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8화
올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며칠 연달아 큰 눈이 내리기까지 해, 임안성은 온통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백성들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가장 먼저 집 앞에 쌓인 눈을 깨끗이 쓸었다. 날은 추워도 거리에는 여전히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천자가 있는 수도답게, 언제나 시끌벅적하고 번화한 모습을 자랑했다.
가동은 부인과 함께 궁에서 나와 저택으로 향했다. 부인은 가마에 타고, 그는 말에 올라탔다. 거창한 걸 싫어하는 부부는 평소에도 두 명의 친위만 거느렸다. 한 명은 앞에서 길을 트고 한 명은 뒤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앞에서 길을 트던 친위가 갑자기 멈춰 섰다. 누군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말 위에서 소리쳤다.
“길을 막지 말고 어서 비키시오.”
가동의 신분을 몰랐던 백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경에 푹 빠져 있었다. 화가 난 친위가 소리를 지르려는데, 가동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백성들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시신 한 구가 놓여 있었다.
얼굴은 수건으로 덮여 있어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체구로 보아 사내인 듯했다. 그 옆에서 한 여인이 구슬프게 울고 있었고, 주변을 에워싼 구경꾼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니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 녹하가 가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야?”
가동이 말했다.
“어떤 여인이 자기를 팔아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려고 하나 봐. 그래서 구경꾼들로 길이 막혔어.”
녹하는 조금 놀란 듯하더니 이내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렇게 추운 날에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야?”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 탈이었다. 울고 있던 여인이 경국지색의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엄동설한의 날씨에 소복만 입은 여인은 쓰러질 듯 허약해 보여, 보기만 해도 안타까웠다. 가동이 말했다.
“왜 없겠어. 다들 도와주려고 난리지.”
녹하가 말했다.
“다들 그렇게나 인심이 좋단 말이야?”
가동이 말했다.
“아니, 다들 여인을 얻고 싶어서 그런 거야.”
녹하가 물었다.
“예뻐?”
가동이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예쁘다뿐이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가동은 서둘러 해명했다.
“물론 우리 색시보단 훨씬 못하지만 말이야.”
녹하는 가동의 말을 들은 체도 않고 가마 밖으로 나왔다.
“나도 좀 보여 줘 봐.”
가동은 말에서 내려 녹하를 안아 말에 태워 주었다. 과연, 가동의 말대로 엄청난 미인이었다. 녹하는 가동을 잠시 째려본 뒤 친위에게 말했다.
“길을 트게. 내가 가 볼 터이니.”
화를 참고 있던 친위는 길을 트라는 분부에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가 시위대인과 부인께서 계시니 어서 길을 비키거라. 어서!”
황상의 최측근 가 대인이라는 말에 백성들은 곧장 길을 터 주었다. 가동은 말을 끌고 구경꾼들에게 다가갔다. 녹하는 말에 앉은 채 서럽게 울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붓고 찬바람에 얼굴이 다 텄지만, 이목구비와 윤곽은 미인의 표본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인의 울음에 사내들의 언쟁까지 더해져 소란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가동과 녹하가 다가오니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를 알아채지 못한 여인만 구슬프게 울었다. 녹하가 말했다.
“아가씨, 울지 말아요. 아직 아버지의 장사도 치르지 못했는데 이렇게 울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려고요?”
여인은 녹하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갸름한 얼굴에 커다란 눈, 꽃잎 같은 입술을 가진 여인이었다. 추운 날씨에 하얗게 언 입술을 보자 가동은 자꾸만 솟아나는 동정심을 막을 수 없었다. 녹하가 물었다.
“값을 비싸게 부르는 사람을 따라갈 생각이에요?”
가장 비싼 값을 부른 사람은 쉰이 넘는 땅딸막한 남자였다. 녹두같이 작은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는데, 얼굴엔 탐욕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여인은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녹하는 언쟁을 벌이던 사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중에서 아가씨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있어요?”
사내들 중 멀쩡해 보이는 이는 한 명도 없고 다들 조금 모자라 보였다. 이런 미인은 고사하고 평범한 여인도 분에 넘치는 이들이었다. 여인은 고개를 젓지도, 사내를 가리키지도 않고 침묵만 지켰다. 녹하가 말했다.
“알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주머니를 친위에게 던지며 말했다.
“아가씨를 도와 아버지 장례를 치러 주게. 남는 은냥은 아가씨에게 주고.”
그리고는 피풍을 벗어 그녀에게 주었다.
“날이 추우니 입어요. 옷가게에서 두꺼운 솜옷도 좀 사고요. 밖에 나갈 땐 항상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해요.”
여인은 또 울음을 터뜨리더니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부인께선 제게 부처님이나 다름없으십니다. 현세에 나타난 부처님입니다!”
녹하가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까지 절할 것 없어요. 이따가 아버지를 보내드릴 때, 그때 하세요.”
그녀가 구경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장례를 치러야 하니 다들 그만 돌아가세요.”
가 부인의 무지막지한 성격은 유명했기에 모두 우르르 흩어졌다. 가동은 녹하의 얼굴을 꼬집으며 장난을 쳤다.
“살아 있는 부처님.”
녹하가 그의 손을 밀쳤다.
