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3화
심열이 가동을 찾아온 후로, 그는 더 이상 그녀를 피하지 않았다. 저택에서 그녀를 마주칠 때면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고 서로 옅은 미소까지 보였다.
기억력이 좋지 않았던 가동은 그간 마음속에서 앓던 일도 잊어버렸다. 지금은 심열을 만나는 게 오히려 좋았다. 어쨌든 그녀의 예쁜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다른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건 누구나 좋아하지 않던가.
가동은 종종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녹하에게 줄 선물을 사 왔는데, 이젠 심열의 것도 같이 사 왔다. 그것도 아무렇지 않게 녹하의 면전에서 전해 주었다. 그럴 때면 심열은 부끄러워하며 꼭 한 번씩 사양한 뒤에 겨우 받곤 했다.
처음엔 가동도 녹하가 화를 낼까 봐 걱정했지만, 녹하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그의 행동을 칭찬했다. 이왕 함께 지내기로 했으니 가족처럼 대하는 게 옳았기 때문이다.
심열은 마음속으로 녹하를 친언니처럼 여겼고 가동을 형부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형부가 점점 더 재미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입을 열면 누구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생각이 깊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손에 힘겹게 커 왔다. 지금은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어 남에게 얹혀사는 처지가 되었다. 비록 가 대인과 부인이 그녀에게 부족함 없이 대해 주지만, 그녀는 자신의 분수를 제대로 알고 있었기에 혼자 있을 땐 남몰래 슬픔을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 대인이 점점 그녀의 슬픔을 달래 주었으니까. 그녀는 정말 이 집안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곳이 자신의 집 같았고 이 집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다.
연말이 가까워지니 저택 곳곳에 홍등을 내걸고 창문에는 장식을 붙였다. 새빨간 석류를 담은 대야를 계단 밑에 놓고, 장막에도 금실과 은실로 수를 놓으니 명절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었다.
섣달그믐날에는 연말 분위기를 즐기려는 황후 마마의 요청으로 가동과 녹하 모두 궁에서 식사를 했다. 가동은 기쁜 마음에 과음을 했고, 덕분에 말에도 오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결국 녹하와 함께 좁은 가마에 몸을 싣는 그를 보며, 영구는 한참 동안 비웃었다. 가동은 녹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웅얼거렸다.
“영구, 너 기다려. 황상이 계셔서 내가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 했으니까. 너 딱 기다려.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누가 더 잘 마시는지 다시 겨뤄…….”
녹하는 고개를 숙이고 그를 흘겨보았다.
“됐어. 이렇게 취해 놓고 또 영 대인이랑 술을 마시겠다고? 집에 가서 한숨 푹 자고, 숙취에 좋은 차나 마셔. 이따 밤에는 폭죽도 터뜨려야 하잖아.”
“나도 알지.”
녹하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가동이 웅얼거렸다.
“약속할게. 당신이랑 관련된 일은 내가 절대 잊지 않겠다고…….”
“알겠어, 알겠어. 그만 말하고 좀 자.”
녹하는 다 큰 애를 안듯 그를 품에 안았다. 혼인한 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그녀는 적잖이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아이가 곁에 있으니, 아이와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가동을 꼭 끌어안고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속상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녀는 늘 가동을 위로했다. 아이가 없어도 부군이 있으니, 괜찮다고 말이다.
저택으로 돌아온 녹하는 가동을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이불을 덮어 주는데 관리인이 앞에서 고했다.
“부인, 하인들에게 줄 연말 상여금을 준비해 두었으니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또 시골 별장에서 물건을 보내 곳간에 보관해 두었으니 그것도 확인해 보십시오.”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알겠네. 오늘은 저택에 별일 없거든 각자 알아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전하게. 이곳에도 굳이 하인을 둘 필요 없네. 대인께서 한숨 푹 쉬고 일어나시거든 폭죽을 터뜨릴 걸세.”
관리인은 그리하겠다고 답한 뒤, 녹하를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 동월국에서는 음력 섣달그믐날 밤을 지새우며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있었다. 집마다 등불을 내걸고 술을 마시며 마작을 하거나 폭죽을 터뜨렸다. 이날 밤은 야간 통행 금지도 없었기 때문에 거리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황궁과 가까운 가동의 저택에서도 폭죽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동쪽을 바라보니, 화려한 불꽃이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았다. 절로 손뼉을 치고 싶을 만큼 근사한 광경이었다.
심열은 곱게 만 족자를 들고 있었다. 오늘 녹하에게 전해 주려고 일찌감치 준비해 둔 것이었다. 그러나 녹하가 아침 일찍 입궁하여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줄 수 없었다. 종일 기다리던 그녀는 녹하가 저택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황급히 찾아갔다.
안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의아한 기분에 안방에 들어가 보니 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침대에 누워 약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니 가 대인이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보아 과음을 한 모양이었다. 가 대인은 평소 성격처럼 잘 때도 제멋대로였다. 팔은 밖으로 쭉 뻗어 있고 이불은 반쯤 젖혀놓은 상태였다. 심열은 좀 더 앞으로 다가가 그의 이불을 여며주었다. 이불에서 손을 떼는 순간, 별안간 가동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눈도 뜨지 못한 채로 웅얼거렸다.
