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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61)화 (660/1,192)

제661화

심열은 이제 예를 갖추지 않고 양림문을 질책했다.

“아버지와 제가 집을 판 이유는 도성으로 와서 당신들을 찾아가기 위해서였어요. 아버지께선 몸이 허약하시어 몇 차례나 여정을 중단해야 했지요. 그 바람에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야 했고, 결국 여비를 다 써 버리고 말았죠.

어렵사리 임안에 도착해 찾아갔는데, 당신들이 어떻게 했나요? 아버지와 저를 보자마자 옛정을 생각하기는커녕 곧바로 쫓아냈죠. 예전에 아버지께서 당신들에게 여비를 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심열아, 억울하다, 정말 억울해!”

양림문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난 너희 부녀가 찾아온 줄 전혀 몰랐다. 알았으면 절대 그냥 보내진 않았을 거다. 이 양림문은 은혜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란 말이다.”

그가 자신의 부인에게 호통쳤다.

“내가 없을 때 당신이 쫓아낸 것 아니오?”

양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저도 모르는 일이에요.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요. 심열이를 큰딸처럼 여기며 살았는데 어찌 내치겠습니까? 제가 냉혈인도 아니고, 혼사만 올리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 며느리였습니다.”

그녀가 아들과 며느리에게 물었다.

“심열이가 오던 날, 집에 있지 않았느냐? 대체 누가 그리 한 것이야?”

두 공자와 며느리 모두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했다. 양 부인이 언성을 높였다.

“분명 문을 지키던 하인이 그리했을 것입니다. 이유 불문하고 돌아가 호되게 책임을 묻겠습니다. 심열아, 걱정 말거라. 네 억울함은 이 아주머니가 다 갚아 줄 것이야.”

온 식구가 열연을 펼치니 심열은 절로 웃음이 났다. 이 집안에 시집을 가지 않은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염치도 없고 가식으로 똘똘 뭉친 시댁이라니, 정말 역겹기 짝이 없었다.

양림문은 심열이 침묵만 지키자 양기천에게 눈짓을 보냈다. 양기천은 붉게 물든 얼굴로 심열에게 다가오더니 웅얼거렸다.

“심열아, 나, 난 한림가의 규수가 싫었어. 저, 정말 네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래서 집안에서도…….”

그를 마주한 심열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양기천은 외모도 출중했고 그녀에게도 아주 잘해 주었다. 강남에서 함께 자랄 때만 해도 그녀는 그에게 제법 큰 기대를 품었다. 연정에 눈을 뜨기 시작한 여인이라면 마음에 품은 낭군에게 간절한 기대가 생기지 않겠는가.

그녀는 도성으로 떠나기 전,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찼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다 큰 딸을 데리고 살 수 없으니 임안에 도착하면 혼인부터 시켜 주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녀는 부끄러웠지만, 반박은 하지 못했다.

도성으로 오는 길은 정말 험난했다. 아버지의 병이 심해지는 탓에 여정은 몇 차례나 중단되었다. 다른 이들이 도성에 가는 것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야 겨우 임안에 도착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고된 여정은 그녀의 기대를 깎을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참고 견뎌서 도성에 도착하기만 하면, 양림문과 양기천이 의원을 불러 아버지의 병을 고쳐 주리라 믿었다.

저택에 도착하니 대문을 지키던 하인이 안으로 들어가 그녀가 온 사실을 고했다. 그녀는 여전히 희망에 가득 차 있었고, 아버지와 양림문의 감동적인 재회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가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고를 마치고 돌아온 하인은 흉악스러운 모습으로 돌변하더니 호통을 치며 그녀와 아버지를 밀쳤다. 주인 어르신이 그들을 모른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후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양기천은 이미 한림가의 규수와 정혼을 했다는 것이다. 모든 걸 깨달은 그녀의 아버지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며칠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그녀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팔아야 했다.

자신을 사겠다며 말다툼하는 사내들의 모습을 본 그녀는 절망의 구렁텅이가 이곳이라는 걸 실감했다. 아버지의 장례만 끝나면 무덤 앞에서 머리를 박고 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늙고 못난 부자에게 첩으로 팔려 가는 일도 죽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하늘이 도운 덕분일까. 그날 그녀는 가 대인의 부인을 만났고, 그 덕에 이렇게 당당히 양림문 일가에게 따져 물을 수 있었다. 가 대인과 부인은 그녀를 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원한까지 갚아 주고자 했다. 그 은혜는 그녀가 평생 갚으려 해도 다 갚지 못할 터였다.

“심열아, 난, 난 네가 좋아.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청매죽마…….”

심열이 그의 말을 끊었다.

“한림의 규수와 정혼을 한 거 아니었어요?”

“그건 억지로 한 거였지. 지금은 그쪽에서 정혼을 깼어. 심열아, 난 오직 네 생각뿐이었어. 너 말고는 아무도 필요 없어.”

“양 공자.”

심열이 냉소를 지었다.

“여기 오기 전에는 가 부인의 여동생이 나라는 거 몰랐죠? 한데 대체 무슨 낯짝으로 나 말고는 아무도 필요 없다는 거예요?”

양기천은 말문이 막혔다. 그들이 원한 사람은 가 부인의 여동생이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심열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양기천은 속으로 뛸 듯이 기뻐했다. 그간 심열의 예쁜 외모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열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정혼을 깼든 한림가에서 깼든, 상관없어요. 난 부귀를 탐하는 비열한 자들에겐 시집갈 생각 없으니까요. 당신들같이 파렴치한 집안에는 더더욱이요. 비록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양기천 당신은 내게 장가올 자격이 없어요. 당신네 집안도 마찬가지에요!”

