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7화
“황저, 이건 내 거야.”
묵용성은 무서울 때만 청양 공주를 황저라고 불렀다. 그는 청양 공주가 자신의 물건을 빼앗으려 할 때 가장 무서워했다. 귀신보다 무서운 공주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 생기면 꼭 도척처럼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 했다. 묵용청양이 아무렇지 않게 성 황자를 위협했다.
“얼른 내놔. 안 그럼 내가 빼앗아 갈 테니까.”
빼앗아 간다는 건 그를 때리겠다는 의미였다. 결국 묵용성은 순순히 옥 단추를 떼어 그녀에게 건넸다. 하지만 기분은… 그의 살을 깎아내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성 황자는 어떻게든 모후께 이 사실을 일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너무도 잘 아는 공주는 위협을 잊지 않았다.
“모후께 이르기만 해. 매일 네 보물 상자에서 보물 하나씩 빼앗아 갈 테니까.”
묵용성은 헉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청양 공주가 말하는 보물 상자에는 그가 애써 모은 보물이 가득 들어 있었고 이 옥 단추도 그중 하나였다. 하나만 빼앗겨도 마음이 아픈데 매일 빼앗는다니, 그가 어찌 살 수 있단 말인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그녀에게 너무 많은 약점을 잡힌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청양 공주가 물건을 빼앗으면 그도 똑같이 청양 공주의 물건을 빼앗으라고 충고했다. 그게 바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작전이라는 것이었다.
한번은 청양 공주가 구환쇄九環鎖(고리가 아홉 개인 자물쇠)에 푹 빠져 있어, 궁 사무처에서 공주에게 금과 은으로 장식한 자물쇠를 만들어 주었다. 자물쇠가 몹시 마음에 들었던 그녀는 어딜 가든 몸에 지니고 다녔다.
묵용성은 기회를 엿보다가 몰래 자물쇠를 뺏어 왔다. 아끼는 걸 잃어버려 울고불고 난리 치는 공주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잃어버린 걸 알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사태평한 모습을 보였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묵용성이 은근슬쩍 돌려 묻자, 청양 공주는 시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면 그만이라고 대답했다.
어찌나 호탕한 성격인지, 아무리 좋아하는 물건이라 해도 누가 갖고 싶다고 하면 얼마든지 내주었다. 이까짓 자물쇠 같은 것으로는 그녀를 절대 약 올릴 수 없었다!
“황저.”
묵용성은 옥 단추를 주머니에 넣는 공주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옥 단추는 가져가서 어디에 쓰려고? 그건 사내들 옷에 다는 거야.”
“괜찮아.”
청양 공주는 눈이 감길 만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영안을 보러 가는데 선물도 없이 갈 순 없잖아. 영안이가 하면 잘 어울릴 거야.”
* * *
영안은 아버지의 성격을 빼다 박은 매우 정직한 아이였다. 공주가 병문안을 온다는 이유로 아픈 척 연기를 해야 하는 건 영안에게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누구보다 포고 연습에 진심이었건만, 갑자기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 어른들은 자꾸 숨기려고만 할 뿐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무슨 이유겠는가, 그가 청양 공주를 넘어뜨려서 황상의 마음이 아팠던 것이겠지!
포고를 못 하게 막는 것도 모자라 아픈 척 연기까지 해야 하다니, 이렇게 못살게 구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어린 소년은 성이 나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만나지 않을 거예요. 절 방 안에 가둬 주세요.”
영안의 어머니 기홍은 상냥하고 마음씨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바보 같긴, 청양 공주께서 여기까지 찾아오시는 건 널 친구로 여긴다는 의미란다. 한데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겠어?”
“아픈 척하기 싫어요.”
“굳이 아픈 척할 필요는 없어. 진 사부께서 민망하지 않도록 그의 말씀대로 하면 되는 거야.”
영안은 진 사부를 존경했지만 어른들의 세계는 왜 그리 복잡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황상의 명인데 어째서 진 사부가 저리 고생을 해야 한단 말인가? 모자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하인이 달려와 고했다.
“부인, 공주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영 부인이 즉각 말했다.
“어서 안으로 모시…….”
아직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묵용청양이 새처럼 쪼르르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
“기홍 고고.”
영 부인은 그런 공주를 보며 웃었다.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공주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이것 좀 보시어요. 또 땀이 잔뜩 나셨습니다. 조 마마께서 보셨다면 분명 한 소리 하셨을 것입니다.”
묵용청양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짓더니 옆에 있던 영안을 위아래로 훑었다.
“엥, 아픈 거 아니었어? 왜 앉아 있어?”
