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679)화 (678/1,192)

제679화

진씨가 저택을 떠난 뒤, 심열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녹하로서는 상당히 뜻밖이었다. 결국 그녀는 심열을 찾아가 진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진씨가 없어서 불편하진 않아?”

심열이 웃으며 말했다.

“불편하긴요. 진씨는 제 곁에 가장 오래 있던 사람이다 보니 조금 거만하게 굴었던 게 사실이에요. 전 성격이 워낙 물러 쓴소리도 제대로 못하였지요. 몇 차례나 기회를 주었지만 잘못을 거듭 저지르며 저택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언니가 잘 내보내신 거죠.”

녹하는 심열을 유심히 관찰했다. 혹여 속마음과 다른 말을 하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그러나 심열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고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덕분에 녹하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녹하가 돌아온 뒤로 가씨 저택은 다시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구 설쳐 대며 일을 저지르는 진씨가 사라지니 평온함을 되찾은 것이다.

천천히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그동안 가동과 녹하는 한 처소에서 지냈지만 각방을 썼다. 녹하는 여전히 가동을 피하고 싶었지만, 같은 공간에 머무니 아예 못 보긴 힘들었다. 두 사람은 마주치더라도 서로의 얼굴을 힐끔 바라본 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가동에겐 이혼 얘기가 나왔던 때보다는 훨씬 나아진 상황이었다. 그가 묵는 방에서 창문을 열면 녹하의 방이 보였다. 이따금 그곳의 창문도 열려 있었던 터라 그는 그녀가 오가는 모습을 보거나 시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워낙 당찬 그녀는 말도 빨랐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또르르 굴러가는 목소리가 어찌나 또랑또랑하고 듣기 좋은지, 그는 창문 옆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넋을 놓곤 했다.

종종 녹하도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녹하와 시선이 마주칠 때면 그의 마음을 조이고 있는 끈이 파르르 떨렸다. 가동은 무어라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급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가동은 궁에서 머무는 일이 극히 드물었고, 일을 마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녹하가 매일 심열을 보러 가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심열을 찾아가지 않았다. 어쨌든 녹하가 그녀를 잘 돌봐줄 테니.

심열이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부터 그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밤낮으로 아이만 생각했다. 아이를 제외한 것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하나를 챙기느라 다른 것들은 전부 놓친 듯한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요즘 들어 그는 허공에 떠 있는 사람처럼 불안하고, 두렵고, 걱정스러웠다. 까닭 없이 화까지 나는 탓에 어느 날은 태자에게 눈을 부릅뜨기도 했다. 그와 달리 어른스러웠던 태자는 동정 어린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사부님, 녹하 고고가 더는 사부님을 원치 않는대요?”

태자의 말에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녹하가 정말 그와 이혼할 생각이라면 그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녹하는 이혼이라는 말을 딱 한 번밖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에겐 그조차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당시에는 분노했지만, 지금은 막막한 공포심이 그를 휘감았다. 태자의 말처럼 녹하가 정말 그를 원치 않는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고, 그와 한 처소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는 이제야 발을 땅에 디딘 것처럼 안정감을 느꼈다. 더는 겁이 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녀가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는 모습, 책상 앞에 앉아 수를 놓는 모습, 허리를 숙여 초의 심지를 자르는 모습, 손수건을 쥔 채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녀가 무얼 하든, 가동은 그녀를 바라볼 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오직 그녀가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한밤중에 그는 별안간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겁에 질린 그는 신발을 끌며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비틀비틀 달려 나갔다. 뒤따라 깬 매지와 석동은 서둘러 등잔불을 켠 뒤,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매지가 들고 있는 등잔불을 가져와 슬그머니 앞방으로 향했다. 침대 장막을 걷으니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가동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조금 전, 그녀가 짐을 꾸려 집을 떠나는 꿈을 꾸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돌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그 덕분에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현실이었다면 그녀를 붙잡고 떠나지 말라며 애걸복걸하지 않겠는가.

서로 죽고 못 살았던 두 사람이었건만… 지금은 어찌 이런 사이가 되었을까. 아이 때문이라면 그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이 없이는 살 수 있지만, 녹하 없인 절대 살 수 없었다. 그랬던 부부가 아이 때문에 이렇게 되다니 정말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그녀 앞을 어슬렁거렸다. 그녀와 몇 마디라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용기가 나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은 목구멍 뒤로 삼켜야 했다.

그는 결국 영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영구는 박장대소를 터뜨리더니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가 대인, 녹하를 또 한번 쫓아다닐 작정이십니까?”

가동은 꿈에서 깬 사람처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못 할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를 힘들게 하고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마땅히 그녀의 마음을, 아니 모든 걸 예전 그대로 되돌려야 했다.

그는 더 자주 그녀 앞을 서성였고, 어떻게든 함께 아침을 먹고 입궁했다. 그녀는 가마에, 그는 말에 탄 채 나란히 나아갔다. 가마꾼들은 일정한 속도로 걸음을 내디뎠고 말발굽 소리도 그 속도에 맞춰 울려 퍼졌다.

녹하는 종종 발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는데, 시선이 맞닿기라도 하면 둘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녀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그의 얼굴엔 이유 모를 홍조가 남아 있었다.