“장난치지 마.”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가마에 올라탔다. 가동에게 이 일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벌어진 일화에 불과했기에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밤이 되어 침대에 눕자 녹하가 물었다.
“오늘 그 여인 어떤 거 같아?”
“뭐가 어떠냐는 거야?”
“예쁘지 않아?”
“예뻤지.”
가동은 늘 먼저 말을 내뱉고 그 후에 수습하곤 했다.
“우리 부인보단 못하지만.”
녹하가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정말이야.”
가동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눈엔 우리 색시가 제일 예뻐.”
“만약에 내가 당신 색시가 아니었다면 그래도 날 예쁘다고 해 줬을까?”
가동은 미간을 찌푸리다 대답했다.
“당신이 어떻게 내 색시가 아니야. 내 색시지.”
“만약이라고 했잖아.”
가동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만약이란 건 없어. 당신은 그냥 내 색시야.”
녹하가 슬쩍 떠보듯 물었다.
“그 여인 얼굴 기억나?”
“안 나.”
가동은 대충 대꾸하고는 이불 밑에서 능숙하게 녹하의 옷을 풀어 헤쳤다. 녹하가 그를 밀쳤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얘기 중이잖아.”
“얘기해. 난 내 할 일 할 테니까.”
이럴 때만큼은 가동도 똑 부러졌다. 부인과의 잠자리는 큰 즐거움 중 하나였지만 아이를 갖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이미 포기하고 약도 먹지 않는 녹하와 달리, 그는 열심이었다.
몰래 엿들은 바로는 황상이 이 일에 늘 열을 올려 황후 마마께서 한번에 쌍둥이를 회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도 더 많이 시도할 수밖에. 그 정성에 하늘이 아이를 내려 주실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일에는 녹하가 우위를 차지했지만, 이 일만큼은 아니었다. 발가벗고 싸우는 데엔 가동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가 하도 조몰락거려 녹초가 된 상태로 그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가동은 감정이 격해질 때면 눈을 감는 게 좋았다. 이번에도 눈을 감고 하늘을 나는 기분을 즐기는데 별안간 한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려던 그 여인이었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아름답고도 애처로워 보이던 여인. 깜짝 놀란 그는 황급히 눈을 떴다. 녹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가동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신 앞에 있는 여인은 그의 부인 녹하였다. 안심한 가동은 녹하를 바라보며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 * *
이튿날 아침, 저택의 하인이 대문을 여니 계단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계단에 앉아 있던 이가 고개를 돌렸다. 감히 이품 대원의 저택 입구에 앉아 있다니. 하인은 막 욕을 퍼부으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빼어난 미모를 마주하자 화는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고 상냥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가씨,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어제 거리에서 자신을 팔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려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가 부인을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손에 든 보따리를 들어 올렸다.
“부인께서 인정이 많으시어 어제 제 옷차림이 얇은 것을 보시고 피풍을 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돌려드리려고요.”
하인이 친절하게 말했다.
“부인께선 아마 이제 막 일어나셨을 겁니다. 제가 가져다 드리지요.”
여인은 보따리를 건네는 대신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직접 돌려드리면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요.”
부드러운 목소리와 간절한 표정에 하인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낯선 이를 안에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먼저 들어가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하인은 급히 안채로 향했고 문 앞에서 이 사실을 고했다. 옷을 입고 방에서 나오던 가동이 발걸음을 멈췄다. 어쩐지 조금 뒤가 켕기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어젯밤 녹하를 그 여인이라고 상상했을까?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정말이지 기괴한 일이었다. 그의 마음을 알 턱이 없던 녹하는 크게 기뻐했다.
“어서 들이게.”
하인은 명을 받잡고 다시 대문으로 향했다. 녹하는 멍하니 서 있는 가동을 바라보며 웃었다.
“왜 그래? 아직 잠이 덜 깼어?”
“아니.”
가동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배고프다.”
“그럼 아침을 차리라고 해. 먹고 어서 궁에 가야지.”
가동은 꾸물대며 밖으로 나가 복도를 걸어갔다. 저 멀리 하인이 여인을 데리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맞닿았다. 그 순간, 화들짝 놀란 가동은 서둘러 몸을 틀다가 기둥에 부딪혀 비틀거렸다. 난처한 얼굴로 슬쩍 고개를 돌리니 여인은 입을 가린 채 웃고 있었다. 그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옆방으로 들어갔다. 뒤따라오던 시녀가 그를 불러 세웠다.
“대인, 거기가 아닙니다. 식사는 앞방에 차렸습니다.”
가동은 부끄러워 화가 났는지 몸을 돌려 눈을 부릅떴다.
“본 대인이 걷다가 피곤하여 잠시 쉬겠다는데 그것도 안 된단 말이냐?”
“…….”
몇 걸음 걸었다고 쉰단 말인가……. 반대편 복도에서는 하인이 여인에게 가동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보셨지요. 방금 저분이 저희 어르신입니다. 저희 어르신은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황상의 최측근이자 태자 전하의 사부이시지요. 그런데도 어찌나 친절하고 상냥하신지, 거드름 같은 건 전혀 피우지 않으신답니다.”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예, 그래 보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