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4화
석동은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가슴이 시큰거리다 못해 화가 났다.
“부인께서 안 계셨다면 대인이 이 큰 집을 관리할 수 있으셨겠습니까? 부인께서 얼마나 힘들게 돌보신 건데, 고마움도 모르시고 이렇게 푸대접을 하시다니요. 정말 이렇게까지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분은 또 없을 겁니다.”
녹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주인을 비난해선 안 돼.”
녹하와 성격이 비슷한 석동은 움츠러들지 않고 대꾸했다.
“소인의 주인은 부인 한 분이십니다.”
녹하가 그녀를 놀렸다.
“이런 성격으로 어찌 시종을 하겠다는 것이야. 주인을 해야지. 기분이 안 좋으면 뒤에서 주인의 흉이나 보고 말이야.”
“부인, 소인은 그저 부인 생각에 속이 상해서 그런 것입니다.”
녹하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런 일은 아주 흔하지. 조정의 일품, 이품, 삼품 고관들만 봐도 첩이 서너 명은 되잖아. 우리 집 대인은 처음 첩을 들이는 것이니 이미 훌륭한 편이지. 게다가 심열이는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들어오기도 했고. 내가 어진 아내가 되려면 남을 포용할 수 있는 도량을 가져야 해.
게다가 심열이는 좋은 사람이잖아. 얼굴도 예쁘고 똑똑하고, 재능도 많고, 성격도 온화하니까. 사실 심열이가 가 부인에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 성질이 사납고 괴팍한 나랑은 온화한 심열이가 낫지.
대인은 임안성의 대표적인 공처가인데, 난 늘 대인의 체면을 깎고 울긋불긋해진 얼굴로 쫓아내서 남들 비웃음이나 사게 했어.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분명 원망이 쌓였을 거야. 그러다 심열처럼 온순하고 따뜻한 사람을 만났으니 마음이 기울었을 테지. 정말 당연한 거야. 다만…….”
녹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대인이 첩을 들이길 바랐어. 대인이 아이를 원하니 첩을 들여야 합당하지. 가씨 집안 향불이 끊기면 내가 죄인이 되지 않겠어? 그래도 대인의 마음속에 내가 있다면 아이를 몇이나 낳든 예전처럼 지낼 수 있어. 아무것도 변치 않고 말이야. 다만 지금은 내 마음이…….”
평소 제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주인이었다. 그런 주인에게서 흘러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바늘을 토하는 것 같았다. 석동은 그녀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을 붉힌 채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부인, 그만하시어요. 부인께서 속상하신 건 소인도 잘 압니다. 정말 그렇게 되거든, 불당에 머무르지 마시고 저택을 떠나십시오. 전 부인과 함께 갈 것입니다. 매지도 분명 함께할 것이고요.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라도 편하죠.”
녹하는 한참 말이 없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나 혼자 생각이 너무 많았는지도 몰라. 내가 불당에서 묵는 동안 대인이 심열의 처소에서 묵지도 않았는데. 적어도 아직까지는 날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다들 대인을 아무 생각 없는 바보라고 하더니 아마 여기까진 생각 못 했나 봐.”
석동이 코웃음을 쳤다.
“날마다 심열 아가씨의 처소에서 식사도 드시고 산책도 하시잖습니까. 남들 눈엔 여지없이 서로 은애하는 부부처럼 보입니다. 부인께서 불당에 오신 지가 언제인데, 이제껏 찾아오지도 않으셨습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으신 거라면 그 쓸모없는 머리를 좀 바꾸시든가요.”
녹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떤 머리로 바꾸지, 돼지머리? 됐어, 졸리다. 너도 어서 자.”
막 침대 옆으로 걸어가는데, 밖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문을 두드렸다.
“부인, 부인, 어서 심열 아가씨께 와 보시어요. 복통이 너무 심합니다!”
그 외침에 녹하의 잠이 곧장 달아났다. 이윽고 한 여종이 뛰어 들어와 다급하게 고했다.
“부인, 심열 아가씨가 복통이 너무 심합니다. 어서 가서 봐 주시어요.”
녹하는 서둘러 옷을 걸치고 밖으로 향했다.
“의원은 부른 것이냐? 대인은?”
“관리인께서 의원을 부를 하인을 보냈습니다. 대인께서도 오셨고요. 대인께선 너무 당황하시어 넋이 나가신 채 부인만 찾으십니다.”
녹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 대인은 늘 이런 식이었다. 황상의 명을 처리할 땐 혼자서도 침착히 해냈지만, 그 외의 일은 늘 그녀부터 찾았다. 몇 년간 그녀에게 의지하던 게 습관이 된 탓이었다.
심열의 방에 들어선 순간, 녹하는 흠칫 놀랐다. 배를 붙든 심열이 새우처럼 등을 잔뜩 굽히고 있었다. 통증이 정말 심한 모양이었다. 가동은 시녀의 말대로 침대 옆에 서서 넋이 나간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를 발견하자 가동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녹하야, 어서 와서 봐줘. 심열이가 배가 아프대. 무슨 일인지 와서 좀 봐 줘.”
허둥지둥 어쩔 줄 모르던 그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안도했다는 걸, 녹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구보다 가동을 잘 아는 그녀였다. 그가 다시 그녀를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원도 아닌 그녀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녀는 그의 기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앞에서 무슨 일이든 지탱할 수 있는 존재여야 했다. 녹하가 서둘러 심열의 시중을 드는 진씨에게 물었다.
“오늘 아가씨가 무얼 먹었는가?”
진씨는 허리를 숙인 채 공손히 답했다.
