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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59)화 (658/1,192)

제659화

마침내 녹하의 앞에 다다르자, 여인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

“부인께서는 정말 부처님 같은 분이십니다.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만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남은 평생 부인께 보답하며 살겠습니다.”

녹하가 다가와 여인을 일으켰다.

“아버지의 장례는 잘 치렀어요?”

“잘 치렀습니다.”

여인, 심열心悅이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 장례를 도와줄 분들을 보내 주신 덕에 아주 잘 치렀습니다.”

녹하가 말했다.

“이렇게 일찍 온 걸 보니 아침 전이죠? 어서 가서 같이 먹어요. 먹으면서 얘기해요.”

심열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전 배가 안 고픕니다.”

“때가 됐는데 배가 안 고프다니요.”

녹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앞방으로 데려갔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가동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녹하와 심열이 함께 들어오는 걸 보고 그가 황급히 일어났다.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심열 아가씨, 여긴 우리 집 바깥양반이에요.”

심열은 앞으로 나와 어여쁜 자태로 예를 갖췄다.

“심열, 가 대인을 뵈옵니다.”

가동은 예의상 손을 슬쩍 내밀며 그녀를 일으켜 주는 척했다.

“일어나세요. 장례는 잘 치렀습니까?”

“대인과 부인의 도움 덕에 잘 치렀습니다.”

“다행이네요, 다행이네.”

가동은 뒷짐을 진 채 양손을 꽉 맞물렸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역시 뒤가 켕기는 짓을 하면 마음이 조마조마한 법이었다.

“앉아요. 먹으면서 얘기해요.”

녹하는 심열을 끌고 자리에 앉아 고기 반찬을 집어 그녀의 그릇에 덜어 주었다.

“이것도 정말 인연이네요. 말투를 들어보니까 임안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요?”

“네, 저와 아버지는 남쪽에서 왔습니다. 아버지는 본디 몸이 안 좋으셨는데 임안으로 오는 길에 병이 나셨어요. 도중에 의원에게 진료도 받고 약도 드셨지만 병세는 점점 나빠졌고, 임안에 도착했을 땐 손도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었지요. 여비도 다 써 버린 탓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럼 임안에는 함께 살 친척이나 친구를 찾으러 온 거였어요?”

심열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그녀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녹하는 사연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 곧장 입을 열었다.

“걱정 말고 말해 봐요. 도울 수 있는 일이면 저와 가 대인이 어떻게든 도와줄게요.”

심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분들은… 찾아가지 않는 게 더 낫겠습니다. 골치만 아플 테니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여길 생각입니다.”

그녀가 말을 아끼니 녹하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고향으로 돌아갈 거예요?”

“고향 집은 이미 팔아 버려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심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의탁할 곳 없는 임안에서 부인의 은혜를 입었으니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외람되지만 사실 이곳을 찾아온 것은 절 거두어 달라 청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부디 절 노비로 거두어 주십시오. 평생 부인의 시중을 들며 살고 싶습니다.”

녹하와 가동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가동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안 돼.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지.”

녹하는 심열을 몇 차례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말투가 범상치 않고 우아한 행동을 보니 대갓집 규수가 틀림없는데, 어찌 노비로 들일 수 있겠어요. 안 될 일이에요.”

“선비 집안이긴 했지만 몰락해 밥 한 끼 챙겨 먹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버지도 병이 난 몸을 이끌고 임안성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 부인, 제가 싫은 게 아니시라면 부디 거두어 주시어요. 부인께서 거두어 주지 않으시면 전 갈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이대로 거리에서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요.”

그녀는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부인,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뭐든 다 잘 할 수 있습니다. 부인을 모시는 데 절대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녹하가 얼른 그녀를 일으켰다.

“우선 밥부터 먹고 다시 얘기해요.”

하지만 심열은 다시 무릎을 꿇었다.

“부인, 부디 절 가엽게 여겨 주시어요. 저희 아버지도 분명 하늘에서 고마워하실 겁니다.”

녹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저택에서 지내도록 해요. 하지만 노비는 아니에요. 일할 사람은 차고 넘치니까요. 어쨌든 선비 가문 규수라고 하니 내 여동생으로 저택에서 지내다가, 좋은 낭군을 찾아 시집을 가는 게 좋겠어요.”

심열이 고개를 저었다.

“부인, 전 시녀를 하러 온 것인데 어찌 아가씨 취급을 받겠습니까. 절대 안 될 일입니다…….”

녹하가 대번에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해요.”

그녀가 가동에게 물었다.

“대인의 생각은요?”

가동은 심열이 저택에서 머무는 게 싫었다. 그녀만 보면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찔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두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리 연약한 여인이 험난한 세상을 홀로 살아간다면 힘든 생을 보낼 게 분명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녹하에게 결정을 넘겼다.

“부인, 우리 집에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부인이니 부인 마음대로 하세요.”

결국 심열은 가동의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녹하는 그녀에게 방을 마련해 주었고 시중을 들 시녀까지 보내 주었다. 하지만 심열은 시중을 받는 걸 한사코 거절했다. 은혜를 갚으러 왔는데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누구도 그녀에게 일을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직접 정원을 청소하고 부엌일을 도왔다. 녹하를 도와 바느질을 하기도 했다. 덕분에 저택 사람들 모두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예쁜데 예의도 바르고, 우아한 행동거지에 많은 하인들이 그녀를 몰래 흠모했다.

