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2화
가동은 녹하가 들고 있던 옷을 가져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당신이 알아보라던 일, 알아냈어.”
녹하는 역시나 흥미롭다는 표정을 보였다.
“어서 말해 봐. 대체 어찌 된 일이래?”
그는 자신이 알아 온 소식을 전부 말해 주었다. 녹하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래도 싸지. 누가 그리 못되게 살라고 했나? 결국 제 발로 함정에 빠진 꼴이네. 안 되겠다. 심열이한테도 말해 줘야겠어. 분명 좋아할 거야.”
가동이 얼른 말했다.
“방금 복도에서 만나서 말해 줬어.”
녹하가 물었다.
“좋아하지?”
가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진 않던데. 조금 이상했어. 마음이 안 좋아서 그런 건지, 아님 우리가 너무 심하게 굴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녹하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심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
“방금 얘기했던 거랑 똑같이 말해 줬지. 둘째 공자가 말 못 할 병이 나서 부군의 도리를…….”
녹하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출가도 하지 않은 여인인데.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가동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가? 그럼 날 점잖지 못한 사람이라고 여기겠네?”
녹하가 그를 흘겨보았다.
“언젠 점잖았고?”
가동이 의자에 앉아 턱을 쓸어내렸다.
“얼른 좋은 신랑감을 찾아 시집을 보내야지, 안 되겠어. 서로 민망하잖아.”
“그리 급하게 찾을 거 없어.”
녹하가 물을 한 잔 따라주었다.
“난 심열이가 좋거든. 저택에서 함께 지내는 것도 좋고.”
“지금도 혼기가 찼는데, 더 늦어지면 좋을 게 없을 거야.”
“그렇긴 하지.”
녹하는 서글픈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복 많은 사내가 미인에게 장가를 오려나.”
그녀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더니 가동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심열이를 첩으로 삼는 건 어때?”
“안 돼, 안 돼, 그건 안 돼…….”
가동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의 격한 반응에 깜짝 놀란 녹하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거부하는 걸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것처럼 보이네?”
가동은 화를 내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장 그녀를 끌어안고 방으로 들어가 그녀의 옷을 거칠게 벗겼다. 녹하가 그의 손길을 거부하며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말로 하면 되지, 왜 이래?”
“보여 줄게, 내 마음이 어떤지.”
가동은 옷을 벗기며 그녀를 침대로 밀었다.
“내 마음에 뭐가 있는지 보여? 한 번은 그냥 넘어가는데 또 그런 말을 했다간 정말 화낼 거야.”
녹하가 입을 열려 했지만 가동이 그녀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따스한 봄볕이 닿은 침대 장막 너머에선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 * *
걸음을 재촉하던 심열은 자신의 행동이 결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 대인과 이야기해 본 적은 적었지만, 그가 단순한 사람이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한 말을, 그녀 혼자 괜스레 깊게 생각한 건 아닐까. 그녀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기둥 쪽에서 두 시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시간 참 빠르네, 벌써 연말이라니.”
“누가 아니래. 난 내일 휴가를 내고 그간 모았던 돈을 집에 가져다 드리려고. 내가 가져다 드리는 돈으로 새해를 맞으려고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시거든.”
“우리 어머니는 돈은 안 바라시는데 부인께서 상으로 주시는 옷감을 어찌나 탐내시는지 몰라. 전부 궁에서 쓰는 것들이니까 바깥에서는 보기 힘들잖아. 얼마나 좋아하신다고.”
“부인께선 우리한테 정말 잘해 주신다니까.”
“맞아. 천하를 뒤져도 저런 분들은 못 찾을걸. 부인도 좋고, 대인도 좋고. 하지만 하늘이 그 마음을 몰라주시니 안타까울 따름이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아이를 안 주시다니. 부인께서 말씀은 안 하시지만 밤새 황자와 공주의 옷을 만드시는 걸 보면 그 마음이 어떻겠어. 그리 정성을 들여 만드시다니……. 모르는 이들이 보면 친자식 옷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할 거야.”
“대인께서도 아이를 좋아하시잖아. 기억나? 몇 년 전만 해도 태자 전하를 몰래 저택으로 데려오셔서 머리도 빗겨 드리고, 옷도 입혀 드렸잖아. 밥만 안 먹여 줬지 완전히 친아들처럼 대했다고.”
심열은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저택에 공자가 없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가 대인과 부인이 아이를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하늘은 어찌 이리 좋은 사람들에게 아이를 점지해 주지 않으신단 말인가, 참 슬픈 일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얼마 뒤, 한 시녀가 조용히 말했다.
“부인께선 왜 대인께 첩을 들이라고 하지 않으시는 걸까? 아이를 낳아 부인께서 기르시면 되잖아? 첩이 있는 건 싫으신 걸까?”
다른 시녀가 말했다.
“두 분이 저렇게 사이가 좋으신데 누가 끼어드는 게 싫으시겠지. 원래는 부인께서 첩을 들이는 걸 원치 않으셔서 계속 약을 드셨는데, 그래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니 점점 마음이 약해지셨나 봐. 한데 지금은 대인께서 첩을 원치 않으시는 거야. 부인과의 정이 깊어 한사코 고집을 부리시니 부인께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으시겠지.”
두 시녀는 한참을 속상해하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심열은 모퉁이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첩도 들이지 않고, 아이를 원하다니. 이는 막다른 골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녀는 벽에 기대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바탕 눈이 온 뒤의 하늘은 맑게 닦아 놓은 듯 푸르고 깨끗했다. 꼭 거대한 유리 기와 같았다. 그녀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감정을 가다듬으려 해도 무겁게 가라앉은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 * *
뻔뻔한 가동은 누구 앞에서든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설령 황제와 황후 앞이라 할지라도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번 심열 앞에서 꺼낸 말들을 떠올리면, 그도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 그녀를 피해 다녔다.
