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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65)화 (664/1,192)

제665화

“하면 대인이 그리하는데… 어찌 소리도 지르지 않은 거야?”

“대인께서는 술에 취해 상황 판단을 못 하셨습니다. 혹여 제가 소리를 질러 정신을 차리시면 서로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테니…….”

녹하는 그제야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심열은 그 순간에도 가동의 체면을 신경 썼던 것이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 어찌 남의 체면을 신경 쓴단 말인가. 그녀는 속으로 긴 탄식을 내뱉었다. 이 맹한 아가씨 같으니!

“시집을 오기 싫으면, 이제 어찌하려고?”

심열은 입술을 깨물었다.

“암자에 들어가겠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녹하의 마음도 아릿해져 왔다.

“이 언니가 있는 한 비구니가 되게 할 순 없어. 언니도 좀 더 생각해 볼게.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심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 속눈썹이 떨리며 구슬 같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녹하는 만감이 교차했다. 자신에 대한 감정이기도, 심열에 대한 감정이기도 했다. 그녀는 심열을 꼭 안아 주며 등을 토닥였다.

“겁낼 것 없어. 언니가 있잖아.”

“부인…….”

“아직도 부인이라니, 언니라고 불러 봐.”

녹하가 속삭이듯 말했다.

“대인한테 시집을 오지 않아도 이곳에서 지내도 돼. 언니가 널 지켜 줄 테니까.”

심열은 녹하가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 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심열은 녹하를 꼭 끌어안고 울먹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언니.”

“응.”

녹하의 두 눈에서도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가동은 심열이 시집을 오기 싫어한다는 말을 듣고 한시름 놓았다. 그도 심열과의 혼인을 원치 않았으니까. 녹하와 둘만의 세상에 누군가 끼어들다니! 상상만 해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처를 많이 둔 자들이 얼마나 복잡한 삶을 사는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삶이 어떻든 그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복잡한 관계보단 녹하만 있는 게 좋았다. 황상께서도 황후 마마뿐이고, 영구도 기홍밖에 없는데 그가 어찌 새 사람을 들인단 말인가. 정말 내키지 않았다.

마음이 놓이는 한편… 괜히 불쾌하기도 했다. 제게 시집을 오는 게 왜 싫단 말인가? 생긴 게 출중하지 않아서? 배운 게 별로 없어서? 바보라서? 생각할수록 가동의 입술이 쭉 나왔다.

새해를 맞아 며칠간 휴일이 주어졌지만, 가 대인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늘 활기차던 그가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하인들은 의아하게 여길 따름이었다. 녹하도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지만, 그녀의 눈매에 담긴 근심을 숨길 수 없었다. 심열 아가씨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평소엔 늘 일손을 도왔는데 요즘은 방에서 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심한 사람은 녹하였다. 그런 큰일을 겪고도 평소처럼 살아가려 애쓰는데, 사고를 친 두 사람은 두문불출하니 그녀의 속이 타들어 갈 수밖에.

그녀는 축 처져 있는 가동을 밖으로 내쫓았다. 그때, 심열도 두 시녀에게 이끌려 바깥에서 빙등을 구경하고 있었다. 빙등 표면에 맺힌 얼음 부스러기가 흩날릴 때마다 영롱한 빛이 햇살을 받아 사방으로 반짝였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반짝이며 사라지는 얼음 조각이 마치 제 모습같아, 심열의 낯빛이 차츰 어두워졌다.

그때 누군가의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가 대인이었다. 그도 마침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 두 사람은 곧장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돌렸다. 발걸음을 재촉하긴 해도 심열은 제법 안정적으로 나아간 반면, 가동은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러다 그만 눈 아래 고여 있던 물웅덩이를 밟아 신발과 양말까지 젖고 말았다.

하인들은 몰래 눈짓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했다.

가동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젠 자신뿐만 아니라 심열마저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징그러운 뱀이라도 본 듯 저를 보고 허겁지겁 달아나는 모습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신발과 양말을 갈아 신었다. 그때 녹하가 영구와 술 한잔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능사는 아니니, 바람 좀 쐬라는 의미였다.

결국 가동은 수행원 없이 영구의 저택을 찾았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두꺼운 솜옷을 입고 호랑이 모자를 쓰고 있는 영안이 보였다. 두 볼이 발그레 물든 영안은 커다란 눈망울로 처마 끝에 달린 고드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동을 싫어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를 발견하자 영안은 헤헤 웃으며 안아 달라고 손을 뻗었다. 가동은 곧바로 아이를 안고 입을 맞췄다.

“날씨도 추운데 왜 밖에 서 있어?”

포동포동한 아이는 제법 기세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추운 건 하나도 겁 안 나요.”

“대단한걸.”

가동은 아이의 호랑이 모자를 토닥거렸다. 녹하가 만들어 준 모자였다. 별안간 그날 밤 일이 가동의 머리를 스쳤다. 만약 심열이 이렇게 예쁜 아들을 낳아준다면, 정말이지…….

“가 숙부.”

영안이 그의 얼굴을 손으로 치며 물었다.

“왜 그리 웃고 계세요?”

가동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내로 맞이할 생각도 없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니… 너무 파렴치했다. 그조차 자신이 싫어질 지경이었다.

그는 멋쩍게 웃어 보이다 영안을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 앞을 지나면서 슬쩍 들여다보니 영구가 기홍의 눈썹을 그려주고 있었다. 가라앉은 마음이 가동의 두 다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는 굳은 듯이 서서 아련한 추억에 잠겼다. 녹하와 그도 저렇게 사이가 좋았는데…….

