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8화
황후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그 말은 함부로 꺼내선 안 돼. 얼마나 감정이 상하는 말인데.”
월규 또한 늘 녹하 편이었지만, 그래도 녹하와 가동이 이혼하는 건 싫었다. 가 대인이 조금 모자라긴 해도 사람은 제법 괜찮지 않은가. 누구보다는 훨씬 더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녹하를 타일렀다. 꼭 궁 밖의 이야기꾼처럼 타이를 때마다 장난이 섞이더니 결국 녹하를 웃게 하는 데 성공했고 더는 이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녹하도 충동적으로 한 말이었다. 냉정을 되찾고 나니 뒤늦게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녀와 가동은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달려가듯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냉전 상태에 돌입했다. 마주쳐도 인사도 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을 각각 타이르는 수밖에 없었다. 영구는 가동을 타일렀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녹하가 머리를 조아리고 죄를 뉘우쳐야 직성이 풀리겠습니까?”
가동은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다. 이혼이란 말을 꺼냈다니……! 그에게 마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던가. 양심도 없는 여인 같으니! 그동안 그가 얼마나 맞고 얼마나 욕을 얻어먹었는데. 심지어 궁에서마저 체면이 다 깎이도록 그녀에게 쫓겨 도망치기 일쑤였다. 다 그녀를 은애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지, 그가 정말 그녀를 이기지 못해서였을까.
황후는 녹하를 타일렀다.
“어서 돌아가요. 부부는 한집에서 살아야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요.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오면 그땐 정말 늦어요.”
월규도 거들었다.
“이렇게 계속 집을 비우면 언니가 제 발로 자리를 내주는 꼴이잖아요?”
기홍은 현명한 사람이었기에 가장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타일렀다.
“녹하야, 어서 돌아가. 네가 없는 동안 가 대인은 돈을 함부로 썼을 거야. 집안일을 돌보지 않던 사람이니, 쌀이나 땔감이 얼마인지도 모르잖아. 가 대인의 녹봉으로 월말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고.”
녹하는 묵묵히 듣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 일을 마친 그녀는 짐을 싸서 석동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녹하를 발견한 관리인은 구원의 손길을 잡은 듯 감격한 모습이었다.
“아이고, 부인,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조금만 늦게 돌아오셨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집안이 난장판입니다. 대인께서는 집안일에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소인도 처리할 일이 생길 때마다 누굴 찾아가 여쭤야 하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잘 돌아오셨습니다.”
녹하는 커다란 멀구슬나무 의자에 앉아 관리인의 보고를 들었다. 관리가 말을 마치자 그녀는 경중을 따져 하나하나 일을 처리했다.
필요한 살림살이를 사고, 선물을 보내야 하는 곳에는 종전처럼 격에 맞는 선물을 보냈다. 또 집안 어르신들의 보양품이나 약재, 옷감 등도 하인을 시켜 가져다 드렸다. 마지막으로 말썽을 피운 이들의 한 달 봉급을 반으로 줄였다.
지시를 받은 관리인은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역시 누군가 결정을 내려 주니 편했다. 안주인의 지시에 맞게 처리만 하면 그만 아닌가. 이후 녹하는 밥을 먹은 뒤 심열을 보러 갔다. 그녀가 오랜 시간 집을 비운 탓에 혹여 다른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심열의 배는 그전보다 더 불러 있었고 얼굴도 더욱 동그래졌다. 그녀는 녹하를 보자마자 기뻐하며 서둘러 예를 갖췄다.
“언니,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궁의 급한 일은 다 끝내신 겁니까?”
녹하는 그녀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예를 갖출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응, 바쁜 건 다 끝냈어. 내가 집을 비운 동안 부족한 건 없었고?”
“없었습니다.”
심열은 배에 손을 가져가더니 가볍게 어루만지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저 배가 점점 더 부르니 몸이 무거울 뿐이지요. 이젠 밖에 나가 움직이는 것도 힘이 듭니다.”
“그래도 조금 움직이는 게 더 좋을 텐데.”
녹하가 걱정스레 말했다.
“마마께서 첫 아이를 회임하셨을 때 황상께선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셨거든. 그랬다가 출산 때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몰라. 황상마저도 거의 혼이 나가실 정도였으니까.”
심열은 그녀의 말에 조금 겁이 났다.
“진씨도 제게 많이 움직이라고 말은 합니다……. 제가 게으름을 피우고 말았네요. 내일부터는 나가서 좀 걸어볼게요.”
“조급하게 서두를 건 없어. 어쨌든 아이가 태어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녹하는 그녀가 잘 지내는 모습에 마음을 놓았다.
“그럼 어서 쉬어, 난 그만 가 볼게.”
심열은 조금 망설이다 그녀를 불렀다.
“언니, 대인께서…….”
녹하가 바로 물었다.
“대인이 왜?”
“대인께서도 며칠간 저택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들었습니다. 일이 바쁘신 것인지요?”
녹하는 물론 가동이 궁에서 지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열이 걱정하는 건 싫었다.
“황상께서 일을 맡기셨나 봐. 가끔 며칠씩 성 밖에서 지낼 때도 있어.”
심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군요. 제가 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한 줄 알았어요. 요즘 좀 이상하셔서요. 말씀도 통 안 하시고. 왜 그런지 물으면 업무가 너무 바빠 피곤해서 그렇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일이 많을 테지. 그러니 심열이 너는 걱정하지 마. 아이를 잘 돌보는 게 우선이니까.”
