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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71)화 (670/1,192)

제671화

삼 개월이 지나자 심열의 배는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팔다리는 여전히 가늘었다. 그나마 가동이 보낸 보양식 덕분에 얼굴도 동글동글해졌고 두 눈망울엔 광채 가득한 자태가 마음이 녹아내릴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가 대인의 시선은 줄곧 그녀의 배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막 잎이 나기 시작한 배추를 바라보는 농부처럼 그의 마음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가동은 매일 기쁘고 행복했다. 궁 안에서도 워낙 바쁘게 움직이는 탓에 녹하와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가동은 저녁이 되어서야 각종 핑계를 대며 늦게 돌아왔다. 놀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을 아는 녹하도 크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가동은 심열과 관련된 일이라면 신경을 써 꼼꼼하게 처리했지만 잊어버린 일이 딱 하나 있었다. 가게에서 외상을 치르고도 약속한 날까지 돈을 주지 않으니, 가게 주인들이 저택으로 점원을 보낸 것이다.

관리인은 외상 전표를 가져온 점원들을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전표를 꼼꼼히 확인하며 값을 더해 보니 꽤 큰 액수였다. 가 대인은 자주 외상을 해 부인께 굳이 보고할 것 없이 관리인 선에서 처리하곤 했다. 다만 이렇게 큰 금액은 함부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간 가 대인의 수상쩍은 행동까지 떠올리니… 여간 의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의심을 품은 관리인은 곳간으로 가서 물건을 살펴보았다. 세상에나! 지난번 가 대인이 보따리에 쌌던 보양품들이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관리인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예부터 집안 도둑은 막기도 어렵다더니, 정말이었다!

사실을 알고 난 이상 숨길 수 없었기에 관리인은 이 일을 부인에게 고했다. 녹하도 의아해하긴 마찬가지였다. 가동에게 제법 많은 돈을 주었는데, 어찌 이리 많은 외상을 졌단 말인가? 게다가 보양품은 전부 궁에서 상으로 받은 것이라 바깥에선 살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 귀한 건 대체 누구에게 주었단 말인가?

처음 관리인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 녹하는 가슴이 시리도록 아팠다. 그녀가 아는 가동은 뭐든 감추고 속이는 법 없이 곧바로 알려 주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마저 속이는 걸 보니 마음이 한참 멀어진 모양이었다.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도 녹하는 똑똑한 여인이었기에 가동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보기엔 타이르기 쉬워 보여도 한번 생각이 꼬이면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를 속이려 한 걸 보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입을 열지 않을 게 뻔했다. 그녀는 외상을 전부 갚아 준 뒤, 이번 일은 조용히 넘어가라고 분부했다. 도둑을 확실히 붙잡으려면 경계심을 갖게 해선 안 되는 법이다!

* * *

꾀죄죄하고 너저분하던 대잡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제법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방도 이미 수리를 마친 뒤였다. 모두 가 대인 덕분이었다. 원래는 한 저택에 열 가구가 넘게 살고 있었지만, 가 대인이 더 좋은 곳을 찾아준 덕에 전부 이곳을 떠났고 심열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전혀 적막하진 않았다. 가동은 먼저 시종 진씨를 들인 뒤, 심열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진씨를 편히 대하지 못할까 봐 손이 빠른 여종을 추가로 들였다. 더욱이 여종의 이름을 바꾸어 금지金枝라는 이름까지 붙여 주었다.

두 명이나 심열의 시중을 들었지만, 힘든 일을 담당하는 하인까지 몇 명 더 들였다. 대문 앞을 지키는 문지기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대잡원은 그의 별장이 되어 갔다.

어느 날, 가동이 비단 한 필을 사 들고 대문을 들어서며 소리쳤다.

“심열아, 내가 얼마나 좋은 걸 사 왔게?”

발을 걷고 밖으로 나온 심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가동을 바라보았다.

“대인, 어찌 또 비단을 사 오신 거예요. 얼마 전에 사 주신 것으로도 옷을 다 만들지 못했는데, 다 어디에 둔단 말이에요!”

가동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옷은 많을수록 좋은데 뭘.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벌씩 옷을 갈아입어야 하잖아.”

심열이 비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래도 예쁘네요.”

“심열이 네 마음에 들면 됐어.”

가동은 그녀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우가 여기 숨어 있었구나. 한참 찾았네.”

그 목소리에 가동과 심열 모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대문을 들어선 녹하가 미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동은 곧장 심열의 앞을 막아섰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심열의 배를 본 녹하는 상황을 단번에 깨달았다. 가동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녹하야.”

녹하는 놀란 표정도 잠시, 금세 활짝 미소를 지었다.

“심열이가 아이를 가졌다고 왜 말해 주지 않은 거야? 내가 그렇게 소심한 사람이야? 어쩐지 그렇게 외상을 많이 걸고 집에 있는 온갖 보양품을 다 가져갔다 했더니, 이렇게 좋은 소식을 어떻게 숨길 수 있어!”

녹하가 화를 내지 않으니 가동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심열은 여전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서둘러 녹하에게 예를 갖추려는데 녹하가 그녀를 일으켰다.

“됐어, 됐어. 아이까지 있는데 무릎을 굽히면 어떡해? 배가 움츠러들잖아.”

이윽고 그녀는 마당을 한번 훑고 자그마한 집까지 살펴보더니 가동에게 호통을 쳤다.

