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667)화 (666/1,192)

제667화

심열 또한 가동이 계속 저택을 비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할 겸 산책을 하던 길에, 대문 앞에서 하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곧 새해 연휴가 끝나니 바깥에 나가 잠시 구경 좀 하려고요.”

가동의 하인이 얼른 나섰다.

“부인께도 말씀드리셨습니까? 하면 제가 가마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심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근처만 둘러볼 생각이니 멀리 가진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심열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 뒤, 그들을 지나쳤다. 영구의 하인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저분이 부인의 친척이란 말인가?”

“아니, 부인께서 구해 준 아가씨지.”

가동의 하인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귓속말로 속삭였다.

“부인께선 심열 아가씨를 우리 대인의 첩으로 삼으려 하신다네.”

영구의 하인은 입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자네 대인께선 정말 복도 많으시지. 부인도 저리 아름다운데 첩은 더 미인이라니, 아주 선녀가 따로 없군.”

하지만 그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데 선녀가 저택에 머무는데도 가 대인께선 어찌 우리 저택을 떠나지 않는단 말인가?”

주인을 닮아 가동의 하인도 푼수 같은 기질을 숨기지 못했다.

“무엇 때문이겠나. 부인을 피하는 것이겠지. 생각해 보게. 심열 아가씨가 오기 전만 해도 부인과 대인의 금슬이 얼마나 좋았나. 그야말로 일심동체였는데, 지금은 예쁘고 더 어린 심열 아가씨가 왔으니 부인과 비교가 될 테지.

대인께선 부인을 무서워하시는 걸로 소문이 자자하지 않던가. 부인께서 첩을 들이는 문제에 동의하시긴 했지만… 밤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어떻게 괴롭히시는지 알 수 없지.”

영구의 하인은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랬군. 어쩐지 돌아갈 생각을 안 하시는 것 같더라니. 아이고, 가 대인께서도 참 힘드시겠구먼. 차라리 가 대인께서 며칠 더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부인께 고하지 않는 게 어떤가?”

가동의 하인은 자신이 모시는 대인을 동정했기에 제멋대로 결정을 내렸다.

“그래, 참 가엾기도 하시지. 우리 같은 하인들이 달리 도와 드릴 방법도 없으니 며칠만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해 드려야겠네. 그럼 자네도 그리하는 걸로 알게.”

결국 이 일은 두 하인의 생각대로 결정되었고, 가 대인은 계속 영구의 저택에서 먹고 자며 남의 아들과 부군을 독차지했다.

당연히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는 영구는 녹하가 가동을 데리러 오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생각해 보니 녹하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분명 마음이 상했으리라. 이 일을 알게 된 기홍은 영안을 데리고 녹하를 찾아가려 했지만, 영구가 그녀를 말렸다. 녹하는 강한 여인이니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모르는 척하라는 뜻이었다. 그래야 녹하의 체면을 지켜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영구의 하인은 기홍에게 선녀처럼 예쁜 여인이 가 대인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소식에 기홍은 녹하의 마음을 헤아리고 혼자 있을 시간을 주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속상한 마음도 천천히 옅어질 것이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또다시 며칠이 지났다. 곧 조정에 복귀해야 했기에 가동도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사실 이번 외출은 너무 충동적이었다. 더욱이 녹하를 내팽개친 것이나 다름없으니 생각할수록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제 돌아가겠다는 말을 전하려는데 제 저택에 있던 하인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간담이 서늘해진 가동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하인은 얼굴이 창백해질 만큼 초조해했다.

“대인, 부인께서 어서 돌아오시랍니다. 심열 아가씨께서 보이지 않으신다고요.”

가동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어째서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그것이.”

하인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심열 아가씨께서 떠나셨습니다.”

가동이 허둥지둥 저택으로 돌아가 보니, 녹하는 굳은 얼굴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가동이 들어오기 무섭게 그녀는 먼지떨이를 들고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거야? 심열이는 떠났는데 뭐 하러 돌아와! 아예 영구한테 아들로 받아 달라고 하지. 평생 키워 달라고 말이야.”

가동은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도 넉살 좋게 웃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영구가 나처럼 큰 아들을 어떻게 낳아? 녹하야, 부인! 때리지 마. 난 피부가 거칠어서 괜찮은데 부인 손이 아프잖아. 때리지 마, 부인…….”

가동의 뻔뻔한 모습에 녹하는 정말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다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어디 한번 물어나 보자. 왜 이렇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은 건데. 뒤가 켕겨서 그래? 대체 왜 숨는 건데?”

가동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웅얼댔다.

“그게, 수, 숨은 게 아니야. 심열이는? 난 그저 심열이가 불편할까 봐, 잠시 피해 줬다가 심열이 기분이 좀 나아지면, 그, 그때 돌아오려고…….”

“멍청하긴, 그렇게 숨어 버리니까 심열이가 떠난 거잖아. 자기 때문에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 줄 알고 떠난 거라고. 당신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가동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 난 심열이가 날 마주치기 싫어하는 줄 알았어.”

“당연히 마주치기 싫겠지.”

녹하가 삿대질을 하며 호통쳤다.

“당신이 이러고도 사내야? 그런 짓을 저지르고 홀라당 내빼다니. 남겨진 심열이가 어찌 생각하겠어. 책임을 지기 싫어한다고 여기겠지. 아니면 자기를 싫어한다고 여기거나. 당신이 바보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바보인 줄은 몰랐네. 가동, 대체 내가 뭐라고 하길 바라는 거야?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가동이 그걸 어찌 알겠는가.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죄를 시인하는 표정만 지었다.

“부인, 부인이 하라는 대로 할게.”

녹하가 말했다.