“녹하야, 나랑 잠깐만 자자…….”
심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조용히 손을 빼내려 했지만, 어찌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있을까. 그녀가 힘을 쓰니 조금 짜증이 났는지, 가동은 아예 그녀의 허리에 팔을 휘감고 침대로 끌어당겼다.
심열은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도 내지 못했다. 만약 가동이 지금 깨어난다면 서로 민망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었다. 전례도 있지 않은가. 차라리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게 나았다.
그의 입술이 더 빠르게 다가오더니, 뜨거운 불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피어났다. 겨우 십대인 그녀가 이런 일을 겪어 본 적이나 있겠는가? 머릿속에서 벼락이 내리꽂히는 기분에 심열은 얼어붙고 말았다.
정신을 겨우 차렸을 땐 어쩐지 가슴이 조금 서늘했다. 어느새 그녀의 옷은 두두만 남아 있었다…….
심열은 그의 커다란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엔 기겁할 만큼 놀랐지만, 지금은 부끄러움과 화가 밀려왔다. 응당 그의 뺨을 때려 깨워야 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몸에 힘이 쭉 빠져 축 늘어졌다.
가동은 취기 반, 꿈을 꾸듯 몽롱한 기운 반이었다. 어쩐지 오늘은 살결이 더 부드럽고 온순한 녹하에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가동은 입을 맞추며 천천히 눈을 떴다. 분명 마마께서 녹하에게 상으로 좋은 걸 내린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향기가 좋고 부드럽단 말인가?
품 안에 안긴 여인이 몸을 살짝 떨었다. 아무래도 날이 추워서 그렇겠지. 가동은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녹하야, 지난번에 내가 말했던 거. 그, 그거, 오늘은, 해야 돼…….”
여인은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그저 눈을 꼭 감았다. 긴 속눈썹이 작은 새처럼 애처롭게 떨리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가동은 그녀의 눈꺼풀에도 입을 맞췄다.
“난 겁 안 나는데, 왜 당신이 겁을 내는 거야. 난 그저, 당신이 날 물까 봐 겁나는걸…….”
지난번에 녹하에게 이 일을 언급했다가 하마터면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오늘은 녹하도 잘 따라주었다. 내내 눈을 감고 있는 건 아무래도 부끄러워서인 듯했다. 사실 그도 부끄러웠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것이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전부 이상한 서책을 준 위 태의 때문이었다. 헤헤, 사실 그가 알려 준 대로 해 보는 건 꽤 재미있었다.
가동은 술을 마시고 이 일을 할 때 유난히 더 즐거웠다. 술이 이성을 잃게 만든다더니. 그는 녹하에게 입을 맞추며 그녀에게 말했다.
“녹하야, 눈 좀 떠봐. 나, 나 좀 봐줘…….”
여인이 두 눈을 뜬 순간, 가동은 귀신에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맙소사, 어찌 또 심열이 보인단 말인가…….
이래서는 안 되었다. 너무나도 비열했다. 어찌 이 순간 부인이 아닌 다른 여인을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는 허튼생각을 떨쳐내려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심열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녀는 원망이 담긴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될 일이었다. 이래선 안 되었다. 녹하에게 미안할 일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가 대인은 다시 눈을 감고 더 격렬히 몰입했다.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부인인 녹하밖에 없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가 이렇게 그녀를 원하고 사랑한다는 걸 여실히 보여 주고 싶었다.
절정이 지난 뒤, 그는 녹초가 되어 가볍게 여인의 몸을 어루만졌다.
“녹하야, 좋았어?”
여인은 아무 말 없이 그의 품을 벗어나더니 조용히 옷을 입었다. 가동은 침대에 엎드린 채 그녀의 몸을 쓸어내렸다.
“녹하야, 조급하게 굴지 마. 시간은 아직 충분하잖아. 내가 제일 크고 제일 시끄러운 폭죽을 터뜨려 줄게. 궁에서 쓰는 폭죽보다 더 시끄러운 걸로. 마마께서도 들으실 수 있게…….”
여전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기에, 가동은 몽롱한 정신으로 고개를 들었다. 여인은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가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손이 닿지 않아서가 아니라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녹하와 꼭 닮은 사람이 저기 서 있단 말인가?
침대를 내려간 여인은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 앞에 서 있던 녹하는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가동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역시나 녹하였다.
그가 상황을 깨닫기도 전에 녹하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후려쳤다. 엄청난 통증에 가동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침대에 쓰러졌다. 하늘이 무너진다면 지금인 것만 같았다!
녹하를 심열로 상상한 게 아니라, 자신과 몸을 섞은 여인이 정말로 심열이었다니. 게다가 녹하마저 원치 않았던 것을 심열에게… 해 버리고 말았다. 가동은 차마 낯짝을 들 수 없었다. 하늘이시여, 제발 벼락을 내려 죽여 주십시오…….
집안의 허물을 소문낼 수 없었기에, 녹하는 울분을 꾹꾹 눌러 담아 먼지떨이로 그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마침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겠다, 때리기도 손쉬웠다. 한참 동안 얻어맞아 온몸이 빨개진 그를 보니, 아주 조금은 화가 풀렸다. 지친 녹하가 먼지떨이를 집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