사실 규방에서의 애정 행각은 저 나무토막 같은 영구보다 제가 훨씬 더 많이 했으니, 더 능숙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일 이후, 가동과 녹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줄어들었고, 잘 때에도 녹하는 등을 보였다. 가끔 짧은 대화를 나눌 때면 녹하는 은근히 뼈가 있는 말을 툭툭 내뱉었다. 그럼 그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말뜻을 이해하려 한참이나 애쓰곤 했다.

경계심이 뛰어난 영 대인은 외부인이 밖에 서 있다는 걸 인지했다. 그가 민첩하게 창문을 열자 가동의 모습이 보였다. 영구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새해부터 부인과 있지 않고 어찌 여길 찾아오셨습니까?”

“새해 인사도 못 한단 말이야?”

“이미 하지 않았습니까?”

영구가 그를 흘겨보았다.

“게다가 빈손으로 새해 인사를 오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가 대인, 이이 말씀은 듣지 마시고 어서 들어오세요. 날이 춥습니다.”

가동은 안으로 들어가 영구를 혼냈다.

“이렇게 추운 날에 영안 혼자 바깥에 서 있게 하고 말이야. 아비라는 사람이 어찌 그리 모질어?”

기홍이 가동에게 안겨 있는 영안을 데려와 자그마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춥지?”

영안이 고개를 저었다.

“안 추워요. 아버지께서 사나이는 뭐든 다 이겨내야 한다고 하셨어요.”

가동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이거 봐, 아이를 대체 어찌 가르친 거야? 이렇게 어린아이는 보물처럼 아껴 줘야지! 쓸데없는 거나 가르치고 말이야. 그럴 거면 내가 아들로 삼을 테니 나한테 보내. 내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줄 테니까.”

영구가 그를 놀렸다.

“형님이 하는 건 보살펴 주는 게 아니라 조상님처럼 떠받드는 것이지요.”

가동이 코웃음을 쳤다.

“얼마든 떠받들지!”

기홍이 영안을 내려놓자 가동이 또다시 안아 들었다. 자식이 없으니 다른 집 아이라도 안아볼 수 있을 때 마음껏 안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는 영안을 안고 의자에 앉아 기괴한 표정을 지으며 놀아 주었다. 영안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자그마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꼬집었다. 어른과 아이 둘 다 시시덕거리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누구보다 그의 마음을 잘 아는 영구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술을 가지러 나섰다. 영구와 함께 밖으로 나온 기홍이 문득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 대인에게 무언가 걱정이 있는 것 같네요.”

영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보나마나 아이 걱정이겠지요. 아이를 저리 좋아하는데 첩도 들이려 하지 않으니 힘들 수밖에요.”

기홍이 목소리를 낮췄다.

“녹하를 너무 은애하니 녹하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겠지요.”

“양자를 하나 들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

영구가 말했다.

“친자식만 원하더군요. 훗날 잘 기르지 못해 배은망덕한 자식이 될까 걱정인가 봅니다. 나였다면 첩을 들였을 텐데 말이에요. 대를 잇는 것이라면 녹하도 무어라 하진 못할 텐데.”

기홍은 곧장 그를 흘겨보았다.

“그러니까 영 대인은… 제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기어이 첩을 들이겠단 말이군요?”

영구는 별안간 불똥이 제게 튀자 멋쩍게 웃었다.

“우린 아이가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아이를 낳을 때 고생했던 것만 떠올리면 두 번 다신 낳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면 족해요.”

기홍이 말했다.

“전 그래도 딸을 낳고 싶어요. 영안은 당신과 똑같으니 점점 차가운 성격이 되겠죠. 살가운 딸 하나 키우고 싶어요.”

영구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내가 있지 않습니까. 정성을 다해 당신을 모실 테니 걱정 말아요.”

두 사람은 복도 끝에서 헤어졌다. 한 사람은 술을 가지러 가고, 다른 한 사람은 부엌으로 향했다. 기홍은 가 대인이 올 때마다 늘 정성을 들인 음식을 내어왔다. 황상과 황후, 월향과 월규, 그리고 가동과 녹하는 귀천도 다르고 신분도 달랐지만, 그녀에겐 모두 소중한 가족이었다.

밥을 먹을 때가 되어서야 영구는 기홍의 말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 가동은 웬일로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가 술을 앞에 두고도 입에 대지도 않는다는 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영구는 굳이 권하지 않고 한 모금 들이켰다.

“마시지 마십시오. 이게 양산凉山에서 온 옥주玉酒입니다. 고산 지대의 맑은 샘물로 만든 술이지요. 제게 한 병밖에 없는 술이라 줄곧 땅광에 뒀습니다. 보십시오. 입구에 성에가 끼지 않았습니까? 새해를 쇨 땐 사람이 많아서 아껴 두었다가 형님이랑 함께 마시려고 꺼내둔 것인데… 됐습니다. 저 혼자 마시면 되지요. 어차피 그리 많지도 않으니까요.”

가동이 코웃음을 쳤다.

“있는 척하기는. 너나 마셔. 대신 술 취해서 실수하지 마라. 술 먹고 실수하면 진짜 큰일이야, 큰일! 후회해도 소용없다고.”

영구가 곧장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술을 드시고 실수라도 한 겁니까? 어떤 실수를 하였는데요? 한번 말해 보십시오. 오랜만에 형님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크게나 웃어 봅시다.”

가동이 얼굴을 붉히며 기홍을 바라보았다.

“들었죠? 난 얘를 형제라고 생각하는데… 얜 내가 잘못되기만 바란다니까요?”

영구가 말했다.

“어찌 그리 눈치가 없단 말입니까? 진짜 비웃겠다고 한 말이겠습니까? 해결 방법을 생각해 주겠단 얘기지요. 솔직히 형님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제가 뒤에서 안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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