“심열이는 시집을 오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잘 타일러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같이 지내면서 심열에게 믿음직스러운 모습도 보여 주면… 걔도 생각을 바꿀지도 모르지.”

말할수록 화가 치민 녹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가 흐느끼다 또다시 탁자를 내리쳤다.

“난 뭐 쉬운 줄 알아? 일을 저지른 사람은 당신인데, 뒤치다꺼리하는 건 내 몫이잖아. 나도 괴롭다고. 그래도 나까지 넋 놓고 있으면 안 되잖아. 심열이는 아직 어려서 마음도 여리다지만, 당신은 다 큰 사람이 어떻게 나 몰라라 할 수 있어?

난 말야, 살면서 남에게 단 한 번도 빚진 적 없었어. 이번 일도 다 당신이 한 짓이잖아. 다 큰 처녀를 망쳐 놓고 내빼서는 여인이 도망치게 만들고 말이야. 미안한 마음은 들어? 난 당신 때문에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심열이를 내쫓았다고 여길 거라고. 당신이 나한테까지 죄를 뒤집어씌운 거야!”

녹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가동을 때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가동은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가만히 녹하의 분풀이를 견뎠다. 방 안엔 그의 살갗을 짝짝 내리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녹하의 가슴만 미어질 뿐이었다. 이 억울함과 분노를 쏟아낼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얼굴을 감싼 채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가동은 쭈뼛거리다 그녀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토록 강인한 녹하가 통곡하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녀가 무너지는 모습에 가동은 덜컥 겁이 날 뿐이었다.

저택 하인들은 감히 방 안의 소리를 몰래 엿들을 수 없었다. 주인마님의 성미가 워낙 사나우니 잘못 걸렸다간 가 대인보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몰랐다. 결국 하인들은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로 상상해야만 했다. 먼지떨이가 가 대인의 몸을 내리치는 소리가 어찌나 잘 들리는지, 그들은 목을 움츠린 채 달달 떠는 한편, 가 대인을 동정했다. 그렇게 목 놓아 울던 녹하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닦았다.

“난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테니 당신이 심열이를 찾아와. 만약 못 찾아오거든 당신과 끝장을 볼 거야.”

녹하의 매운 손이 그를 사정없이 때린 터라 가동은 온몸이 아팠다. 콧등도 한 대 얻어맞았는지 힘주어 말하지도 못하고 웅얼거렸다.

“응. 내가 찾아볼게.”

그 모습이 무성의해 보였는지, 녹하가 곧장 눈썹을 치켜세웠다.

“크게 말해.”

“꼭!”

입을 더 크게 벌리니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잠시 말을 멈췄던 가동은 아픔을 참고 어떻게든 말을 끝마쳤다.

“찾아올게.”

한바탕 때리고, 욕을 퍼붓고 나니 그래도 화가 어느 정도 풀린 듯했다. 녹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가, 나가. 어서 가서 찾아. 내 눈앞에 그렇게 멍하니 서서 열 받게 하지 말고.”

이런 꼴로 밖에 나가기가 조금 부끄러웠기에 가동은 꾸물거리며 말했다.

“녹하야, 잠깐만 쉬고 내일 찾으러 가면 안 될까?”

녹하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쉬고 싶다고? 심열이는 임안에 아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어. 그리 예쁜 아이가 홀로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봐. 걱정도 안 돼? 기루 같은 곳으로 납치라도 되거나 어디 개뼈다귀 같은 사람한테 잡혀가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면? 그리되면 우리가 맘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아?”

녹하의 매서운 질책에 가동은 다리가 아프긴 했지만, 곧장 밖으로 나갔다. 녹하의 걱정처럼 된다면 저 역시 죄책감에 제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휴, 그런 선녀 같은 애를……. 그도 취하지만 않았다면 감히 건드리지도 못했을 터였다. 흥, 개뼈다귀 같은 놈들이 어딜 감히, 가당키나 한 일인가!

가동은 늘 얼굴에 상처를 달고 살았기 때문에 남들이 비웃는 건 개의치 않았다. 그는 곧장 말에 올라타 구문제독 공춘홍을 찾아갔다. 그의 관할에 있는 순포 오영관청에 심열을 찾는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공춘홍은 일찍이 사장풍의 수하였다. 가동과 사장풍은 고향 친구였기 때문에 공춘홍과 가동의 사이도 제법 좋았다. 공춘홍은 가동을 보자마자 장난스럽게 말했다.

“가 대인, 새해부터 부인의 심기를 건드리신 겁니까?”

가동은 평소처럼 그의 장난을 받아 줄 시간이 없었다.

“사람을 찾아줘야겠어. 최대한 빨리.”

공춘홍은 심각한 그의 표정을 보고 곧장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누구를 찾으십니까? 이름은요?”

가동은 그에게 심열의 상황을 알려 주었다. 공춘홍은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가 대인, 여인을 찾으시면 부인의 심기를 또다시 건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게 조금 어처구니없는 일인지라……. 가동의 낯짝이 아무리 두껍다 한들 함부로 떠들고 다닐 일은 아니었다. 그가 얼버무리며 말했다.

“우리 부인이 찾으려는 거니까 떠벌리진 말고 빨리 찾아 줘. 늦장을 부리다 심열 아가씨가 더 깊숙이 숨어 버리면 찾기 힘들어질 테니까.”

공춘홍의 궁금증은 더욱 커질 뿐이었다. 가 부인이 무슨 일로 여인을 찾는단 말인가? 가 대인이 저리 얻어맞은 걸 보면 무슨 관련이 있는 듯한데. 하지만 가동이 말해 주지 않으니 계속 캐묻기도 어려웠다. 그가 가슴을 다부지게 두드렸다.

“가 대인, 마음 놓으십시오. 최대한 빨리 찾아 드리겠습니다.”

가동은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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