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9화
가동은 큰소리로 웃고 싶기도, 목 놓아 울고 싶기도 했다. 그는 결국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심열을 안고 한 바퀴 돌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란 심열은 안색이 급변했다.
“대인, 아, 아이가 놀랍니다.”
아이라는 말에 그는 곧장 정신을 차리고 조심히 그녀를 내려놓았다. 손을 뻗어 아이를 만져 보려는데 심열이 붉게 물든 얼굴로 몸을 틀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무례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닫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한편으로는 심열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그는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 심열의 손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심열, 이 고마움을 어찌 표현해야 할까? 당신은 우리 집안의 은인이야. 앞으로 부처님처럼 섬길게!”
심열이 서둘러 그를 일으켰다.
“대인, 이리 하시면 제가 더 부끄러워집니다.”
그간 의기소침했던 가동은 온데간데없고,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하고 기뻐하는 사내가 있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생각에 조금은 긴장이 되기도 했다. 그가 심열의 팔을 붙잡았다.
“가자, 집으로 돌아가야지.”
심열이 팔을 빼내며 말했다.
“대인, 전 이곳이 좋습니다.”
“좋긴 뭐가 좋다는 거야? 이렇게 좁고 더러운 곳에서 어떻게 지내.”
가동이 말했다.
“시정잡배들이 사는 곳인데, 내가 어떻게 마음을 놓겠어?”
심열이 고개를 저었다.
“대인, 이곳은 하층민이 사는 곳이긴 해도 마음이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이곳에 살 수 있었던 것도 이웃들이 도와준 덕분이에요. 제게 아주 잘해 주어 이곳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이곳에 남겠다는 그녀의 말에 가동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생각을 짜냈다. 어찌 아이를 이런 곳에 두고 간단 말인가? 둘도 없는 그의 소중한 아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심열이 고집을 부리니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임산부가 가장 우선이었으니까.
“알겠어. 이곳에 있고 싶다면 그렇게 해. 돌봐 줄 사람을 보내 줄게.”
심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훗날 아이가 태어나거든 저택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가동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이를 보내준다니, 심열이 너는? 또 떠나려고?”
심열이 억지로 미소를 보였다.
“우선 아이부터 낳고요.”
“안 돼.”
가동이 말했다.
“저택에 돌아가자마자 처소를 정리하라고 분부할 거야. 당신이 아이의 어머니니까…….”
심열이 나지막이 말했다.
“부인께서 아이의 어머니이십니다.”
가동은 별안간 마음에 커다란 바위가 얹힌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가 생겼다는 기쁨이 다른 고민을 가려주었다. 그저 어떻게 해야 심열이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했다. 그는 갖고 있던 은자를 전부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우선 이거라도 갖고 있어. 내일 더 많이 가져올 테니까. 부족한 게 있거든 말만 해.”
심열은 거절하지 않고 은자를 받았다.
“제가 필요한 건 없습니다. 그저 아이가 부족할까 봐 걱정이지요. 보양식을 챙겨 먹으면 그래도 괜찮을 겁니다.”
“맞아, 맞아. 그래야지.”
가동은 녹하에게 들어온 좋은 것들을 심열에게 가져다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난 이만 가 볼 테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어. 또 짬이 나면 찾아올게.”
“대인.”
심열이 그를 불렀다.
“이 일은 당분간 부인께 말씀하지 말아 주시어요.”
“어째서?”
가동이 의아해져 물었다.
“설마 녹하가 기쁜 게 싫은 거야?”
가동은 잘 타일러 보낼 수 있었지만, 가 부인이 찾아온다면 심열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저택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처지도 너무 어중간했고, 이대로 계속 가 대인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 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웅얼거렸다.
“조, 조금 무섭습니다.”
가동은 곧장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녹하는 사나운 성격이었기에 심열뿐만 아니라 그 또한 그녀가 무서웠다. 아이가 놀라면 절대 안 될 일이니 그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당분간은 알리지 않을게. 나중에 깜짝 선물로 알려 주면 되지.”
가동은 심열에게 몸조심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 옆에서 시중을 드는 이가 없으니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심열이 원치 않아도 그는 경험 많은 시종을 보내 줄 생각이었다. 한없이 늘어지는 가동의 잔소리에 온순한 심열도 조금은 짜증이 났다. 다만 그의 따뜻한 마음은 느낄 수 있었다. 설령 배 속의 아이를 위한 따스함이라 해도.
가동은 대문을 나오자마자 대기 중이던 보초 두 명을 불렀다.
“지금부터 너희는 이곳에서 지내며 밤낮 가리지 않고 심열 아가씨를 보호하거라. 회임한 몸이라 조심해야 하니 밥이든 빨래든 모든 일은 너희가 도맡아 하거라. 밤에는 다른 보초와 교대하거라. 혹 아가씨가 밤에 측간에…….”
보초는 멍하니 가동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대인, 저희 같은 사내가 아가씨의 시중을 들면 불편해하시지 않을까요?”
가동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힘든 일을 맡아 주는 건 괜찮았지만, 보초들이 심열의 시중을 들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심열이 다른 사내들과 왕래하는 건 그도 원치 않았다. 역시 지금은 경험 많고 노련한 시종을 들이는 게 급선무였다. 가동은 잠시 망설이다 명을 내렸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 아가씨를 지키거라. 실수를 해선 절대 안 될 것이다. 난 아가씨에게 보낼 시종을 알아보겠다.”