녹하의 화는 이미 풀려 있었다. 그녀는 황후와 월규, 기홍이 했던 말도 가슴에 새겨 두었다. 가동과의 일보단 심열을 잘 돌보는 게 우선이었다. 가동과 이혼을 하지 않은 이상, 그녀는 여전히 가씨 집안의 정실부인이었다. 그렇다면 부인의 책임을 다해 무사히 아이가 태어나게끔 도와야 했다.
처소로 돌아오니 뜻밖에도 가동이 돌아와 있었다. 가동은 조금 민망했는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돌아왔네.”
녹하가 싸늘히 말했다.
“대인도 돌아온 줄은 몰랐네. 난 다시 불당으로 갈게.”
가동이 서둘러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 적막한 곳에서 어찌 지낸다는 거야. 당신이 이 방에서 묵어. 난, 난 곁채에서 잘게.”
녹하가 묵묵히 서 있자 석동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매지야, 멍하니 뭐 하고 있어. 어서 곁채부터 정리해야지. 대인께서 오늘 곁채에서 주무신다잖아.”
매지는 곧장 그리하겠다고 대꾸하고는 밖으로 향했다. 가동은 녹하가 저를 상대해 주지 않으니 조용히 곁채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때, 진씨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가동은 혹 심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발걸음을 멈추었다. 진씨는 황급히 예를 갖춘 뒤, 녹하에게 말했다.
“부인, 어째서 이번 달 봉급을 반이나 깎으신 겁니까?”
녹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저택을 비운 동안 말썽을 일으킨 모든 이들의 봉급을 깎았네. 자네의 봉급만 깎은 게 아니야.”
“전 억울합니다.”
진씨가 말했다.
“전 말썽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일부러 트집을 잡은 것이지요! 전 정말 억울합니다.”
진씨가 가동을 보며 하소연했다.
“대인, 대인께서는 다 아시지 않습니까? 부인께서 안 계시니 매지 아가씨가 매일같이 찾아와 소인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소인은 지금껏 본분을 지키며 심열 아가씨를 모셨는데, 매지 아가씨 무리가 자꾸만 찾아와 말썽을 피운 것입니다. 소인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가동이 물었다.
“대체 그 애들이 왜 시비를 걸었단 말인가?”
“그것은…….”
진씨는 쭈뼛거리다 녹하를 바라보았다.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연히 들은 바로는 누군가 그리하라고 지시했다고…….”
그간 별의별 일을 다 겪은 녹하였지만, 이렇게까지 파렴치한 인간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저택을 떠나자마자 곧장 심열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린 게 틀림없었다. 권력을 전부 제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자신이 돌아왔으니 차질이 생긴 거겠지. 이제 녹하를 몰아내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리려는 수작이 뻔했다.
이런 악랄한 심보를 가진 부인을 어찌 저택에 둘 수 있단 말인가! 녹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 가동이 어찌 대처하는지 지켜보았다. 안색이 어두워진 가동이 물었다.
“누구의 지시를 받았단 말인가?”
“매, 매지 아가씨라고 했습니다.”
“매지가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진씨는 재빨리 녹하를 한 차례 훑으며 암시를 주었다. 녹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내가 매지에게 시킨 일이다?”
진씨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종의 묵인이었다. 녹하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석동에게 관리인을 불러오라고 분부했다.
“진씨는 오늘부로 저택을 나가게. 우리 저택엔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둘 수 없네. 그런 건 다른 집에 가서 실컷 하게.”
진씨는 순간 넋을 놓았다. 녹하가 면전에서 자신을 내쫓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응당 해명이 우선 아니던가? 아직도 할 말이 산더미처럼 남았거늘.
“대인.”
그녀는 서둘러 가동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이 대체 무얼 잘못했다고 이리 내쫓으신단 말입니까? 소인은 진심으로 심열 아가씨를 모신 죄밖에 없습니다. 소인과 심열 아가씨는 모녀의 정을 나눈 것만큼이나 각별한 사이입니다.
소인이 떠나면 누가 소인처럼 정성을 다해 아가씨를 모신단 말입니까? 대인, 부디 대인께서 해결해 주십시오. 대인, 소인이 떠나면 가여운 심열 아가씨 곁엔 진심을 다하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녀가 눈물 콧물을 쏟으며 울부짖자 가동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녹하가 마침 도착한 관리인을 바라보았다.
“진씨의 봉급을 계산해 주고 저택에서 내보내게. 더는 심열 아가씨를 성가시게 하지 못하게 물건은 다른 시녀에게 챙기라고 분부하고. 혹여 떠나지 않겠다고 난리를 치거든 하인들을 불러 끌어내게.”
마음이 조급해진 진씨는 가동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대인, 부디 소인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심열 아가씨 곁엔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가씨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선량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그 음흉한 마음까진 막기 어려운 법입니다. 대인, 부디 소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심열 아가씨 입장에서… 그리고 배 속에 있는 아기씨 입장에서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녹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망할 여편네가 마지막까지 수작을 부리다니. 그녀가 관리인에게 호통쳤다.
“멀뚱히 서서 무얼 하는 겐가. 어서 데려가지 않고!”
관리인이 눈짓을 보내자 하인 둘이 진씨를 끌어냈다. 가동이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진씨는 아직까지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있었다.
“대인,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대인…….”
“그만하거라!”
안색이 급변한 가동은 매섭게 호통을 치더니 손가락으로 진씨를 가리켰다.
“한 번만 더 헛소리를 지껄였다간 네 망할 따귀를 날려 버릴 테니!”
진씨는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목이 컥 막혀 숨도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