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6화
가동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영구의 말이 맞았다. 늘 티격태격했지만, 난관에 봉착했을 땐 영구가 가장 막중한 책임을 졌다. 영구는 그의 안색을 힐끔 살피더니 그에게 가까이 붙었다.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해 보세요.”
그날 일은 가동의 어깨에 지워진 산이나 다름없었다. 너무나도 무거워서 누군가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고만 싶었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나 영구뿐이었다. 그는 서둘러 정확한 해결 방법과 위로를 얻고 싶었지만, 어찌 입을 떼야 한단 말인가? 그날 일만 생각하면 도무지 낯을 들 수가 없었다…….
평소와 다른 가동의 태도에 영구는 사달이 났음을 직감했다. 그는 가동을 부추기는 대신 올해 춘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황후 마마가 워낙 춘위를 좋아하는 탓에 황상은 이를 중요한 행사로 삼았다.
새해가 지나면 준비를 시작해야 했고 가동과 영구 중 한 명이 일정을 함께했다. 지금까지는 가동이 춘위를 가고 영구가 궁을 지켰는데, 올해는 영구가 춘위를 가고 싶었기 때문에 가동에게 조언을 듣고자 했다.
춘위 이야기가 나오자 가동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기억력이 짧은 것인지 그는 무거운 고민을 잊어버리고서 허세를 부렸다. 심지어 영구에게 자신을 선생이라고 불러야 알려주겠다고 했다.
영구는 그런 가동의 모습이 참 우스웠다. 잠시 생각을 돌리려 한 것뿐인데 저리 허세까지 부리다니.
이품 대원인 두 남자는 젓가락을 한 짝씩 들고 싸우기 시작했다. 영안은 동그란 눈으로 그 광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결국 영구가 승리하자 영안은 아버지를 우러러보며 박수를 보냈다.
“아버지 정말 대단해요.”
가동은 굴복하지 않으며 으스댔다.
“내가 네 아버지보다 더 대단해. 일부러 져 준 거거든.”
영안이 물었다.
“가 숙부, 왜 져 준 거예요?”
가동은 아무 말이나 떠들어 댔다.
“난 손님이니까. 손님은 주인에게 양보하는 법이거든. 네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면 그땐 안 봐줘.”
영안은 조금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보았다. 가동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태자 형님 대단하시지?”
물론 영안도 태자를 잘 알았다. 나이도 어린데 문무를 겸비한 태자의 모습은 늘 감탄을 자아냈다.
“태자 형님은 정말 대단해요!”
가동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기세등등한 표정을 보였다.
“내가 가르친 거야.”
영안의 두 눈이 곧장 반짝였다.
가동은 계속 허풍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귀신보다 무섭다고 불리는 청양 공주도 내 제자고.”
청양 공주 이야기가 나온 순간, 영안의 기분은 가라앉았다. 그녀는 정말 귀신보다 더 무서운 공주였기 때문이다. 지난번 그의 집에 찾아와서는 그가 가진 좋은 물건들을 묻지도 않고 전부 가져갔다. 사나이가 되어 눈물을 흘릴 수는 없으니 공주에게서 제 물건을 빼앗아 오려 했다.
공주는 쉬이 물러서지 않고 그와 맞섰다. 그도 절대 봐주지 않았다. 묻지도 않고 남의 물건을 가져가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지 않은가? 결국 싸움에서 이기긴 했지만… 영안은 아버지에게 한바탕 혼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여인을 때리면 안 되는데 더욱이 공주 전하는 그들의 주인이니 큰 잘못을 범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청양 공주가 집에 찾아오는 게 싫었지만 기홍은 늘 그녀를 반겼다. 공주를 품에 안고 예쁜 꽃송이처럼 활짝 웃는 기홍을 볼 때면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물건을 빼앗아 가는 것도 모자라 어머니까지 빼앗다니, 너무 악랄했다. 결국 영안은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전 공주가 싫어요. 너무 제멋대로예요. 성 황자가 좋아요. 깨끗하고 말도 잘 듣고요.”
