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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70)화 (669/1,192)

제670화

관리인은 물건들을 뒤적거리며 산삼 두 상자, 궁에서 상으로 내린 제비집, 전복, 해삼, 버섯 등을 꺼내놓았다. 좋은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가동은 전부 보따리에 싼 뒤, 어깨에 짊어지고 나가려 했다. 깜짝 놀란 관리인이 서둘러 그를 가로막았다.

“대인, 이리 많은 걸 들고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전부 다 부인께서 가계부에 적어 놓으신 것들입니다.”

가동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부인한테 내가 가져갔다고 하게.”

“어디로 가져가시는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기록하기 편할 테니까요.”

“내가 먹으려고. 됐지?”

“…….”

오랜 시간 울적해하시더니, 병이라도 난 것인가?

대문까지 걸어간 가동은 문득 이건 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녹하가 얼마나 똑똑한 여인인데, 그의 행동에 의심을 품고도 남았다. 심열이 놀라면 안 되니 우선은 녹하부터 속여야 했다. 결국 그는 방으로 돌아와 보따리를 풀고 관리인을 불렀다.

“이것들을 다시 가져다 놓게. 필요 없네.”

“…….”

역시나 대인에게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지금 그를 가지고 노는 것이란 말인가? 관리인은 물건을 전부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가동은 그 옆에 멀뚱히 서서 관리인이 어느 곳에 물건을 두는지 세세히 지켜보았다. 나중에 아무도 모르게 가져갈 생각이었다.

너무나 큰 비밀은 간직하고 있는 것만도 어려웠다. 또 이런 큰 경사는 모두의 축하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니. 정말 답답한 일이었다.

아이가 떠오를 때마다 가동은 웃음이 났다. 한번은 시위들 앞에서 훈시를 하던 중에 갑작스레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가 훤히 드러나도록 웃는 가동의 모습에 시위들은 깜짝 놀랐다. 평소에도 조금 바보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훈시를 할 때는 엄숙한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다니,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더 엉뚱한 짓도 많이 했다. 화단을 걷던 중 그는 한 궁녀와 마주쳤다. 궁녀가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추자 그는 별안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 궁녀는 깜짝 놀라 급히 자리를 뜨다가 하마터면 나무에 부딪힐 뻔했다.

영구마저 그가 정신이 이상해진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본 가동은 돌사자에 대고 무어라 한참 중얼거리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기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진 않았지만 어쨌든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말을 건다 한들, 돌사자가 알아듣겠는가?

그러나 가 대인의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황후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원통형의 만화경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 만화경을 눈에 대고 한참을 바라보다, 시시덕거리며 월규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다. 그 모습에 궁금해진 가동이 다가가 물었다.

“마마, 무얼 보시는 겁니까?”

황후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가동에게 건넸다.

“한번 봐요. 만화경이라고 서양에서 들어온 거예요. 황상께서 가지고 놀라며 주셨죠. 자그마한 구멍을 들여다보면서 움직여 봐요. 재미있죠?”

과연, 가동은 작은 원통 안에 담긴 형형색색의 빛들을 볼 수 있었다. 각종 빛을 담아놓은 통 안은 움직일 때마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번져나갔다. 볼수록 신기한 광경이었다.

가동이 황후에게 물었다.

“마마, 이건 어디에서 구할 수 있습니까? 저도 하나 갖고 싶습니다.”

황후가 웃으며 물었다.

“사내대장부가 이런 걸 가지고 놀겠다고요?”

가동이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제가 가지고 놀 것은 아니고요.”

“녹하에게 주려고요?”

가동은 비밀을 흘릴까 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황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누구한테 주려고요?”

월규가 옆에 있으니 가동은 절대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것이, 사실은 제가 가지고 놀려고요.”

월규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중얼거렸다.

“가 대인, 체면이 깎일까 걱정이 되지 않으십니까?”

황후는 눈동자를 한 번 굴리더니 월규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가 대인, 혹시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어요?”

가동은 얼굴을 굳힌 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황후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어떤 사인데 이런 말도 못 해요? 대인은 제 사부였잖아요. 지금은 태자의 사부이기도 하고요. 태자가 몰래 양부라고도 부른다면서요.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어디 있어요? 어서 말해 봐요.”

가동이 여전히 망설이자 황후가 얼굴을 굳혔다.

“말하지 않으면, 황상께 고할 거예요. 절 업신여긴다고 말이에요.”

황상까지 알면 일이 너무 커진다. 가동은 투덜대며 말했다.

“마마, 아랫사람에게 너무 위세를 부리시는 것 아닙니까?”

“황상께서 그러셨어요. 제가 교만을 떨 줄 모른다고요. 그러니 가끔은 위세를 부려도 괜찮아요.”

가동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말씀은 드리겠지만, 비밀을 꼭 지켜 주셔야 합니다.”

황후는 닭이 모이를 쪼아 먹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제 입이 얼마나 무거운데요.”

가동은 목청을 가다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제게 아이가 생겼습니다.”

“정말요?”

황후는 기쁜 마음에 손뼉을 치며 폴짝폴짝 뛰었다.

“마마,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가동이 서둘러 그녀를 말렸다.

“그러다 다른 이가 듣겠습니다.”

“좋은 일인데, 좀 알면 어때요.”

황후는 기쁜 마음을 좀처럼 감추지 못했다.

