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3화
황후는 녹하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매운 고추 같은 성정을 가진 그녀인데, 지금은 너무도 온순했다. 게다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녹하 언니.”
황후가 녹하 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녹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를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마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녹하가 이마를 쓸어내렸다.
“요즘 일이 많아서 조금 피곤한 것 같습니다.”
황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일이 많다고요? 성아가 또 옷을 만들어 달라고 성가시게 구는 건 아니죠?”
묵용성의 얘기를 꺼내자 녹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찌나 깜찍하고 귀여운 아이인지 몰랐다.
“전하께서는 늘 얌전하신걸요. 육왕야께서 새 옷을 입지 않는 한 절대 먼저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황후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 어린 게 여인보다 예쁜 옷을 더 밝힌다니까요. 황상이 아니라 황숙을 꼭 닮았어.”
잠시 뒤, 황후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안색이 좋지 않은데, 그만 돌아가 쉬는 게 어때요? 여긴 월규가 있으면 되니까. 그래서 애당초 기홍 언니와 녹하 언니한테 일을 그만 맡기려고 한 건데 말이야.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 매일 궁에 오가며 일하는 게 쉬운 일인가.
영안이도 아직 어리고 언니네도 곧 아이가 태어나니 얼마나 바쁘겠어요. 하지만 두 사람 다 절대 그만둘 수 없다고 하고, 나도 두 사람과 헤어지기 싫으니 별 수 있나. 평범한 저택에서 일하면 좀 쉬웠을까? 하필 규율이 많은 황궁에 있으려니 두 사람 모두 고생이네요.”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탓하려거든 마마와 저희의 깊은 인연을 탓해야겠지요. 이미 연을 맺은 이상, 저와 기홍은 평생 마마를 모실 것입니다.”
녹하가 넋을 놓은 이유를 황후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자존심 센 녹하 앞에서 그 얘길 꺼내긴 쉽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할 테니까.
“방 안에만 있지 말고 같이 좀 걸어요.”
황후는 강남에서 지냈던 것처럼 다정하게 녹하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서요.”
지금은 덥지도, 춥지도 않아 일 년 중 가장 상쾌한 날씨였다. 황후가 함께 걷자고 하니 녹하도 자연스레 황후를 따라나섰다.
승덕전을 나온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동을 마주쳤다. 가동이 예를 갖춰 황후에게 인사를 올린 뒤, 녹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날 깨우기 싫었던 거야? 혼자서만 궁에 오고… 덕분에 영구한테 된통 혼났잖아.”
녹하가 가볍게 그를 훑으며 말했다.
“가 대인, 말씀이 과하시네요. 집을 나설 때 대인이 워낙 곤히 잔다는 말을 들어 감히 깨울 수가 있어야지요.”
가동은 흠칫 놀랐다. 녹하의 말투가 어찌……. 황후가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녹하가 몸이 좋지 않으니 어서 데리고 들어가요.”
가동은 곧장 정신을 가다듬고 녹하의 안색을 살폈다.
“부인, 어디가 아픈 거야? 어제 불당에서 자서 고뿔이 든 거 아냐?”
황후는 이젠 두 사람이 잠도 함께 청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각방을 쓴다면 앞으로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그녀가 녹하에게 물었다.
“까닭 없이 무엇 하러 불당에서 자는 거예요?”
가동이 녹하 대신 대꾸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기도하느라 그렇습니다. 불당에서 지내며 정성을 다하겠다고요.”
순간 황후는 눈을 희번덕 뜨며 가동에게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녹하가 먼저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렇게 자존심 센 여인의 눈망울에 슬픔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황후도 마음이 여려져 꾹 참고 분부를 내렸다.
“어서 녹하를 데려가서 푹 쉬게 해 줘요. 불당은 추우니까 그런 곳에서 묵어선 안 돼요. 다신 불당에서 묵지 못하게 해요.”
가동이 조금 난처해하며 말했다.
“마마, 오늘 지각을 하였는데 일찍 돌아가면 영구가 또 잔소리를 할 것입니다.”
황후는 화가 들끓었다.
“부인이 아픈데 데려다주는 것도 안 돼요? 대체 어떻게 녹하의 부군이 된 거예요?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녹하를 최우선으로 한다고 했잖아요. 모두에게 헛소리한 거예요?”
가동은 멋쩍게 웃었다.
“마마, 어찌 그리 포악하게 말씀하십니까. 황상께서 아시면…….”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던 녹하는 사나운 파도에 삼켜지는 기분을 느꼈다. 가동은 자신의 모든 걸 떠벌리는 성격이었다. 예전엔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떠들어 대던 그였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황제의 외면을 받아도 상관없다며, 중요한 건 그녀뿐이라고 호언장담했는데. 이제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듯했다. 아무렴, 자식이 더 중요하겠지. 자식은 그와 혈연으로 이어졌지만, 어쨌든 그녀는 남이니까.
“마마, 이이는 아직 근무를 서야 하니 소인 혼자 돌아가겠습니다.”
황후는 안 된다고 했지만, 녹하의 애처로운 눈빛을 보니 측은함이 앞섰다. 가동에게 억지로 명령을 내려 녹하를 돌려보내는 건, 그녀의 성격상 더 치욕스러운 일일 터였다.
“알겠어요. 그럼 어서 가요. 저택에 도착하면 푹 쉬고.”