기홍이 말했다.
“청양 공주가 더 어리니 네가 양보해 줘야 해. 너희 중 공주만 여인이잖아. 황상께서도 공주를 얼마나 끔찍이 아끼시는데. 다음번에 공주께서 놀러 오시거든, 좀 더 예의 있게 대해 드리렴.”
영안은 코웃음을 치며 여전히 불만을 표시했다. 기홍이 손을 뻗어 영안을 안았다.
“자, 이제 배도 부를 테니 씻고 낮잠 좀 자렴. 그래야 아버지와 숙부도 편히 말씀을 나누시지.”
다른 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기홍은 가동에게 걱정이 있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보아하니 그녀 앞에서 말하기 어려운 일인 듯하여 영안과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기홍과 영안이 시중을 들던 하인들도 함께 물러났다. 영구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이제 말해 보세요. 말 안 하면 진짜 제가 다 마셔 버리겠습니다.”
가동은 탄식을 내뱉더니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영구야, 나 여인이랑 잤어.”
영구가 젓가락으로 집고 있던 고기를 떨어뜨렸다. 이런 문제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그가 황급히 물었다.
“녹하가 쫓아냈습니까?”
“아니.”
“그럼 얻어맞았습니까? 어딜 다쳤습니까?”
“안 맞았어.”
영구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아는 녹하가 가만히 있었다고? 가동이 다른 여인과 잤는데 그 사나운 녹하가 어찌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어서 말해 보십시오. 애태워 죽일 작정이십니까?”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영구였지만 이번 일만큼은 초조하게 물었다.
“녹하가 나더러 그 애를 첩으로 들이래.”
“그럼 들이십시오.”
“그 애는 시집을 오지 않겠대.”
영구는 한 번 더 놀랐다.
“종이품 직함을 거부하는 여인이 있단 말입니까? 종실 사람입니까?”
“아니. 팔자 사나운 고아야. 새해 직전에 몸을 팔아 아버지 장례를 치르려는 걸 녹하가 도와줬고 저택에서 머물게 했거든.”
그제야 상황 파악을 마친 영구가 번들번들하게 웃었다.
“해서 그 애를 넘본 것이군요?”
“나, 난 그날 너무 취해서 그 애가 녹하인 줄 알았어.”
영구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분명 예쁜 얼굴이겠군요. 안 그럼 아무리 취해도 녹하로 여기진 않을 테니까요.”
영구의 말에 가동은 또다시 기세등등해졌다.
“그럼.”
그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엄청 예쁘지. 선녀가 따로 없어. 그 애가 널 보고 웃잖아? 그럼 너도 금세 홀릴걸.”
“아무튼.”
영구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 애가 예뻐서 잤고, 녹하도 반대하지 않으니 어서 첩으로 들이십시오.”
가동이 서둘러 해명했다.
“내가 그리 천박한 사람이냐? 예쁘게 생겼다고 자게. 난 잔뜩 취했었다고.”
“굳이 해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똑같으니까요.”
“왜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거야. 난 정말 취했다니까.”
“알겠습니다. 취했다고 합시다. 취했으니 더 좋았겠네요.”
영구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평소엔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 말해 보세요. 어땠습니까?”
가동이 꾸물거리다 답했다.
“말을 아주 잘 듣더라고. 내가 하라는 대로…….”
“어떻게 하라고 했는데요?”
가동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얼굴을 가렸다.
“에휴, 더는 말 못 해.”
영구는 탁자를 내리치며 박장대소했다.
* * *
심열이 저를 피해 자리를 뜬 광경만 떠올리면 가동은 마음에 가시가 박힌 듯했다. 결국 그는 하인을 보내 며칠간 영구의 저택에서 지내겠다고 녹하에게 전했다.
날이 추웠음에도 영안은 짧은 다리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녔고, 가 대인은 영안의 그림자라도 된 것처럼 아이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 결과 이번엔 영구가 근심에 잠겼다. 영안도 이렇게까지 그에게 들러붙으려 하지 않거늘.