“이렇게 바보 같긴, 어떻게 심열이를 이런 곳에서 지내게 할 수 있어? 아이한테 퍽도 좋겠다!”

녹하는 한 여종을 발견하고 분부했다.

“어서 네 주인 짐을 싸거라. 저택으로 들어갈 거니까.”

그리곤 가동의 말 옆에 서 있던 하인을 불렀다.

“가서 마차를 하나 빌려 오거라. 큰 걸로.”

그녀의 행색과 태도는 한눈에 봐도 정실부인이었다. 노비들은 어쩔 줄 몰라 허둥대며 가동을 바라보았고, 가동은 심열을 바라보았다. 심열은 더는 숨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허리를 숙인 채 녹하에게 말했다.

“번거롭게 해 드려 송구합니다.”

“가족끼리 무슨 그런 말을 해. 널 잘 돌보는 게 내 도리인걸.”

가동이 몇 차례나 설득해도 소용없었건만, 녹하는 단번에 심열을 저택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지금 녹하의 속마음은 겉처럼 평온하지 않았다. 심열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누구보다 기뻤지만, 두 사람이 자신을 속이고 바깥에서 몰래 살림을 꾸린 것에는 상심이 컸다.

그녀는 그간 자신이 가동을 잘 이해한다고, 가동만큼은 그녀를 떠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대문 앞에 서서 심열과 가동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때,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가동은 언제든 그녀를 떠날 수 있었다.

부부라고 해도 떠나지 못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정이 깊은 황상과 황후만 봐도 그랬다. 황후가 돌아오기 전, 황상은 후궁을 들이지 않았던가? 그녀는 승부욕이 강한 여인이었기에 설령 지더라도 멋지게 지고 싶었다.

심열이 돌아오자 녹하는 커다란 처소를 내어 주고 노비들도 여러 명 보내 주었다. 대잡원에서 함께 온 하인들까지 더해지자 심열의 처소에는 시녀 진씨와 금지, 문지기부터 하인만 열 명이 훌쩍 넘었다. 녹하의 처소보다도 훨씬 많은 수였다.

원래도 일 처리가 똑 부러진 녹하는 심열을 살뜰히 돌봤다. 꼭 집안의 큰딸처럼 먹는 것, 입는 것 모두 가장 좋은 것으로만 내어 주었다. 또 그 밖에도 길일을 골라 가동과 심열의 혼사도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 모든 걸 준비하는 녹하의 안색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가슴에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피는 오직 그녀 자신만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가동이 첩을 들이는 일을 여러 번 언급해 왔다. 그만큼 혼사를 준비할 때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시간도 너무 지체되었고, 가동이 혼사를 올리기 전 합방부터 치른 터라 더더욱 쉽게 여겼다. 그랬건만, 막상 준비해야 할 때가 되니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직접 부군의 첩을 들일 준비를 하는 건 제 손으로 가슴을 찌르는 일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가동은 아이를 원했고 그녀는 가동보다 더 원하는 것을. 심열은 좋은 여인이니 함께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알고 있는데도, 왜 자꾸만 괴로운 것일까?

심열 또한 생각이 깊은 여인이었다. 저택에 돌아온 후 그녀는 녹하가 불편해할까 봐 처소를 나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시중을 받으며 바깥 상황은 모른 채로 지냈다. 그러다 부인이 그녀와 가동의 혼사를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들은 그녀는 처음으로 처소를 나섰다. 녹하의 처소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녀의 모습에 시녀들은 걱정이 앞섰다.

“아가씨, 천천히 가시어요. 공자께서 놀라십니다.”

사 개월이 되자 녹하는 그녀의 진맥을 봐줄 의원을 저택으로 불렀다. 다행히 의원은 아이가 아주 튼튼하다고 했다. 그녀도 겁날 것 없었기에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심열은 녹하를 보자마자 곧장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깜짝 놀란 녹하가 황급히 그녀를 일으켰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언니께서 저와 대인의 혼사를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준비해야지. 아이를 낳은 후에 올릴 순 없잖아? 다들 비웃을 거야.”

심열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녹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있거든 말만 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면 뭐든 해 줄게.”

“언니, 오해십니다.”

심열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혼인하기 싫다고 하면, 녹하는 분명 의심부터 하리라.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배가 너무 불러서 움직이기 힘듭니다. 예복을 입어도 보기 흉하겠지요. 혼사는 아이를 낳은 후에 올리는 게 좋겠습니다.”

녹하에게는 조금 뜻밖인 말이었지만, 일리가 있었다. 임산부를 힘들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준비는 녹하가 한다고 해도 혼사 당일에는 이런저런 의식을 치러야 하니 심열도 많이 피곤할 터였다.

“언니, 먼저 아이부터 낳고 그 후에 혼사를 치르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심열이 확고하게 덧붙였다.

“남들의 시답잖은 소리는 조금도 겁나지 않습니다.”

몇몇 부잣집에서는 아들을 낳기 위해 첩을 들이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딸을 낳을까 봐 아이부터 낳고 혼사를 올리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아들을 낳아야 첩의 신분도 귀해지는 법이었기에, 제법 흔한 일이었다.

녹하는 심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혹여 다른 이유가 있을까 봐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유난히 평온한 표정에선 그 무엇도 읽어낼 수 없었다. 녹하가 말했다.

“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 아이부터 낳고 혼사는 그 후에 치르자.”

심열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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