예민한 심열은 가 대인이 자신을 피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언가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가동은 이 집 주인인데, 그런 그가 불편해하다니! 전부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는 그와 터놓고 얘기하고 싶었다. 이유를 알고, 잘 풀어야 서로 어색하지 않을 테니까. 사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둘 사이에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가 대인은 그녀만 보면 길을 돌아갔다. 하지만 심열이 그를 쫓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심열은 가 대인이 지나가는 길목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마침 안뜰로 들어선 가동은 고개를 들자마자 심열과 마주쳤다. 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췄다. 그는 멍하니 넋을 놓다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아, 어서 일어나.”
심열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인, 오늘은 조금 늦게 돌아오셨군요.”
“연말이라 궁에 업무가 많아서. 부인은?”
“부인께선 안에 계십니다.”
“아, 그럼 들어가 볼게.”
그가 무심히 지나치려 하자 심열은 황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대인.”
“할 말이라도 있어?”
심열은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용기를 내어 그를 바라보았다.
“대인, 혹시 저를 일부러 피하시는 것인지요?”
가동은 직설적인 그녀의 화법에 순간 횡설수설했다.
“아냐, 그럴 리가. 내가 왜 널 피해. 여긴 내 집인데. 아무런 까닭도 없이, 내가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필사적으로 해명하는 모습이 꽤나 익살스러워 보였다. 심열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농담을 건넸다.
“대인, 뒤가 켕기시는 것이지요?”
가동은 어느새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왜 뒤가 켕기겠어. 아냐, 난, 난…….”
“대인, 지난번 일은 마음에 둔 적 없으니 걱정 마시어요.”
심열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 이제 대인께서도 잊으십시오. 절 피하려고만 하지 마시고요. 안 그럼 제 모습이 너무 흉해 대인께서 놀라신 걸로 알겠습니다.”
“허튼소리.”
가동은 일부러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흉한 거면 천하에 미인은 없을 거야. 부디 그런 식으로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
“네. 알겠어요. 대인께서도 앞으로 절 피하지 마시어요. 이곳은 대인의 저택이니 떳떳하고 마음 편히 다니시고요.”
가동은 어쩐지 심열에게 훈계를 들은 것 같았지만, 이렇게 예쁜 여인의 훈계라면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절대 티를 낼 순 없었다. 만약 그가 여인을 피해 도망 다닌 걸 다른 이들이 안다면, 정말로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네가 너무 깊게 생각한 거야. 난 피한 적 없어. 내 집인데 누굴 피해 다녀야 할 이유는 없잖아?”
“예, 그리 생각하시는 게 맞지요.”
심열이 다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그럼 들어가셔요. 전 부엌에서 일손을 좀 도울게요.”
고운 자태의 그녀가 멀어졌다. 가동은 사뿐히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방으로 돌아오니 녹하는 가계부를 쓰고 있었다. 그녀가 가동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밖이 추운가 봐? 얼굴이 얼어서 빨개졌네.”
가동은 쭈뼛대며 대꾸했다.
“그렇게 춥진 않은데 바람이 많이 부네. 내 피부가 워낙 여려서 금방 트잖아.”
녹하가 피식 웃었다.
“여리긴, 내가 볼 땐 성벽보다 두껍구먼. 오늘은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이제 곧 새해니까 일이 많아서.”
“대도시위가 할 일이 뭐 그리 많다고? 영구는 일찌감치 집에 갔던데.”
“어떻게 알았어?”
“기홍이 영안을 데리고 놀러 왔었어. 그러다 저택 총관리가 와서 영 대인이 돌아왔으니 어서 가자고 하더라.”
태연하게 말했지만, 녹하는 가슴이 아릿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영구는 어찌 점점 속이 좁아지는지 몰라. 내가 처자식을 유괴라도 할까 봐 그러나.”
가동이 녹하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신경 쓰지 마. 영구 걔가 워낙 재미없는 놈이잖아. 애를 가르치는 것도 이상하고. 영안이 좀 봐. 멀쩡한 아이가 점점 제 아비랑 똑같아져서는, 말도 잘 안 하고 웃지도 않고. 청양 공주와는 차원이 다르지. 공주께선 나를 보면 늘 목마를 태워 달라고 하시는걸. 그 자그마한 손으로 머리를 꼭 쥐는 바람에 머리털이 한 움큼이나 뽑힐 뻔…….”
녹하가 그의 말을 끊었다.
“잠깐, 오늘 이렇게 늦은 게 청양 공주께 목마를 태워 드려서라고?”
가동은 멋쩍게 웃었다.
“내가 간다고 하면 우시는 걸 어떡해. 내가 아이들이 우는 건 못 견디잖아.”
“공주께서 우실 때 눈물이 나오던?”
녹하는 청양 공주를 너무나 잘 알았다.
“한 사람은 놀고 싶어 하고, 한 사람은 같이 놀아 주고 싶어 하잖아. 아니라고 하지 마, 당신은…….”
그녀는 별안간 고개를 숙이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놀란 가동은 서둘러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들어 올렸다.
“녹하야, 우리 착한 부인,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일찍 들어올게.”
녹하는 힘껏 코를 훌쩍이며 씁쓸한 마음을 억눌렀다.
“아무래도 첩을 들이는 게 낫겠어.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의 아이를 낳기 위해서 말이야. 당신도 아이가 생기면 다른 아이들을 보며 질투하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