평소 영구는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혼인 후 사랑하는 여인과 규방에서 보내는 즐거움을 알게 되자 그는 자주 기홍과 다정한 한때를 즐겼다. 그러나 가동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영구는 대놓고 가동에게 말했다.
“그만 가십시오. 밥이며 술이며 충분히 얻어먹지 않았습니까. 평생 우리 집에 눌어붙을 생각입니까? 전 처자식만 돌보지 다른 이는 안 돌봅니다.”
가동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난 네 체면을 살려 주려고 여기서 지내는 거라고. 내가 누구야? 태자께선 몰래 날 양부라고 불러 주신다고. 날 손님으로 모시는 걸 영광으로 알아.”
이런 뻔뻔한 사람 같으니! 역시 가동과는 이치를 따지기 어려웠다. 영구는 하는 수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좋게 타일렀다.
“가 대인, 제 말대로 돌아가 혼사를 준비하십시오. 여인이 원치 않거든 잘 타이르시고요. 녹하를 보내지 말고 형님이 직접 찾아가서 진심을 보이셔야 합니다. 조건도 좋겠다, 형님에게 시집을 오면 운이 트일 거라는 건 그 여인도 다 알 것입니다. 어서 가십시오. 얘기도 잘해 보시고요.”
가동이 고개를 저었다.
“그 애가 시집을 오겠다고 해도 내가 싫어. 부인은 한 명이면 족해. 한 명을 더 들이면 편안한 날들도 끝이겠지.”
영구도 더는 타이르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그를 돌려보내는 게 우선이었다.
“그럼 들이지 마시고 다른 곳으로 보내십시오. 집을 하나 사서 주면 되지 않습니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편해지겠죠.”
“녹하가 안 된다잖아. 죄를 짓는 거래.”
“그럼 계속 저택에 두십시오. 아예 정원 하나를 내어 주고 적당한 신랑감이 생기거든 시집을 보내세요. 적당한 자가 없거든 늙을 때까지 돌봐 주십시오. 그럼 되지 않습니까.”
“그 애가 저택에 있으면 너무 불편해.”
“그럼 첩으로 들이십시오. 자기 사람이 되면 불편할 일은 없잖습니까.”
“혼인은 그 애도 원치 않고 나도 싫어.”
몇 번을 달래 봐도 이야기는 원점이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좋게 타일러도 가동은 도통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자기 기분이 언짢다고 남의 집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꼴이었다.
영 대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동이 저지른 실수이건만, 왜 그까지 벌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는 일 년에 며칠만이라도 조용한 날을 보내길 간절히 바랐다. 한데 이런 성가신 일로 제대로 쉬지도 못하다니.
결국 영구는 가동의 저택에 사람을 보내 가동을 데리고 가라는 소식을 전했다. 며칠 안 되는 휴일을 가동에게 전부 뺏길 순 없었다.
영구와 가동의 하인들은 서로 친숙한 사이였다. 평소 왕래도 잦은 터라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가동의 하인이 영구의 하인을 발견하고 곧장 말을 건넸다.
“우리 대인께선 잘 지내시는가?”
“말도 말게.”
영구의 하인이 혀를 내둘렀다.
“우리 저택에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시어 부인께 데리러 오라는 말씀을 드리러 왔네.”
가동의 하인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대인께서 워낙 영 대인과 함께 계시는 걸 좋아하시지 않나. 오랜 시간 함께 지내온 게 익숙하시니 말일세.”
영구의 하인이 의문을 제기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다들 가족이 생겼으니 말일세. 모처럼 연휴인데 가 대인께선 어찌 부인과 함께 계시지 않고?”
“부인께선 심열 아가씨와 자주 시간을 보내시니 가 대인께서 꼭 곁에 없어도 되지.”
그때, 누군가의 인기척에 가동의 하인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고, 심열 아가씨, 어딜 가시려는 것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