황후가 말했다.
“다른 일들은 걱정하지 말고, 스스로 몸을 잘 돌봐야 해요.”
그녀의 말뜻을 녹하도 알아들었다. 녹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예를 갖춘 뒤 궁 문으로 향했다. 가동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우리 부인은 배려심이 깊다니까요. 제가 황상께 혼이 날까 봐 걱정돼서 저리 하는 거예요.”
황후는 이를 꽉 깨물고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 같으니.”
말을 마친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어화원으로 향했다. 가동은 갑작스러운 호통에 코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요즘 들어 황후의 성질이 괴팍해진 것 같았다. 혹시 황상이 밤중에 황후를 잘 모시지 못하는 것이란 말인가?
* * *
시간은 또다시 빠르게 흘러갔다. 가동은 여전히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심열을 찾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재미난 것들을 사와 건넸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그녀의 배를 볼 때마다 가동은 날아갈 듯 기뻤다.
그러면서도 가동의 마음속 한편에서 위화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뭐가 이상한 것인지는 좀처럼 깨달을 수 없었다. 밤이 되어 침대에 이불을 펴던 매지가 말했다.
“대인, 어찌 심열 아가씨 처소에서 주무시진 않으십니까? 혼자 주무시면 적막하지도 않으십니까?”
머리를 풀던 가동은 그녀의 말에 별안간 녹하가 떠올랐다. 홀로 불당에서 잠을 청하니 얼마나 적막할까? 황후가 녹하에게 더는 불당에서 지내지 말라고 했지만, 녹하는 여전히 고집을 피우며 불당에서 묵고 있었다.
그는 맨발로 신발을 구겨 신은 채 밖으로 향했다. 매지가 흠칫 놀라 물었다.
“대인, 이리 늦은 시간에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가동이 말했다.
“부인한테 갈 거야.”
매지는 자신의 말 때문에 가동이 심열에게 가려는 것인 줄 알았다. 정말 심열의 처소로 가는 거라면 어떻게든 뜯어말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동은 녹하를 보러 간다고 했다! 매지는 겨우 마음을 놓았다. 바보 같은 가 대인이 드디어 부인 생각이 났단 말인가?
가동은 서둘러 불당으로 가던 중, 마침내 가슴을 휘감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며칠이나 녹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한집에 살고, 함께 궁에서 일을 하는 두 사람이다. 그런데도 각자의 인생을 사는 것처럼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나날은 이렇지 않았다. 예전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녹하의 얼굴부터 보았다. 궁 안을 순찰할 때도 늘 기회를 엿보다 녹하를 찾아가지 않았던가. 녹하가 일을 마치는 시간이 그보다 더 빨랐기에, 녹하는 늘 그를 기다렸다가 함께 저택에 돌아오곤 했다. 녹하가 있는 곳이 그가 있는 곳이었고 그가 있는 곳이 녹하의 자리였다. 그랬는데, 언제부터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서둘러 불당으로 달려간 그는 뜻밖에도 문전박대를 당했다. 문을 두드리며 녹하를 불렀지만 닫힌 문 너머에서 시녀 석동의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대인, 부인께선 이미 잠드셨습니다. 내일 말씀하시지요.”
가동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긴 했다. 그가 발을 질질 끌며 느릿느릿 돌아오자, 매지가 물었다.
“대인, 부인은 만나셨습니까?”
가동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잠들었대. 내일 다시 봐야지, 뭐.”
매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리 황급히 부인을 찾으시다니…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가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급한 일은 없었다. 그저 그녀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 * *
가볍게 흔들리는 등잔불이 적막한 불당에 기이한 굴곡을 드리웠다. 녹하는 탁자 옆에 앉아 있었고 석동이 그녀 뒤에서 가볍게 머리를 빗겨 주었다.
“부인, 대인께서 찾아오셨는데 어찌 만나지 않으신 겁니까?”
녹하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할까?”
석동은 녹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만큼 대인과 부인이 서로를 얼마나 은애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열 아가씨가 저택에 돌아온 후, 대인은 늘 심열 아가씨에게 달려갔고 부인은 홀대했다. 대인이 그리 무정하고 의리 없는 사내였다니!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석동도 녹하처럼 속이 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부인, 대인께서 부인을 찾아오신 건 아직 부인을 마음에 두신다는 의미입니다. 만나 주지 않으시면 대인은 점점 더 멀어질 것입니다. 그러다 심열 아가씨가 공자를 낳으시면 세 식구가 화목하게 지내겠지요. 부인은 멀리 떨어진 채 말입니다.”
“정말 그리된다면.”
녹하가 말했다.
“대인이 원하던 바를 이루는 거지. 난 앞으로 불당에 머물면서 저택의 일에 손을 뗄지도 모를 일이고.”
그 말에 석동은 마음이 아팠다.
“부인, 어찌 그리 불길한 말씀을 하십니까. 이렇게 마음 약하신 분이 아니시잖아요. 다른 이가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게 내버려 두실 생각이십니까?”
녹하가 고개를 저었다.
“다들 내 성격이 사납다고 하지만 이런 일로는 싸우고 싶지 않아. 이미 마음이 떠났는데 빼앗아오면 뭐 하겠어. 조금 억울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볼 수 있으니 나쁠 것 없어. 어차피 희망이 없으면 실망도 없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