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8화
처음엔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에만 얽매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러나 심열이 떠난 지금, 그를 감싼 안락한 누에고치에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그는 쌩쌩 불어오는 찬바람을 온몸으로 버티는 기분이었다.
별안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로소 가동은 조금씩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녹하의 말대로 전부 그의 잘못이었다. 저 때문에 결국 심열이 숨고 말았다, 저 때문에. 그 착한 여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는 평생 자신을 용서치 못할 터였다.
그는 평생을 바보처럼 살아왔다. 작은 일에는 멍청하지만 그래도 큰일은 제법 똑 부러지게 대처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일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생각할수록 심열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져, 그는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울상을 지었다. 그는 심열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뜻밖에도 그녀의 얼굴은 이미 흐릿해진 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얼굴이 또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당초 잘못된 인연이다. 그녀가 어딘가에서 잘 지낸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결말일지도 모른다. 다시 평온한 생활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아갈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가슴 속은 지울 수 없는 죄책감으로 가득하겠지.
* * *
이틀이 지나도 심열은 깜깜무소식이었다. 공춘홍은 가동 앞에서 호언장담했지만, 멋쩍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혹여 자신이 꾀를 부린 것으로 비춰질까 걱정이 되었던 공춘홍은 가동에게 술자리를 청했다. 그러나 가동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난 술 끊었네.”
공춘홍은 깜짝 놀랐다. 가 대인의 술 사랑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취하지 않으면 자리를 뜨지 않을 정도가 아닌가. 공춘홍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정말 술을 끊으셨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황상께서 마시라고 하실 때만 마실 거야.”
가동이 덧붙였다.
“황명은 거스르기 어려우니까.”
문득 가동은 불필요한 얘기까지 꺼냈다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시일이 많이 지났는데… 찾는 건 어떻게 됐어?”
공춘홍이 말했다.
“소관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대인께서 명을 내리신 그날 곧장 부하들에게 전달했고, 성문마다 검문을 강화했습니다. 선녀처럼 예쁜 여인이라고 하시어 어여쁜 여인을 다 붙잡아 검문을 하니 백성들은 황상께서 후궁을 들이려는 줄 알더라니까요. 하지만 심열이라는 여인이 성을 나갔다는 보고는 없었습니다.
아직 성 안에 있을 거라는 판단에 임안의 모든 객잔을 다 뒤졌지만 없더군요. 이장들에게 마을에 새로운 얼굴은 없는지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지만 이 역시 없었습니다. 대인,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땅으로 꺼지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가동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찾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녹하는 말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적막이 흐르기 일쑤였고 부부간의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가 이따금 시답잖은 말을 꺼낼 때면 녹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눈을 흘기며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녹하의 푸대접만큼이나, 심열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두려웠다. 시일이 제법 많이 흐른 탓에 자꾸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임안을 이 잡듯 뒤져도 찾을 수 없다니. 정말 잘못된 건 아니겠지?
어쩌면 그날 저택을 도망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그는 관청에 가서 사망 기록부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선녀처럼 예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조금이나마 위안을 안겨주었다.
“다시 찾아.”
그가 말했다.
“우릴 피해 숨어 있는 거니까 객잔을 이 잡듯 뒤져 봐.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잖아. 어떻게든 찾아야 해.”
아무런 소식도 전해지지 않으니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사실 춘위도 끝난 상태였다. 이번엔 영구가 춘위에 함께했고, 가동은 성을 지켰다. 어차피 그도 춘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듣자니 백 장군이 올해도 우승을 했다는 것 같았다. 호랑이를 잡아 부인에게 가죽을 선물했다고.
이번 달이 끝나면 곧 초여름이 시작된다. 곧 댓잎 밥을 먹고 용선을 탈 텐데……. 전부 가동이 즐기는 것들이었지만 올해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영구는 가동을 타일러 보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그는 된서리를 맞은 가지처럼 축 처져 있기만 했다. 영 대인은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가동에게 상황을 물었다.
“어떻습니까? 소식은 좀 있습니까?”
가동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공춘홍이 계속 찾고는 있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어.”
영구가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묻더니 답을 내놓았다.
“성문을 나간 적도 없고 객잔에도 없고 집도 없다면… 가능성은 하나겠군요. 누군가의 집에서 머물고 있을 겁니다.”
가동이 고개를 저었다.
“임안성에 집이 몇 갠데 일일이 찾을 수도 없는 일이잖아. 이곳저곳 들쑤셔봤자 괜히 상황만 더 나빠질 거야.”
영구가 코웃음을 쳤다.
“나빠질 건 아시는군요. 황상마저도 이 일을 아시는데 뭐가 두려우십니까? 대대적으로 찾으십시오.”
“절대 안 돼.”
가동이 말했다.
“내가 강제로 몰아세우다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어찌하려고.”
영구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대잡원大雜院(여러 가구가 함께 모여 사는 집)은 찾아보셨습니까? 워낙 많은 사람이 모여 살고 유동성도 크지만, 그만큼 머무르기도 쉽고 수색을 피하기도 쉽지요.”
가동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긴 너무 지저분하잖아. 시정잡배들이나 사는 곳이니 그런 곳에 가진 않았을 거야. 얼마나 깔끔한 성격인데.”
영구가 끈기 있게 그를 설득했다.