가동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 나긋하고 조용한 심열에게 이런 흉포한 모습이 있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녹하도 그런 그녀의 모습이 뜻밖이었지만, 기쁨이 더 컸기에 가동에게 눈짓을 주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여동생이 원치 않으니 이 일은 없던 걸로 하겠소. 여봐라, 손님을 배웅해 드리거라.”

양씨 집안 사람들은 울상을 지었다. 올 땐 기쁜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심열에게 한바탕 욕을 얻어먹고 한마디도 못했으니 참 분한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하던 양림문은 별안간 손바닥으로 이마를 때렸다. 이 모든 게 전부 가 대인이 꾸민 일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가 대인은 자신과 심열 집안의 관계를 알고 일부러 이런 일을 꾸며 심열의 분풀이를 해 주었으리라.

그는 분노를 터뜨리며 주먹으로 가마 문을 내리쳤다. 가씨 집안과의 혼사를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한림 집안과의 혼사를 물렸건만, 지금은 밑천도 못 건진 꼴이 되고 말았다.

* * *

수소문 끝에, 가동은 두 한림 집안이 왜 양씨 집안과의 정혼을 깼는지 알아냈다. 그리곤 들뜬 마음으로 성큼성큼 안뜰에 발을 들였다. 복도에 들어서니 양 갈래로 머리를 말아 올린 심열이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가동은 순간 숨이 막혔다. 맑은 눈동자에 분홍빛 입술. 특히 어여쁜 웃음은 청초하고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평소에는 그녀를 피해 다녔지만, 이미 마주친 마당에 피하는 것도 우스웠다. 심열은 쭈뼛대는 가동에게 다가와 어여쁜 자태로 예를 갖췄다.

“대인, 다녀오셨습니까.”

가동은 그녀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에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가 금세 움찔대며 헤헤 웃었다.

“예를 갖출 거 없어. 어서 일어나.”

심열을 마주하고 있으니 가동은 자꾸만 마음이 콕콕 쑤셨다. 대체 그날 밤 무슨 바람이 든 것일까. 어찌 녹하를 앞에 두고 심열을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심열이 예쁘니까? 하지만 심열보다 더 예쁜 여인을 만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일례로 황후 마마 같은 분도 만났지만, 단 한 번도 녹하를 황후 마마라고 상상한 적은 없었다. 하, 이는 대역죄가 아니던가! 그는 속으로 자신을 경멸한 뒤, 심열을 바라보며 할 말을 찾았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대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동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날 무엇 하러 기다렸는데?”

“제가 분을 풀 수 있게 도와주셨으니까요. 감사한 마음에 대인께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줄곧 대인과 마주칠 기회가 없어서요.”

가동은 개의치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뭐 그런 사소한 일 가지고.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니야.”

“대인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대인과 부인께서는 정말 인정이 넘치는 분들이십니다. 제게 이렇게나 잘해 주시다니,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생은 물론이거니와 다음 생에도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심열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가동은 금세 말문이 트였다.

“두 한림 쪽에서 왜 정혼을 깼는지 알아?”

“왜요?”

심열도 아직은 십대 아가씨였기 때문에 이유를 궁금해했다.

“양림문 쪽에서 혼사를 깨고 싶은데 두 한림보다 관직이 낮으니 대놓고 말하진 못했나 봐. 대신 자신의 명성을 깎아내린 거지. 둘째 공자에게 말 못 할 병이 있어 부군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는 소문을 퍼뜨린 거야.

그 말이 두 한림 집안에까지 들어갔고, 결국 혼사를 깼지. 어느 부모가 딸이 생과부로 지내길 바라겠어. 정말 뜻을 이루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거라니까. 앞으로 어느 여인이 둘째 공자에게 시집을 가려 하겠어? 아주 제 발등을 제대로 찍은 일이야.”

그는 문득 심열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심열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동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거야?”

심열은 더욱 난처해하더니 황급히 인사를 올렸다.

“대인, 전 그만 가 보겠습니다.”

가동은 멀어지는 심열을 바라보다 갑갑함에 중얼거렸다.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저러는 거지?”

대화를 마친 가동이 안으로 들어가니 녹하가 자그마한 옷을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누구한테 만들어 주려고?”

“누구겠어, 황자께 드릴 옷이지.”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재미있다니까. 어린 황자께서 여인들보다 예쁜 옷을 더 좋아하시다니.”

녹하는 수를 놓은 무늬를 보여 주었다.

“어때, 예뻐?”

“당연히 예쁘지.”

기뻐하는 녹하의 얼굴을 보자 가동은 가슴이 시큰거렸다. 녹하는 황후가 돌아온 후 더는 침수감의 일을 맡지 않았고, 심지어 황후 마마의 옷차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는 태자 전하에게만 옷을 만들어 주었는데, 청양 공주와 성 황자가 태어나면서 그녀는 손수 그들의 옷을 짓기 시작했다. 밤을 지새우는 한이 있어도 절대 다른 이에게 일감을 주려 하지 않았다.

사실 가동도 알고 있었다. 말로는 아이를 포기했다고 하지만, 그녀도 자신처럼 옅은 희망을 품고 있음을. 그저 공주와 황자에게 옷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위로와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가동은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 깜짝 놀란 녹하가 서둘러 그를 밀쳐 냈다.

“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야, 남들이 보겠어.”

가동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보면 어때. 혀를 함부로 놀리는 이가 있으면 내가 가죽을 벗겨 버릴 거야.”

녹하가 장난을 치며 말했다.

“아이고, 가 대인께서 이리 무서운 분이셨군요.”

그녀가 자신을 놀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허세를 부리는 사람도 아니었고, 평소 하인들과도 친근하게 어울려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가 성질을 부리는 일은 극히 적었다. 어쨌든 녹하가 집안일을 잘 돌보고 있으니 그는 여유롭게 지내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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