“아가씨는 부인께서 정해 주신 대로만 드십니다. 오늘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드셨습니다.”
녹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진씨의 말에 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탓으로 몰아세우려는 말이었다. 정작 가 대인은 진씨의 말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심열을 달래는 데 급급했다. 심열은 땀을 뻘뻘 흘리며 상기된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숨을 헐떡였다. 가슴이 저릿해진 녹하는 감정을 억누르고 매서운 눈초리로 하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누가 아가씨에게 아무 음식이나 준 것이냐?”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녹하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털어놓으면 목숨은 살려 주마. 조사를 통해 이품 고관의 자식을 모해하려던 게 밝혀지면, 이는 대역죄다. 자신의 목숨이 몇 개인지 잘 생각해 보거라. 지금 자백한다면 의원이 약을 조제해 별 탈 없이 넘어갈 수도 있겠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렸으니 잘 생각해 보거라.”
“부인, 용서해 주십시오!”
한 시녀가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바들바들 떨며 고했다.
“오늘 소인의 가족이 찾아와 집에서 만든 엿을 주었습니다. 다른 이들과 나눠 먹다가 아가씨께서도 함께 드셨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찹쌀을 얼려 만든 엿이라 찬 성질을 지닐 텐데, 혹 그래서…….”
녹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이런 쓸모없는 것 같으니, 그리 찬 걸 어찌 아가씨에게 주었단 말이냐?”
그때, 관리인이 의원을 데려왔다. 녹하의 설명을 듣고 맥을 짚은 의원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부인. 아가씨께서는 엿을 드시고 탈이 난 게 맞습니다. 소인의 약상자에 마침 이러한 증상에 먹는 환약이 있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약사발을 가져다주십시오. 소인이 편히 드실 수 있게 약을 물에 개어 드리겠습니다.”
시녀는 곧장 밖으로 나가 사발을 가져왔다. 의원이 환약을 물에 갠 뒤, 금지에게 건넸다. 금지가 조심스럽게 심열에게 약을 먹였다. 방 안에 있던 이들 모두 가슴을 졸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렇게나 통증이 심한데 약을 먹었다고 정말 괜찮아질까?
신기하게도 약을 몇 입 먹고 나니 심열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붉게 물든 얼굴도 천천히 원래의 안색을 되찾았다. 가동이 기뻐하며 말했다.
“의원, 정말 신통방통한 묘약입니다.”
의원이 웃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증상에 잘 맞는 약이었을 뿐입니다. 회임을 했으니 몸에 열이 많을 때입니다. 얼린 찹쌀은 찬 성질을 지녀 서로 상충한 기운이 배 속에서 싸움을 일으킨 것이지요.
방금 드신 것은 찬기를 해소하는 데 자주 쓰이는 약입니다. 어쨌든 얼린 찹쌀을 드셨다는 걸 부인께서 미리 알려 주신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원인을 찾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맞아요, 우리 부인이 대단한 사람이랍니다. 심열이 배가 아픈 걸 보자마자 음식을 잘못 먹었다는 걸 알고 곧장 원인을 찾아냈지요.”
말을 마친 가동은 의아한 얼굴로 녹하에게 물었다.
“부인, 심열이 음식을 잘못 먹은 거란 걸 어찌 알았어?”
부인이라는 말에 녹하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가동의 체면을 깎을 순 없었다.
“복통은 대개 음식을 잘못 먹었을 때 생기니까요. 그래서 그냥 물어본 거예요.”
복통을 앓고 난 심열은 축 처진 채 무기력한 목소리로 녹하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언니.”
“식구끼리는 그런 말 안 해도 돼, 어서 푹 쉬어.”
녹하가 의원에게 물었다.
“복통으로 아이에게 영향이 가진 않겠지요?”
의원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인. 그저 단순한 배탈이니 괜찮습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가동은 의원에게 상을 내리라고 분부한 뒤, 직접 그를 배웅했다. 가동이 돌아왔을 땐, 녹하는 이미 방을 나간 뒤였다. 가동이 서둘러 밖으로 향하니, 어둠 속에서 등롱 하나가 가볍게 흔들리며 멀어져 갔다. 그는 복도에 서서 점점 멀어져 불당으로 사라지는 불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별안간 가슴 속에서 두려움이 솟구쳤다. 꼭 부모의 손을 놓친 아이가 된 듯 씁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녹하가 이렇게 냉담해지다니, 설마 이제 그녀의 관심사는 아이밖에 없는 것이란 말인가? 넋을 놓고 있는데 진씨가 다가왔다.
“대인, 밤이 깊었으니 이곳에서 주무시지요. 아가씨께서도 많이 놀라셨으니 대인께서 돌봐 주시면 한결 나아질 겁니다.”
가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매지가 한 손에 등불을 든 채 언짢은 목소리를 냈다.
“대인, 가실 겁니까? 안 가실 거면 소인 혼자 가겠습니다.”
가동이 곧장 대꾸했다.
“가, 갈 거야.”
그가 진씨에게 말했다.
“아가씨를 잘 돌봐 주게. 밤중엔 특히 더 잘 돌봐야 할 걸세. 무슨 일이 있거든 서둘러 보고하고.”
진씨는 다시 한번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대인, 오늘은 이곳에서 주무시지요. 아가씨께서…….”
매지는 진씨의 말에 짜증이 났다. 이런 못된 늙은이가 곁에 있어 멀쩡한 아가씨를 다 망쳐 놓는 듯했다. 매지가 예도 차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대인께서 가시겠다는데 아주머니가 무얼 그리 떠들어요. 대체 이건 아가씨의 뜻입니까? 아니면 아주머니의 뜻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