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664)화 (663/1,192)

제664화

“이제 어떡할 거야?”

가동이 그걸 어찌 알겠는가. 그는 혼이 쏙 빠진 상태였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녹하는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말해!”

흠칫 놀란 가동은 쭈뼛대며 말했다.

“보, 보상해야지.”

“어떻게 보상할 건데?”

녹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가 나가 줄게. 둘이 잘해 봐.”

“부인.”

가동의 안색이 급변했다.

“내가 잘못했어. 너무 취해서 정말 당신인 줄 알았어.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야. 제발 믿어 줘, 부인.”

“심열이가 좋아?”

가동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우리 부인 말고는 다 싫어.”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이런 일이 일어난 이상 책임을 져야지. 새해가 되거든 혼사를 올려.”

“아니야. 부인,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가동은 간절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첩을 들이지 않을 거야.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싫어.”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녹하는 다시 화가 치밀었다.

“이보세요, 가씨. 이러고도 사내대장부야? 일을 저지르고도 오리발을 내밀겠다고? 저 여인은 어찌해야 하는데? 어찌 살라는 거냐고!”

가동도 그녀의 말이 옳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명백히 그의 잘못이었다. 그가 여인을 취했으니 응당 책임을 지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첩을 들이는 것만큼은, 정말 원치 않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심열이 예쁘긴 해도 그녀를 첩으로 들이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그저 자신의 집에 예쁜 여인이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우쭐대며 허풍을 떠는 정도였다. 나중에 좋은 신랑감을 찾아 시집을 보내줄 생각이었다. 하늘에 대고 맹세하건대, 자신을 그녀의 신랑감으로 여겼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녹하가 바닥에 나뒹구는 작은 족자를 집어 들더니 천천히 펼쳤다. 그녀의 초상화였다.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던 녹하는 자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심열이는 얼굴도 예쁘고 학자 집안 출신이야. 그런 애를 신부로 맞이하는 건 네 복이야. 이런 여인도 싫다니 선녀를 들이고 싶은 거야?”

가동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가 녹하를 끌어안았다.

“녹하야, 난 너밖에 없어. 아무도 들이지 않고 우리 둘만 잘 살면 안 돼?”

그러나 녹하도 진득한 슬픔에 잠겨 있었다.

“지금까진 강요하지 않았지만, 이젠 나도 어쩔 수 없어. 심열은 좋은 애야. 영문도 모르고 잠까지 잤는데 그냥 지나갈 생각이야? 소문이라도 나면 우릴 뭐라고 생각하겠어? 내가 허락하지 않아서 네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하겠지.”

가동은 입술을 힘껏 깨물더니 해결 방안을 내놓았다.

“심열이한테 돈을 주자. 멀리멀리 떠나라고 말이야.”

녹하는 가동을 밀쳐내고 눈을 부릅떴다.

“그런 뻔뻔한 말이 어디 있어. 몸을 더럽혀 놓고 어딜 가서 살라는 말이야? 가동, 당신이 고의였든 아니든 일을 저지른 이상 책임을 져야 돼. 제발 더 이상 실망하게 하지 마.”

말을 마친 그녀가 이불을 휙 젖혔다.

“넋 놓지 말고 어서 옷 입어. 심열이랑도 얘기해 봐야지.”

이불 위엔 얼룩덜룩한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붉은 매화가 이불에 피어난 듯했다. 이를 본 가동은 흠칫 놀라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녹하는 묵묵히 침대 요를 벗기고 잘 갠 뒤, 보자기에 싸서 상자에 담았다.

* * *

비틀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심열은 침대에 무너졌다. 왈칵 눈물이 나왔지만, 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던 그녀이기에 감히 소리를 내어 울 수 없었다. 밖에 소문이라도 나면 안 될 일이었으니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삼켰다. 조금 전 일은 그녀의 생각에 없던 일이었다. 그저 가 대인에게 이불을 잘 덮어 주려 했을 뿐인데…….

그날 시녀들의 대화를 엿듣고 부부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대신 아이를 낳아 주는 건 어떨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 대인과 부인의 애틋한 사이를 그녀도 잘 알기에, 생각을 접었다.

가 대인이 그녀를 침대로 잡아끌 때만 해도 그녀는 가 대인을 생각해 혹여 그가 민망해하진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뒷일이 그리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처음엔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했지만, 나중엔 순종적인 태도로 따랐다. 그 순간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녀도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은혜를 갚고 싶던 마음이 더 컸던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하늘이 그녀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어 아이를 갖게 된다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그녀를 온순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 대인은 어찌… 어찌 그런 걸 시킬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이불에 얼굴을 파묻자 수문이 열리듯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 *

저택 하인들은 다들 의아해했다. 섣달그믐날 밤이 되면 대인은 부인과 함께 반 시진 정도는 폭죽을 터뜨렸다. 이는 저택에서 제법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폭죽을 좋아하는 부인을 위해 대인은 폭죽으로 유명한 강남 지역의 폭죽을 구비해 놨다가, 섣달그믐날 터트렸다. 덕분에 매년 정해진 시간이 되면 다들 바깥으로 나와 폭죽이 터지기만 기다렸다. 어찌 된 일인지, 올해는 아무리 기다려도 폭죽을 터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인들은 두 주인이 안채에서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책임감이 강한 녹하는 일단 슬픔을 가슴 저 깊숙한 곳에 밀어두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했다. 큰일이 생겼을 땐 남자들보다 여인들이 더 냉철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녹하는 머리카락만 쥐어뜯는 가동을 바라보며 호통쳤다.

