 줘. 바람이 너무 세네.”
그녀가 말했다.
“예, 아가씨.”
금지는 창문을 닫다가 별안간 무언가를 떠올렸다.
“와, 벌써 팔 월이네요. 아가씨가 벌써 다음 달에 해산을 하시다니, 시간이 정말 빠릅니다.”
정말 빨랐다. 심열은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열 달 동안 품은 그녀의 아이가 곧 세상에 나올 텐데, 아이를 본 대인은 그녀의 회임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기뻐할까? 금지는 이불을 정리한 뒤 심열을 부축해서 침대로 데려갔다. 신발을 대신 벗겨 주던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발이 조금 부은 것 같습니다.”
“괜찮아.”
심열이 말했다.
“아마 오래 서 있어서 그럴 거야.”
금지가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부인께 고해야겠습니다.”
옆에서 향을 피우던 시녀가 말했다.
“부인께서는 저택을 비우셨습니다. 외숙부님 댁에 경사가 있어 잔치를 준비하러 가셨거든요. 오늘은 돌아오지 않으실 겁니다.”
금지가 말했다.
“그럼 대인께 말씀드려야겠어요.”
심열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쳐 앉아 자신의 발을 바라보았다.
“너무 늦었으니 가지 마. 내일 아침 관리인에게 말하면 되지.”
금지는 말을 듣지 않았다. 부인이 그녀에게 신신당부를 한 탓이었다. 출산을 앞둔 심열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전부 큰일이니, 절대 소홀히 넘겨선 안 된다는 당부였다.
금지는 급히 안채로 가 가동에게 이 일을 고했다. 막 권법 수련을 마친 가동은 땀을 흥건히 흘리고 있었다. 매지가 수건을 가져와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금지의 말을 듣던 가동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마마께서 태자를 낳으실 때도 그렇게 발이 부으시더라고. 손가락으로 누르면 살이 움푹 파일 정도였어. 위 태의도 만삭일 땐 자주 있는 증상이라고 했고. 별일 아니니 아가씨한테도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예, 소인도 걱정이 되어 대인을 찾아온 것입니다. 하면 아가씨께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겠습니다.”
가동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니, 금지는 예를 갖추고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장막이 내려진 침대에 심열이 누워 있었다. 금지는 잠시 고민했지만 그녀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심열의 머리를 빗겨주던 금지가 어젯밤 일을 슬쩍 꺼냈다.
“아가씨, 대인께서 만삭일 땐 늘 있는 일이니 별일 아닐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심열이 선선히 말했다.
“응, 내가 봐도 별일 아니야.”
심열은 손에 빗을 쥔 채 손가락으로 빗 표면을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대인께서 더 하신 말씀은 없고?”
“황후 마마께서 태자 전하를 낳으실 때에도 그러했다고 하셨어요. 손가락으로 누르면 움푹 파일 정도였대요. 그러니 아가씨도 마음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희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껏 욕심을 부린 적이 없기에 실망할 일도 없었다. 가 대인은 심열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땐 잔뜩 긴장하고 들떠 돌아다니더니, 지금은 그녀를 피하고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하루빨리 아이를 낳아 끝을 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 *
녹하의 오라버니는 고지식한 데다 가난한 집안에, 본인도 그리 걸출한 인재가 아니라서 장가를 들지 못했다. 훗날 여동생과 매부의 후광 덕에 혼담을 꺼내러 찾아오는 이가 생겨났다. 하지만 부인이 그리 단명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혼사를 치른 지 두 해도 지나지 않아 부인을 떠나 보낸 그는 또 다른 신붓감을 구해 오늘 혼사를 치르기로 했다.
녹하에게 형제라고는 오라버니 한 명뿐이었다. 덕분에 집안의 체면치레는 대부분 녹하가 대신했다. 여인이긴 해도 관직에 있는 데다 황후 마마가 아끼는 사람이니 누구도 그녀를 깔보지 못했다.
가동도 아침 일찍 찾아와 손님 접대를 도왔다. 두 사람 덕분에 찾아온 손님들 중에는 명성이 자자한 이들도 있었다. 이번 혼사는 체면이 꽤 설 만큼 떠들썩하게 치러졌다.
두 사람은 저녁을 먹은 뒤 집으로 돌아갔다. 가동은 말을 타지 않고 녹하와 함께 가마에 올라 돌아오는 길 내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남의 혼사 얘길 마친 가동은 지나가는 말로 심열의 발이 붓는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녹하는 그의 말에 원망이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직접 가서 보지도 않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