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6화
가동의 외침에 점박이는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는지 발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뾰족한 발톱이 입가를 찌르자 그는 고통스러움에 숨을 들이켰다. 다행히 표범 우리 안에서 그의 비명을 들은 황후가 황급히 다가와 소리를 질렀고, 점박이는 그제야 그를 놓아주었다. 가여운 몰골이 된 가동이 비척비척 일어나 먼지를 털었다.
“마마, 제때 와 주셔서 다행히 화는 면했습니다.”
황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요. 점박이는 그저 장난을 치는 것뿐이에요.”
가동이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점박이가 신에게 원한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황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원한이요?”
“이제 태자께서 신과 더 가까이 지내시니 질투가 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신이 올 때마다 보복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점박이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앙심을 품고 보복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황후가 박장대소를 터뜨리더니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마마를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요?”
“헤헤, 사실 마마가 아니라 녹하를 찾아왔습니다.”
“녹하는 여기 없어요.”
“예?”
가동이 이를 갈았다.
“월규… 가만 안 둘 테야.”
황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월규는 잘못 없어요. 녹하와 함께 나왔으니 저와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마마, 그럼 녹하는 어디로 갔습니까?”
황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저도 모르죠. 매일 할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대인의 부인까지 돌봐야 한단 말이에요?”
가동은 발걸음을 돌려 정원을 나서려 했다. 점박이는 황후의 발밑에 엎드려 호시탐탐 그를 노리고 있었다. 조금 무서워진 그는 황후에게 물었다.
“마마, 안 나가실 겁니까?”
“좀 더 있을 거예요. 먼저 가요.”
“하지만 점, 점박이가 자꾸 절 노려봅니다.”
“괜찮아요. 제가 보고 있으니까요. 어서 가요.”
가동이 움직이자 점박이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동은 서둘러 움직임을 멈췄다.
“마마, 보십시오…….”
황후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뭘 그리 꾸물대는 거예요. 어서 가요. 점박이는 이제 힘들어서 놀 기운도 없다고요. 어서 가요. 이품 시위가 그리 담이 작다니, 남들이 들으면 배꼽 빠지게 웃겠어요.”
그녀의 놀림에 가동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큰 보폭으로 꾸물대며 돌아가던 그는 다시 뒤를 바라보았다. 점박이는 역시나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역시 황후 앞에서는 말썽을 피우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뒤에서 휙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점박이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놀란 그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다행히 점박이가 그를 덮치기 전, 황후가 호통을 쳤다. 점박이가 그녀에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가동은 땀을 닦으며 문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황후는 걸음아 나 살려라 내빼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허리를 펴지 못할 만큼 웃음을 터뜨렸다.
문 앞에 도착한 가동은 옷매무시를 정돈하고 침착한 얼굴로 보초에게 문을 열라고 분부했다. 보초가 그를 놀렸다.
“대인, 점박이와 좀 더 놀아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동이 애써 코웃음을 쳤다.
“짐승이랑 노는 게 뭐 그리 재미있다고.”
보초가 그의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저기 옵니다.”
그 순간, 가동은 꽁무니에 불이 붙은 것처럼 재빨리 뛰어나왔다.
“어서, 어서, 문 잠가.”
뒤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화가 난 가동은 보초에게 주먹을 날렸다.
“감히 본 대인을 가지고 놀다니! 냉궁으로 옮기고 싶은 것이더냐.”
사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후궁 자체에 사람이 없으니 궁은 전부 냉궁이나 마찬가지였다.
* * *
녹하가 보따리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자 월규가 물었다.
“언니, 수본繡本(수를 놓기 위하여 어떤 모양을 종이나 헝겊 따위에 그려 놓은 도안)을 찾은 거예요?”
“응, 겨우 찾았어. 이따 수를 놓을 거야.”
월규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까요? 듣고 화내시면 안 돼요.”
“무슨 일?”
녹하가 말했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마마께서 나무라실 테니 내가 화낼 필요도 없지.”
“마마께 말씀드리면 아마 칭찬하실걸요.”
월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가 대인을 속여서 표범 정원으로 보냈습니다.”
녹하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너 이 계집애. 점박이가 대인만 보면 심하게 장난을 치는 걸 알면서도 어찌…….”
“언니 대신 분풀이 좀 했어요.”
월규가 말했다.
“그렇게 기력이 넘치던 사람이 지금은 말수도 줄고 쇠약해 보이기까지 한다고요. 말 안 해도 언니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가는지 다 알아요. 저번에 가 대인이 마마께 부탁해 서양 만화경을 가져가셨지요. 그게 언니한테 간 게 아니라면서요?
아이를 가졌다고 그리 살살거리며 비위를 맞추다니. 언니가 얼마나 노력하고 고생했는진 다 잊어버리셨대요? 아무리 기분이 좋다 한들 언니의 기분도 생각해야죠. 아이만 있으면 부인도 필요 없대요?”