녹하는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심열은 가족에 대해 말을 아꼈지만, 얼마 못 가 녹하에게 모든 걸 털어놓아야 했다.

알고 보니 그녀가 찾아갔던 사람은 어릴 때 정혼한 미래의 부군, 양기천楊奇天이라는 자였다. 그의 아버지 양림문楊林文은 종사품 관원인 호부 원외랑이었다. 조정 관리라면 쉽게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동에게 알아보라고 하면 금방이니까. 부인의 명을 소홀히 할 수 없던 가동은 직접 양림문의 저택을 찾았다.

가 대인의 방문에 양씨 가문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높으신 분이 방문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양씨의 집안 식구들이 일제히 밖으로 나와 가 대인을 맞이했다.

황송하게 저를 맞이하는 그들의 태도에 가동은 흠칫 놀랐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양림문일 터. 그가 허리를 숙이고 가동에게 인사를 올렸는데, 머리가 거의 땅에 닿을 지경이었다.

“가 대인께서 친히 찾아 주시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가동은 빠르게 식솔들을 훑어보았다.

“이리 예를 갖추시다니. 저들은 그만 물려 주세요. 사람이 많으면 얘기하기가 힘드니까요.”

양림문이 곧장 가족들에게 손을 내젓자 썰물이 빠지듯 우르르 흩어졌다. 그는 가동을 본채로 안내했다.

“가 대인께서 이리 초라한 곳까진 어인 일로 오셨는지…….”

가동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별일은 아니고 지나가는 길에 목이 말라 물 한잔 얻어먹으러 왔습니다.”

“…….”

그때, 시녀가 차를 내어왔다. 양림문이 말했다.

“가 대인, 차 좀 드십시오. 대인의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부디 노여워 마십시오.”

“아닙니다.”

가동이 찻잔을 들어 한 입 들이켰다.

“제가 그리 까다로운 편이 아니라 찻잎만 띄워져 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터라, 가동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양 대인, 공자는 몇 명이나 두셨습니까?”

“소관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아, 한번 만나 볼 수 있을까요?”

가 대인이 보고 싶다는데, 보여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금세 두 명의 공자가 안으로 들어와 가동에게 예를 갖췄다. 가동은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인물은 훤칠했지만 심열을 가족처럼 여기기로 한 이상, 보는 눈이 조금 까다로워질 수밖에. 그가 보기에 두 공자 모두 심열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공자들은 혼인을 했습니까?”

양림문이 아들들을 소개했다.

“큰아들은 이미 했고, 작은아들은 얼마 전 두 한림翰林 집안의 규수와 정혼을 했습니다.”

엥, 그렇다면 심열과의 정혼은?

“양 대인, 공자가 더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소관에게 아들은 이 둘뿐입니다.”

가동은 이런 면에선 제법 똑똑했기 때문에 말을 돌려 물어보기로 했다.

“양 대인의 고향은 어디십니까?”

“소관의 고향은 강남입니다.”

“아, 강남. 아주 좋은 곳이지요. 본관도 황상과 마마께서 강남에 계실 때 함께 지냈는데 정말 좋은 곳이었습니다. 큰 공자는 강남에 있을 때 혼인을 했습니까?”

“예, 혼인을 한 뒤 도성으로 올라왔습니다.”

“작은 공자도 강남에서 정혼을 했고요?”

“그것이…….”

양림문은 잠시 망설이며 아들을 훑어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둘째는 임안에 와서 정혼을 했습니다.”

그의 말에 가동은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둘째 공자는 강남에서 심열과 정혼을 했다가 임안으로 온 뒤 한림 가문의 딸과 다시 정혼을 한 것이다. 심열의 집안이 몰락했기 때문이겠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더니. 가동은 눈꼴사나운 그들을 향해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둘째 공자께서 이미 정혼을 하셨다고 하니, 그럼 되었습니다. 더는 폐 끼치지 않고 돌아가 보겠습니다.”

가동의 말속엔 뼈가 있었다. 양림문이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기에 가슴 위로 두 손을 올리며 고했다.

“잠시만요, 대인. 방금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가동은 안타까운 척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중매를 할까 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한데 큰 공자는 이미 혼인을 했고 둘째 공자는 정혼을 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니…….”

가동은 두 손을 펼치며 다시 한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가 대인이 중매를 선다니, 분명 좋은 집안이 아니겠는가. 양림문이 공손히 물었다.

“혹 어느 집안 규수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가동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우리 부인의 여동생이지요. 하지만, 흠, 되었습니다.”

양림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 대인은 황상이 가장 신임하는 측근이고 가 부인은 황후 마마의 최측근이 아니던가. 게다가 황상이 마마를 무서워한다는 건 만천하가 다 아는 일이었다. 그런 가 부인의 여동생이라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일이었다……!

그는 두 아들과 서둘러 눈짓을 주고받았다. 뜻밖의 횡재에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한편 가동은 그들의 속셈을 훤히 꿰고 있었다.

“양 대인, 귀한 차 고맙습니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양림문은 굽실거리며 그를 배웅하더니 참지 못하고 질문을 건넸다.

“가 대인, 소관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입니다. 무슨 연유로 제 자식에게 중매를 서주시려는 것입니까?”

“그것이…….”

가동은 또 한 차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인연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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