“그래도 한번 찾아보십시오.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곳일수록 찾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영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리 생각을 마친 가동은 직접 순포 오영관청으로 찾아가 공춘홍에게 대잡원을 수색하라고 분부했다. 또한 경계심을 갖지 않게 은밀히 움직이라는 명도 함께 전했다.
사흘째 되는 날, 마침내 소식이 들려왔다.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 중 선녀처럼 예쁜 여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가동이 설명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식을 접한 가동은 영구에게 휴가를 낸다는 말만 남긴 채 서둘러 달려갔다.
대잡원은 아무 일도 없는 듯 태평했다. 암암리에 대잡원을 조사하던 자는 가동이 다가오자 곧장 예를 갖췄다.
“대인, 안녕하십니까.”
가동이 물었다.
“저 안에 있단 말이냐?”
“예. 소인이 이곳에서 계속 지켜보았는데 몇몇 사내들만 들락날락할 뿐, 여인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가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잘 지키고 있거라. 난 안에 들어가 살펴볼 테니.”
대잡원은 이름에 걸맞게 많은 이들이 생활하는 곳이었다. 가동은 좁은 골목을 걸어가다 슬쩍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는 한 여인이 대나무 빨래 건조대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뒷모습은 가냘펐지만, 몸을 돌릴 때마다 아주 살짝 부푼 배가 보였다. 아이를 임신한 것 같았다. 가동은 그녀의 배를 보며 넋을 놓는 한편, 이끌리듯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뒷모습만 봐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한데 저 배는……. 그를 발견한 심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 대인.”
“심열이, 너…….”
가동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배에 머물렀다. 좀처럼 충격이 가시지 않는 얼굴이었다. 저택을 나간 지 삼 개월이 채 되지 않았는데 그새 가정을 꾸렸단 말인가?
심열의 마음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저택을 떠났었다. 그러나 막상 나와 보니 제 배 속엔 아이가 들어선 채였다.
그녀는 조용히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아이를 가동의 저택에 보내 그들에게 은혜를 갚을 계획이었다. 다만 아이를 몰래 낳으면 가 대인이 불쾌해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어쨌든 그는 아이의 아빠가 아니던가. 밖에 서서 얘기하기엔 불편한 내용이었기에 심열이 그를 안으로 청했다.
“대인, 안으로 들어와 좀 앉으시지요.”
가동은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자그마한 방에 가구라고는 침대 하나, 작은 탁자 하나가 다였다. 침대에는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두두가 놓여 있었는데 병아리와 오리를 수 놓은 게 아주 귀여웠다.
작지만 제법 깨끗하게 정리된 방이었다. 여인의 규방에서 나는 옅은 향기만 날 뿐, 사내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방을 한번 둘러본 가동은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대인, 물 좀 드시어요.”
심열은 두 눈꺼풀을 낮게 드리운 채 말했다.
“찻잎이 없으니 아쉬운 대로 물이라도 드시어요.”
가동은 안 그래도 쩍쩍 갈라진 목을 축이고 싶었기에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심열, 아이의 아버지는?”
심열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아버지가 눈앞에 있는데도 입을 떼기 힘들었다. 그녀는 붉게 물든 얼굴을 숙인 채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문을 열었다.
“곧 삼 개월입니다.”
가동이 아무리 멍청하다 한들, 그녀의 말을 모를 리가 없었다. 심열은 석 달 전에 저택을 나갔다. 그녀가 곧 삼 개월의 임부가 되었다는 것은… 그의 아이란 소리였다!
가동은 이 심경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절망 속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찾은 기분이었다. 고목에 새싹이 맺히고 사철나무에 꽃이 피는 듯한 기분, 심지어 수탉이 알을 낳는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수없이 상상했었다. 하지만 늘 상상으로 그쳐야 하는 신기루 같은 존재이자 녹하와 그의 아픔이었다.
황제에겐 세 명의 자식이 있었고 월향과 영구 모두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 부부 슬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간 녹하가 수많은 약을 먹었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제 더는 희망도 없었기에, 이따금 그에게 첩을 들이라고 할 뿐. 그가 거부하자 양자를 들이자는 말도 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양자로 삼을 아이를 찾아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아이가 너무 허약하다는 이유로, 그녀는 아이가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결국 들이지 않았다. 결국 양자를 들이려는 마음도 점점 옅어져만 갔다. 사실 혈연관계가 아니라면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가질 수 없는 것만큼 원하게 되는 게 어딨겠는가? 아이 문제에서는 그도, 녹하도 적잖이 예민했다. 한번은 녹하의 월경이 늦어진 적이 있었는데, 녹하는 아이가 생긴 줄 알고 뛸 듯이 기뻐하며 상여금을 두둑이 챙겨 하인들에게 나눠 주려 했다. 가동은 의원을 불러 확인해 보자고 했지만, 녹하는 한바탕 성질을 부렸다. 아직은 너무 초기라 잘못하면 아이를 놀라게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안타깝게도 결국 헛물을 켰다는 걸 알게 되었고, 녹하는 밤새 베개가 다 젖도록 눈물을 쏟았다. 그 역시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며 며칠 동안 녹하를 위로해 주었다. 그 후 부부는 점점 아이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서로를 향한 칼날과 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연한 기대와 희망이, 가동에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심열이 그의 아이를 품었다고 알려 주었다. 아주 살짝 솟은 그녀의 배 속에서 지금도 자라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