“그만해.”
녹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인한테 아이는 보물이나 마찬가지야. 기뻐하게 내버려 둬.”
그때, 가동이 안으로 들어왔다. 월규에게 눈을 부릅떠 보인 그는 이내 녹하의 비위를 맞춰 주려는 듯 활짝 웃었다.
“어디 갔었어?”
녹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보따리에 있는 수본을 정리했다. 가동이 멋쩍게 웃으며 코를 만지작거렸다.
“침수감에 다녀온 거야? 이 수본 되게 예쁘다. 누구 옷에 수를 놓아 드리게? 어제부터 생각한 건데 아이 옷을 슬슬 준비해야 할 거 같아. 당신이 직접 만들어 준다면 바깥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예쁠 텐데.”
화가 치솟은 월규는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녹하의 눈짓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녹하가 고개를 들어 가동을 바라보았다.
“그 일 때문에 찾아온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대인. 아이의 옷들은 다 잘 챙겨 놓을 테니까.”
그녀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가동은 조금 부끄러웠다.
“이 일 때문에 온 게 아니라… 그게… 당신한테 볼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 말해 봐.”
가동은 월규에게 자리 좀 비켜 달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월규는 끝까지 모른 척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녹하에게 말했다.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하자.”
모처럼 그가 제대로 얘기를 하자고 하니, 녹하도 일단 들어 볼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가동은 그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막상 녹하를 마주하니 머리가 하얗게 빈 듯했다. 그는 손만 만지작거리는 그를 기다리고 있자니, 녹하는 조금 짜증이 났다.
“할 말 없으면 갈게. 조금 바빠서 말이야.”
“그, 그게.”
가동이 얼른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진씨를 내쫓으려 했다며. 진씨는 심열이 저택 밖에서 지낼 때부터 곁을 지킨 사람이잖아. 측근을 갑자기 바꾸면 심열이도 익숙하지 않을 거야. 나도 당신이 화가 났다는 거 알아. 화가 나면 나한테 풀어.
당신도 알지? 난 지금껏 맞거나 욕을 먹어도 늘 고분고분했잖아. 심열이 쪽 일은 당신이 많이 이해해 줘. 배 속에 아이가 있는데 만,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안, 안 되잖아…….”
그의 말은 녹하의 마음을 천천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녀는 별안간 자신이 제대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로서 오랜 시간을 함께했는데, 그녀를 이런 식으로 볼 줄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화내지 말고.”
가동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당신이 무얼 하든 난 다 이해할 수 있어. 다만…….”
녹하가 그의 말을 끊고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내가 뭘 했는데?”
“그, 그러니까 지난번에 그 일 말이야. 나도 알아. 당신이 그저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는 걸. 아, 아이를 정말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잖아…….”
그 순간, 녹하는 얼어붙은 가슴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했다.
“심열이가 복통을 앓았던 얘길 하는 거야? 그게 내가 한 짓이라고?”
가동은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맺히자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난 안 믿지…….”
“왜 안 믿는데?”
그 모습에 녹하는 화를 내기는커녕 웃음짓기 시작했다.
“난 원래부터 사납고 거슬리는 건 못 보는 사람이잖아. 그런 일을 못 할 것도 없지. 내가 했으면 또 어떻고? 날 때릴 거야? 아니면 날 내쫓을 거야?”
가동이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녹하야, 저, 정말 네가 한 짓이야?”
“그걸 꼭 물어봐야 알아?”
씁쓸함이 울컥 올라왔지만, 녹하는 겨우 억눌렀다.
“이미 내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가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럼 녹하 네가 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물론 아니라면 좋겠지만, 그녀가 했다고 해도 놀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괜한 착각으로 녹하가 억울할 일은 없어야 했다. 그때, 녹하의 입가에 처연한 웃음이 맺혔다.
“내가 한 게 그리 중요해?”
그녀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에게 너무나도 실망한 나머지,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다. 녹하의 쓸쓸한 뒷모습을 마주하자 가동은 별안간 가슴을 찔린 듯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녹하야.”
녹하는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쳤다.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평정심을 되찾은 후였다.
“요즘 일이 많아서 당분간 궁에서 지낼게. 저택 일은 당신이 알아서 처리해.”
그녀는 이제 무슨 일이 있든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괜한 오명을 더 얻고 싶지 않았다. 멀어지는 녹하의 뒤에서, 가동은 낙담한 몰골로 넋이 빠져 있었다. 녹하가 어찌 이리 변했단 말인가…….
그녀를 뒤쫓고 싶었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그들 사이에 벽이 생겨났고, 그 벽 너머로 녹하가 천천히 멀어지는 듯했다. 몹시도, 불쾌했다. 무엇보다 예전처럼 그녀 앞에서 무턱대고 히죽거리거나 거리낌 없이 굴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