두 보초는 그리하겠다고 대꾸한 뒤,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가 대인은 무지막지한 구석이 있었다. 무턱대고 이곳에서 지내라니, 어디에서 묵는단 말인가? 그래도 병사인 그들에게 노숙은 흔한 일이었다. 날이 추운 것도 아니니 나무 아래에서 자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가동은 저택으로 돌아가 하인 한 명을 심열에게 보낼 생각이었지만, 곧 단념했다. 그리하면 녹하가 알아차리지 않겠는가? 결국 그는 시장에서 행색이 깨끗하고 일손이 빨라 보이는 부인을 찾았다. 오십 대쯤 된 선량하게 생긴 여인이었다.
가동은 관상을 유난히 따졌다. 흉악하게 생기거나 어딘가 비뚤어지게 생긴 사람, 표정이 딱딱한 사람은 절대 고르지 않았다. 혹여나 아이가 무서워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직 배 속에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로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생각해야 했다.
그가 높은 임금을 제시하자 부인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높은 관리가 가라고 한 곳은 낡아빠진 대잡원이었다. 부인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동은 그녀의 의심을 곧장 알아차렸다.
“물어선 안 될 것은 묻지 말게. 어쨌든 이곳에서 오래 있진 않을 터이니 시중만 잘 들면 되네.”
부인은 뒤이어 선녀처럼 아름다운 심열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관리 나리께서 다른 여인과 아이를 가졌는데 아직 큰 마님의 허락을 얻지 못해 이곳에 여인을 두려는 모양이었다.
심열은 시종을 원치 않았지만 이미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만 방이 너무 좁아 침대를 더 놓을 수도 없었고 한 침대에서 자기도 불편했다. 물론 가동도 부인을 심열과 한 침대에서 자게 둘 생각은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가 눌리면 어찌한단 말인가?
지금의 가동은 제법 박력이 넘치는 사내였다. 그는 곧장 옆방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인 한 명과 두 명의 아이가 함께 묵는 방이었다. 그가 갑자기 안으로 들어오자 세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 대인은 기백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부터 운룡雲龍객잔에서 묵게. 가동 대인이 보냈다고 하면 되네. 이 방은 내가 며칠 빌리겠네.”
빈민층 백성이 언제 이리 높은 관리를 만나보겠는가. 그의 관복과 위풍당당한 모습에 벌벌 떨던 부인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보자기에 짐을 싼 뒤,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 이렇게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되었고, 시종에게도 묵을 곳이 생겼다.
가동은 시장을 돌며 쌀과 각종 간식, 장아찌, 수육까지 전부 대잡원으로 보냈다. 우선 값을 치를 돈이 없어 자신의 이름으로 장부를 기록해 두었다. 가동이 평소에도 시장을 자주 돌아다닌 덕분에 상인들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얼굴까지 아는 관리 나리가 외상을 한다는데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한바탕 잔소리를 하며 시장에서 물건을 사 보낸 그는 뒤늦게 멍청한 결정을 내렸다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 심열이 아닌 다른 이를 객잔으로 보냈단 말인가? 옆방 부인이 아니라 심열을 보냈어야지. 또 쌀이며 장아찌를 사 보낼 게 아니라 주루에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심열에게 식사를 보내 주라고 하면 될 일 아니던가?
그는 서둘러 자주 가던 주루로 발걸음을 돌렸다. 주인장은 가동을 보자마자 곧장 마중을 나와 굽실거리며 그를 맞이했다. 가동은 여전히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부터 매일 임산부가 먹을 반찬과 보양탕을 준비해서 괴화槐花 골목 대잡원에 보내 주게.”
이곳은 임안성에서 가장 명성이 자자한 대형 주루였다. 그와 아주 친한 사이였던 주인장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가 대인, 드디어 아이를 가지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가동은 부인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초기이니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게. 그러다 잘못되면 안 되니 말일세.”
주인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요, 만월주滿月酒(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마시는 술)를 드실 때 꼭 소인을 찾아 주십시오.”
가동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내 아주 큰 선물을 준비해 두겠네.”
주루에서의 볼일까지 마치고 나자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했다. 궁으로 돌아가기 귀찮았던 가동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저택 대문을 들어서는 가동은 활짝 웃고 있었다. 하인들은 의아하기만 했다. 대체 왜 저러신단 말인가? 아침만 해도 울상이던 분이 저녁에는 웃음꽃이 만개하다니? 요즘 들어 가동을 상대하지 않던 녹하도 발그레한 얼굴로 웃고 있는 그가 이상했는지 말을 붙였다.
“심열이를 찾은 거야?”
가동은 기쁨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왜 그리 기분이 좋아?”
대답이 궁해진 가동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좋잖아.”
녹하는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대꾸도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가동은 곳간으로 달려가 안에 있는 물건을 살폈다. 가동이 이것저것 뒤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관리인이 다가와 물었다.
“대인, 무얼 찾으시는지요?”
가동이 말했다.
“보양에 좋은 것들을 전부 꺼내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