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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60)화 (659/1,192)

제660화

저택으로 돌아온 가동은 녹하에게 이 일을 낱낱이 알려 주었다. 녹하는 곧장 욕을 퍼부었다.

“이런 망할 놈들 같으니, 심열이네 집안이 기울어지니까 혼사를 깨고 싶었던 거겠지. 멀리서 힘겹게 찾아와서 아버지가 목숨을 잃었는데도 그리 매몰차게 굴다니. 이렇게 예쁜 여인을 어디 모자란 집 첩으로 팔아넘겼어 봐, 그게 사람이 할 짓이야?”

통쾌하게 욕을 하고 난 뒤, 고개를 드니 심열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녹하가 민망해하며 말했다.

“심열아……. 그, 다 들었구나.”

“부인, 전 상관없어요.”

심열이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늘씬한 체형 덕분인지 옷을 두껍게 입었음에도 가뿐해 보였다.

“양씨 집안은 저와 아버지에게 등을 돌렸지만, 부인과 대인께서 이렇게 잘해 주지 않으십니까.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지금은 아주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네.”

녹하가 심열을 자리에 앉혔다.

“걱정 마. 대인과 내가 양 공자보다 훨씬 더 좋은 낭군을 구해 줄 테니까. 그렇죠, 대인?”

가동은 심열이 방으로 들어온 뒤, 그대로 혼을 빼고 있었다. 그는 녹하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녹하가 목청을 높여 그를 다시 한번 불렀다.

“가 대인?”

가동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응? 뭐라고?”

“나중에 우리가 심열에게 좋은 낭군을 찾아 주자고요.”

“물론이지.”

가동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양씨 집안 공자들을 직접 만나 보니 심열 아가씨와는 어울리지 않더군.”

“대인이 따로 생각해 놓은 사람이라도 있는 거예요?”

가동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대로 고민에 빠졌다. 황족들과는 신분이 맞지 않고, 백성들 중에선 그의 성에 차는 사람이 없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 * *

다들 가동을 바보라고 놀렸지만, 알고 보면 똑똑한 면도 있었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양림문이 식식대며 그를 찾아왔다.

“가 대인, 들어 주십시오.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두 한림 집안에서 일방적으로 혼사를 깼지 뭡니까. 저희 집안이 신분 상승을 하려고 올리는 혼사라는 둥, 저희 아들이 문약하다는 둥, 심지어는 예물까지 다 돌려보냈더라니까요. 이렇게 파렴치한 소인배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가동은 담담히 웃더니 그를 위로했다.

“양 대인, 화내지 마세요. 오히려 더 잘된 일이죠. 그대로 혼인을 했다면 공자가 얼마나 무시를 당했겠습니까. 어깨도 펴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관도 그리 생각합니다.”

양림문이 알랑거리며 웃더니 가동에게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지난번 대인께서 저희집에 오셔서 하신 그 일은, 혹…….”

가동은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일 말씀입니까?”

“부인 여동생과의 혼담 말입니다…….”

“아.”

가동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 일은 저 혼자만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처제가 공자를 마음에 들어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양림문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난번에 봤을 때 두 공자 모두 인물도 훤하고 훌륭한 인재였습니다.”

양림문에겐 참으로 희망찬 얘기였다.

“대인께서 보시기엔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까?”

가동이 그를 더 북돋아 주었다.

“만나 보지도 않고 어찌 알겠습니까?”

양림문은 기쁨에 겨운 얼굴로 말했다.

“대인, 소관이 조만간 아들을 데려와 정식으로 혼담을 꺼내겠습니다. 어떠하신지요?”

가동은 곧바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우리 부인이 워낙 떠들썩한 걸 좋아해서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

떠들썩한 걸 좋아한다니, 극단을 불러 공연이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 말씀은……?”

“집안에 식구가 몇 명이나 되오?”

양림문이 즉각 답했다.

“임안에는 저희 식구들밖에 없습니다. 다른 친척들은 강남에 있고요. 임안에는 저와 부인, 두 아들, 며느리 한 명, 손자 두 명이 다입니다.”

가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이는 두고 식구들을 데려오세요. 사람이 많으면 그래도 떠들썩할 테니까요.”

양림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인, 아이들이 오면 더 떠들썩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손자…….”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가동이 눈을 부릅뜨며 살짝 언성을 높였다.

“어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단 말입니까. 아이들이 오면 이 일은 성사되지 않을 겁니다.”

순간 양림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 대인과 부인 사이에 오랫동안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슬하에 자식이 없는데 아이들을 데려오는 건 금기가 아니겠는가. 그는 당장이라도 제 뺨을 때리고 싶었다.

“송구합니다, 가 대인. 소관이 눈치가 없었습니다. 부인과 두 아들, 며느리만 데려오겠습니다.”

가동은 다시 안색을 바꾸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날을 정해 한번 찾아오도록 하세요. 부인에게 준비를 해 놓으라고 할 테니까요.”

가동과 날짜를 정한 뒤, 양림문은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가동도 저택으로 돌아가 이 일을 녹하에게 전했다. 녹하는 가동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인 만큼 그의 의도를 곧장 알아차렸다. 그녀는 가동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했어. 나중에 내가 상으로 선물을 줄게.”

가동은 그녀를 껴안고 히죽거리며 물었다.

“뭘 줄 건데? 물건은 필요 없어.”

“그럼 뭐가 받고 싶은데?”

가동이 그녀의 귓가에 무어라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녹하가 그를 밀쳤다.

“꿈 깨.”