“폭죽을 터뜨리며 만천하에 알려도 부족한데, 무엇 하러 숨겨요. 녹하도 정말 침착하다니까요. 티를 전혀 내지 않아서 몰랐어요.”

가동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녹하가 아닙니다.”

황후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녹하가 아니라면, 그럼…….”

그녀는 그제야 가동의 말을 깨달았다. 어쩐지 비밀을 지켜달라더니.

“대단하네요, 가동.”

그녀가 그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밖에서 첩을 들인 거예요? 어떤 여인인데요?”

그녀가 꼬치꼬치 캐물으니 가동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 또한 입이 근질거렸던 차였다. 그렇게 모든 일은 낱낱이 황후의 귀로 들어갔다.

“마마, 제 비밀은 이제 마마께 달려있습니다. 부디 잘 좀 지켜 주십시오. 아직 삼 개월이 되지 않아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걱정입니다. 녹하에게도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시일이 좀 더 지나 안정기가 되면 그때 알릴 것입니다.”

황후는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녹하가 아직 이 일을 모른다니, 곧 알게 된다면……. 그녀는 녹하가 받을 상처를 짐작할 수 있었다. 녹하가 상처받는 건 싫었지만, 두 사람이 아이를 간절히 원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까. 가동 부부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조바심을 낼 정도였다. 그런 두 사람에게 마침내 좋은 소식이 생긴 것이다. 누구에게서 태어났든 가동의 혈육이 아니던가.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누구예요.”

황후는 만화경을 그의 손에 찔러주었다.

“가서 아이의 생모한테 줘요. 혼자 밖에서 지내면 정말 쓸쓸할 거예요. 이거라도 심심풀이로 가지고 놀라고 해요.”

가동은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마마, 이걸 저에게 주시면 마마는요?”

황후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황상께 하나 더 구해 달라고 하면 되죠.”

마침 계단을 내려오던 황제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황후와 가동을 목격했다. 어쩐지 수상쩍은 모습이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멍청한 가동 같으니, 어찌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규율을 하찮게 생각하는 듯했다. 황후와 저리 가까이 붙어 있지 않는가? 황제는 뒷짐을 진 채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눈썰미가 좋은 황후는 황제의 모습이 보이자 다급히 말했다.

“어서 가요. 황상께서 오시니까요.”

가동은 만화경을 소매에 찔러 넣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만약 자신이 황후의 물건을 가져간 걸 알면 황제는 그를 걷어차고도 남았다.

황제는 분주히 움직이는 그들을 똑똑히 지켜보았음에도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는 황제였다. 혼을 내는 건 언제든 가능하니 조급해할 필요 없었다. 황후가 황제를 보며 헤헤 웃었다.

“황상, 어쩐 일로 밖에 나오셨어요?”

“피곤하여 잠시 거닐려고 나왔소.”

황제는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저 바보는 왜 도망가는 것이오?”

“도망은요, 당직을 서러 간다던데요.”

“당직인데도 당신과 한나절 동안 수다를 떤단 말이오?”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짐이 너무 오랜 시간 혼을 안 냈나 보오.”

황후는 그가 조금 전 일을 캐물을까 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태명호에 새로 심은 연꽃이 제법 많이 자랐더라고요. 저랑 같이 가 보실래요?”

둘은 손을 잡고 호숫가로 향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어린 황자가 비틀거리며 황후 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황후는 쪼그려 앉아 황자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황자는 그녀에게 안기려 했지만,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황후는 황제와 황자의 손을 나란히 잡고 함께 걸어갔다.

나무 뒤에 숨었던 가동은 부러운 눈빛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그와 심열도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산책할 수 있겠지? 하지만… 심열의 얼굴은 어느새 녹하로 바뀌었다가 다시 심열로, 다시 녹하로 바뀌길 반복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아이는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한단 말인가? 가동에겐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 * *

좋은 선물을 얻은 가 대인은 당직을 마치고 곧장 대잡원으로 향했다. 그리곤 귀중한 보물을 바치듯 심열에게 만화경을 건넸다. 서양의 장난감을 처음 본 심열은 신기했는지 자그마한 구멍에 눈을 대고 요리조리 바라보며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녀가 기뻐하자 가동도 기뻤다.

“마음에 들어? 황후 마마께 달라고 한 거야. 마마한테 신기한 물건이 많으니 나중에 또 구해올게.”

깜짝 놀란 심열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대인, 절대 안 됩니다. 대인의 마음만으로도 저는 크게 감동했습니다. 황후 마마의 것은 전부 황제 폐하께서 쓰시는 물건일 텐데 저희 같은 백성들이 어찌 감히 탐을 내겠습니까. 부디 절 놀라게 하지 마시어요.”

그녀가 까무러치게 놀라니 그 역시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아이까지 놀랄까 봐 걱정된 탓이었다.

“알겠어. 황후 마마의 것은 탐내지 않을게. 내가 직접 재미난 것들을 구해 올게.”

“매일 그리 당직을 서시면서 이렇게 찾아오시다니, 너무 고생이십니다. 그만 돌아가 쉬십시오.”

“난 안 힘들어.”

가동이 그녀의 배를 빤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한 번만 만져 봐도 될까?”

심열은 얼굴을 붉혔다.

“아직 너무 작아서 만져도 아무 반응 없을 것입니다.”

가동의 얼굴도 붉어졌다. 녹하가 아닌 다른 여인을 만지는 건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다만 그는 다른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정말 아이만 생각해서 꺼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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