“쥐어뜯지 마. 대머리가 되고 싶어서 그래?”

“녹하야, 미안해.”

가동은 침대에 엎드린 채 울상을 지었다. 아니 정말 울었다. 막을 길도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녹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고 지금껏 다른 마음을 먹은 적도 없었다. 한데 한순간의 실수로 지조를 잃다니. 녹하는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찌 이런 일에 눈물을 쏟고 그래. 영 대인이 알면 아마 삼 년 정도는 비웃을걸.”

“걔가 비웃는 건 하나도 겁 안 나.”

가동이 녹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녹하야, 난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야. 이제 술은 다신 안 마실게!”

녹하는 그를 밀어내고 밖으로 나가 따뜻한 물을 떠 왔고, 수건에 물을 적셔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이제 곧 새해잖아. 장례를 치르는 것도 아닌데 왜 울어. 울지 마. 좋은 일이야.”

그녀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참 대단하지. 당신한테 첩을 들이라고 했지만 속으론 싫었어. 하지만 하늘이 주신 기회로 첩을 들이게 됐잖아. 심열이는 얼굴도 예쁘고, 출신도 좋고, 글도 잘 쓰고 그림까지 잘 그리니까 당신한테 과분한 사람이야. 나중에 심열이가 당신 자식을 낳아준다면 나도 그걸로 족해.”

그녀의 말에 가동은 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더 서럽게 울었다. 녹하는 가동과 함께 심열을 찾아갈 생각이었지만, 그의 몰골은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고민 끝에 결국 그녀는 홀로 다녀오기로 했다.

새해를 맞아 저택 하인들도 제각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바빴다. 각자의 방에서 마작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그 덕에 바깥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복도에 걸린 붉은 등불만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녹하는 누구도 마주치지 않고 빠르게 복도를 통과했다. 모퉁이만 돌면 심열의 처소였다. 곧 그녀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심열은 침대에 엎드려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녹하에게 무릎을 꿇었다.

“부인, 송구합니다. 제가…….”

서럽고 억울한 마음에 심열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녹하가 서둘러 그녀를 일으켰다.

“착한 우리 동생, 이게 무슨 짓이야. 어서 앉아.”

녹하는 심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녀의 얼굴에 남은 차가운 눈물을 보고 있자니, 녹하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찻주전자를 만져 보니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심열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울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천천히 해 봐.”

오늘 밤 일에 대해서는 녹하도 단정할 수 없었다. 가동이 술에 취해 그런 것인지, 심열이 미리 꾸민 짓인지. 어쨌든 가동이 그녀의 방을 찾은 게 아니라 그녀가 가동을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녀와 심열은 서로 안 지 오래되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심열은 계략 따위를 쓰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 얘기하는지부터 들어 보기로 했다. 심열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자꾸만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이제 정말 널 아우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

녹하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 이렇게 되었으니 대인께 제대로 혼사를 올리라고 할게. 그리고 더는 첩을 들이지 못하게 할 거야. 이 저택에서 우리 둘이 진정 자매가 되어 사는 거지. 심열이 네가 억울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대인께서 심열이 너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사실 아이나 마찬가지거든. 인정도 많고 심성도 착하니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거야.”

“부인!”

심열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부인께서 절 가엽게 여겨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시집은 절대 갈 수 없습니다.”

“어째서?”

녹하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걸핏하면 이렇게 무릎이나 꿇고. 난 줄곧 널 여동생이라고 여겼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이 언니한테 해 봐. 언니가 해결해 줄게.”

심열은 훌쩍거리며 말했다.

“전 팔자가 사나운 사람입니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지금은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지요. 세상에 피붙이 하나 없는 혈혈단신입니다. 다행히 부인께서 저택에 머물 수 있게 해 주시어 이 목숨, 부지하고 삽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첩은커녕 노비가 된다 해도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누구에게 시집을 가든 상관없지만, 대인께만큼은 절대 갈 수 없습니다.”

녹하가 물었다.

“혹시 가 대인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대인처럼 선량하고 성품이 좋으신 분께는 제가 너무 부족할 따름입니다. 대인과 부인께서는 서로를 존중하고 금실이 좋으시니 두 분을 보는 사람마다 부러워합니다. 무엇보다 부인께선 제게 다시 얻은 부모님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절대 대인께 시집을 갈 수 없습니다.”

다급하게 말을 잇는 그녀의 진실한 모습을 보며 녹하는 작은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어째서 부부의 침실로 찾아왔단 말인가? 녹하는 심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난 심열이 네가 좋아. 앞으로도 너와 함께 지내고 싶어. 난 네가 대인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대인이 취해 침대에 누워 있으니…….”

녹하의 말뜻을 알아들은 심열은 서둘러 해명했다.

“전 부인을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언제든 놀러 와도 좋다 하시어 찾아간 것인데 대인만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인께서 술에 취하시어 이불을 다 걷어차셨길래 덮어 드린다는 게… 부인, 제가 경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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