가동은 엿가락처럼 다시 그녀에게 들러붙었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무언가 기둥에 부딪힌 듯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렸을 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문 앞으로 걸어간 가동은 저 멀리 반월문으로 사라지는 그림자를 보았다. 녹하가 물었다.

“누구야?”

“아, 아무도 아니야.”

가동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모자라 심장이 쿵쿵 뛰었다.

“고양이인 것 같아.”

사실 그는 심열의 뒷모습을 똑똑히 보았지만, 녹하와 다정한 모습을 들키니 왠지 모르게 당황스러웠다. 녹하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왜 그렇게 빨개졌어?”

가동이 쭈뼛거리다 대꾸했다.

“부끄럽잖아.”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웬일이래. 그렇게 뻔뻔한 사람이 부끄러워할 줄도 알고.”

가동은 탁자 앞에 앉아 차를 마셨다. 녹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심열이 생각이 우리랑 다르면 어떡하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선택을 존중해 주자.”

녹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와 가까운 사이라면 양씨 집안에 시집을 가도 업신여김을 당하진 않을 거야.”

가동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혼으로 물든 허공에 옅은 안개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은 조금씩 침잠해 갔다. 만약 심열이 녹하의 말대로 양씨 집안에 시집을 가겠다고 한다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만 같았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약속한 날이 되었다. 가동과 녹하는 고민 끝에 양씨 집안 사람들을 초대한 걸 심열에게 알리지 않았다. 심열의 진짜 반응을 보고 싶어서였다.

심열을 불러올 때, 녹하는 누군가 찾아와 혼담을 꺼냈으니 직접 와서 보고 결정을 내리라는 말만 전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심열은 놀란 표정이었지만, 가 대인과 부인의 호의를 저버릴 수 없으니 녹하를 따라나섰다.

방에 들어선 순간, 방 안에 있던 이들의 얼굴을 본 심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도 심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긴 마찬가지였다. 가동은 그 광경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부인의 여동생, 심열입니다.”

양씨 집안 사람들은 다들 민망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가 부인의 여동생이 심열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가동이 심열에게 말했다.

“여긴 양 대인, 양 부인, 그리고…….”

심열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대인, 소개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가동이 흠칫 놀란 척 물었다.

“그거참 재미있네. 양 대인은 언제 안 거야?”

“저희 아버지와 양 대인께서는 오랜 친구 사이셨습니다.”

심열이 날 선 눈초리로 양림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양 대인은 도성에 과거를 보러 가셨지요. 저희 아버지께서 준 여비를 들고 말입니다. 그리곤 시험에 합격하시어 고향으로 돌아와 관리가 되셨습니다. 저희 아버지와는 호형호제하던 사이였고 왕래도 잦았습니다. 해서 어린 시절, 저와 양 공자는 정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양 대인, 제 말이 맞지요?”

얼굴이 새빨개진 양림문이 어색하게 웃었다.

“심열아, 임안엔 언제 온 것이냐? 어찌 이 아저씨를 찾아오지 않은 게야. 아버지는 잘 지내시지? 지금은 어디에서 지…….”

“저희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입에 담지도 마세요.”

심열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먼 길을 떠나 양씨 저택에 도착했지만, 문턱도 넘지 못하고 쫓겨났다. 예전엔 의형제를 맺고 한 식구처럼 지냈지만 돈과 권력에 눈이 먼 양씨는 정혼을 깼다. 다시 생각해도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둘째 공자의 얼굴을 훑었다. 그녀의 청매죽마였던 사내. 그녀에게 늘어놓았던 맹세는 온데간데없고, 고개만 떨구고 있지 않은가. 심열은 경멸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누가 혼담을 꺼내러 왔다더니… 양 공자였군요. 양 공자께선 한림가의 규수와 정혼을 한 것 아닙니까? 이제 와 무슨 자격으로 혼담을 꺼낸단 말입니까?”

양림문은 노련한 관리였다. 심열이 무슨 연유로 가 부인의 여동생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가씨 집안과 사돈이 되면 든든한 뒷배가 생기는 게 아닌가. 관운이 트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앞길도 탄탄대로일 터였다. 그는 활짝 웃으며 자애롭고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심열아,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아저씨의 말을 들어 보렴. 이 아저씨가 비록 도성의 관리가 되긴 했지만, 그래봤자 종사품 관리란다. 이렇게 큰 도성에서는 지위가 낮으면 무시를 당할 일도 많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단다.

일찍이 고향에 사람을 보내 너와 아버지를 찾았지만, 집을 팔아 버렸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을 뿐 행방을 알 수 없었단다. 너도 알잖니, 기천奇天이도 혼기가 다 찼다. 두 한림 쪽에서 혼사를 꺼내니 거절할 수 없어서…….”

심열은 입을 삐죽거리며 냉소를 지었다. 시선을 슬쩍 옮기니 가 대인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희미한 웃음을 눈에 머금은 그를 보자, 심열은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분을 풀어 주기 위해 가 대인이 짜놓은 판이었다.

그녀는 저택에 들어온 후 남녀유별을 지키며 가 대인과 거의 왕래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그녀의 마음을 알고 한을 풀어 주려 하다니,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가 곧장 늘어뜨렸다.

가동은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심열을 보자 혼이 나간 듯했다. 시선은 곧바로 거두었지만, 넋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멍하니 찻잔만 붙잡고 있으니 옆에 있던 녹하가 조용히 속삭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구경해야지.”

그는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한 뒤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기분이 당혹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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