혼인 전, 그가 녹하를 쫓아다닐 때를 생각해 보자. 그는 늘 히죽거리며 생떼를 썼고 그럴 때마다 녹하는 살벌한 얼굴로 무력을 썼다. 얼마나 시끌벅적한 연애였던지 주변 사람들까지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두 사람은 이미 부부였지만 예전보다 더 부끄러워했고 자유분방했던 표현도 내성적으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이 느낌도 나쁘진 않았다. 조용히 그녀의 마음 속에 들어가 싹을 틔우고, 천천히 찬란한 꽃을 피울 테니까.

저 멀리 복도에 서 있는 녹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서둘러 방금 사 온 꽃다발을 그녀의 창가에 올려 두었다.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녹하가 물었다.

“뭐 하는 거야?”

“향기가 좋아서. 창문만 열면 바로 맡을 수 있을 거야. 향을 피우는 것보다 더 좋을걸.”

녹하가 말했다.

“심열이한테도 사 줘. 꽃을 좋아하니까.”

그가 대충 대꾸했다.

“관리인한테 시킬게.”

녹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한 번 웃더니 몸을 틀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그녀를 따라 들어갔고, 품에서 절인 과일 한 봉지를 꺼냈다.

“당신이 좋아하는 여방재如芳齋에서 사 온 거야.”

녹하는 봉지를 건네받고 아무렇게나 탁자에 올려놓았다.

“참으로 세심하시네요, 대인.”

그는 그녀의 반응이 조금 실망스러웠다.

“한번 맛보지 그래?”

녹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었나 본데, 작년에 생긴 치통 때문에 이젠 절인 과일 안 먹어.”

가동이 입을 쩍 벌렸다.

“…깜빡했네.”

이내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잊지 않을게.”

앞으론 그 무엇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 또한 그를 바라보았다. 맞닿은 두 사람의 시선은 한참이나 서로를 휘감았다. 결국 녹하가 두 볼을 붉히더니 봉지에서 자그마한 과일 조각을 꺼내 입에 넣으려 했다. 가동이 서둘러 그녀를 말렸다.

“이 아프다면서 어찌 먹으려고?”

“한동안 안 먹었으니까 맛이라도 좀 보려고.”

가동은 고개를 숙여 그녀가 들고 있는 과일을 입에 넣더니, 다시 살짝 고개를 들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렇게 맛보면 이는 안 아플 거야.”

옆에 있던 시녀들은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도망쳤다. 부끄러웠던 녹하는 있는 힘껏 그를 밀쳤지만, 그는 무관이었다. 오히려 그녀를 품에 안고 더 뜨거운 입맞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차례의 입맞춤으로 두 사람의 냉전은 끝이 났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제대로 바라보진 못했다. 한참 뒤, 가동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부인.”

녹하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채였다. 한 번에 너무나도 다양한 감정이 얼기설기 뒤엉켜 자라나고 있었다. 꼭 마음속의 빛이 온몸으로 뻗어 나가는 기분이었다. 가동이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부인.”

그녀는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눈망울로 물었다.

“왜?”

“배고파.”

“하인들한테 밥을 차려 달라고 하면 되잖아.”

밖이 황혼으로 물들기 시작한 걸 보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밥을 다 먹은 뒤에도 가동은 방에 머물러 있었다. 가만히 앉아 차를 연거푸 마시는 그를 지켜보던 매지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대인, 오늘 어디에서 주무실 생각이십니까?”

가동은 녹하를 힐끔거리다 물었다.

“부인, 오늘 나 어디에서 잘까?”

녹하가 말했다.

“저택이 이렇게 큰데 대인이 자고 싶은 데서 자세요.”

그 말에 가동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웃었다.

“그럼 여기서 잘게.”

석동은 그를 놀릴 생각으로 녹하에게 물었다.

“부인, 대인께서 이곳을 쓰신다고 하시니 부인께서 뒷방을 쓰시겠습니까?”

가동이 곧장 눈을 부라렸다.

“이런 눈치 없는 노비 같으니! 본 대인과 부인의 사이를 망치려 들 셈인 거야?”

두 시녀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고, 녹하도 고개를 숙인 채 미소를 지었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세 사람의 반응에 가동은 그제야 장난임을 알아차렸다. 그가 매지에게 말했다.

“가서 내 짐을 다 가져와. 오늘부터 여기서 잘 거니까.”

매지는 대답을 한 뒤 석동에게 눈짓을 보냈다.

“짐이 많으니 언니도 좀 도와줘요.”

석동은 그녀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나가자, 가동은 녹하의 어깨를 감쌌다.

“녹하야, 내가…….”

“지난 일은 말할 거 없어.”

녹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잘못했으니까.”

“아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아이만 생각하느라 당신 기분은 생각하지 못했어. 속 시원해질 때까지 날 때려.”

녹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다 큰 사람이 아직도 아이 같으면 어떡해. 곧 아버지가 될 텐데. 걱정 마. 앞으로 내가 때릴 일은 없을 거야.”

“난 나이만 먹었지, 머리는 그대로야. 이렇게 오랜 시간 날 참아 준 건 녹하 너밖에 없어.”

가동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아이든 나든 잘못을 저지르면 당신이 혼내 줘. 당신이 엄하게 가르쳐 줘야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을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