영안은 그녀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할 만큼 아픈 건 아니니까요.”
말을 마친 영안은 조금 후회되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겉과 속이 다른 어른들처럼 어찌 이런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묵용청양이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영안은 고개를 틀어 피하고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얼 하는 거예요?”
“열이 나는지 보려는 건데?”
“안 나요.”
“그럼 어디가 아픈 거야?”
영 부인은 영안이 거짓말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거들어 주었다.
“머리가 조금 아픈 것이지 다른 데는 별 이상 없습니다. 이렇게 병문안까지 와주시고… 공주 전하께 심려를 끼쳐드렸네요.”
“아뇨,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묵용청양은 큰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오늘 영안이 없어서 저랑 포고를 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얼른 나아야 해요.”
영 부인이 말했다.
“황상께서 왕손들 대여섯 분을 더 불러 주지 않으셨습니까. 왕손들이 공주 전하와 겨뤄 주지 않는 것입니까?”
묵용청양이 코웃음을 쳤다.
“흥, 말도 마세요. 시시하기 짝이 없다니까요.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바닥에 고꾸라지는걸요. 영안이가 더 나아요. 허튼수작은 부리지 않으니까요.”
공주가 영안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심하게 아픈 건 아니니까 내일은 나랑 겨룰 수 있겠지?”
영 부인은 황급히 그녀의 팔을 내려놓으며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 전하는 공주이십니다. 사내아이와 어깨동무를 하시다니요. 황상께서 보셨다면 분명 노하셨을 것입니다.”
묵용청양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부황께서는 제게 규율을 강요하지 않으시는걸요. 아직 어리니 좀 더 커서 배워도 늦지 않다고 하셨어요.”
청양 공주를 대하는 황제의 태도는 기홍도 잘 알고 있었다. 청양 공주가 불을 지르거나 사람을 죽이지 않는 한, 황상은 절대 개입하지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황후 마마가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된 덕분에 청양 공주는 포악하고 괴팍한 성격으로 자랄 수 있었다. 궁 안의 그 누구도 공주를 건드리지 못할 정도였다.
영 부인은 두 아이에게 이야기를 나누라고 한 뒤, 간식을 만들러 갔다. 청양 공주는 기홍 고고가 만든 간식을 가장 좋아했기에 환호를 질렀다. 이윽고 공주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에 꼭 쥐고 영안을 보았다.
“손 좀 줘 봐. 줄 게 있어.”
영안이 물었다.
“무엇인데요?”
“일단 손부터 줘 봐.”
영안이 손을 내밀었다. 공주가 자그마한 주먹을 조심스럽게 펴자 그 안에서 따뜻하고 단단한 게 떨어졌다. 물건을 자세히 살펴본 영안이 입을 열었다.
“이건 성 황자의 옥 단추잖아요. 어째서 공주에게 있는 거예요?”
청양 공주가 물었다.
“어때, 예쁘지?”
“예쁩니다.”
청양 공주는 옥 단추를 영안의 허리춤에 달아주더니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네 거야.”
기뻐하기엔 영안은 청양 공주의 도적 같은 기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성 황자에게서 빼앗은 것이지요?”
“아니, 걔가 준 거야.”
영안은 입을 삐죽거리며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물건을 아끼기로 유명한 묵용성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주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서야 어찌 옥 단추가 그녀의 손에 있겠는가. 영안이 단추를 다시 풀었다.
“가져다주세요. 난 필요 없으니까요.”
청양 공주는 그런 영안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안 갖겠다는 거야? 그럼 뭐가 갖고 싶은데? 내가 구해다 줄게.”
“고맙지만,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궁을 나온 지 너무 오래되었으니 어서 돌아가세요.”
“싫어. 안 가.”
청양 공주가 몸을 틀었다.
“기홍 고고가 만든 간식도 아직 못 먹었잖아.”
영안이 차가운 표정을 보였다.
“날 보러 온 거예요, 아님 간식을 먹으러 온 거예요?”
“둘 중 하나를 하러 온 게 아니라고.”
청양 공주가 입을 삐죽거렸다.
“먼저 너부터 보고 겸사겸사 간식을 먹으러 온 거지.”
말이 통하지 않는 공주였다. 영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공주가 안 가면 내가 갈 거예요. 혼자 있고 싶으니까 따라오지 말아요.”
“어, 어?”
청양 공주가 달려오더니 영안의 앞을 막아섰다.
“어딜 가려고. 머리 아픈 건 이제 다 나은 거야?”
영안이 말했다.
“원래 안 아팠는데 공주를 보니까 아파요.”
“어째서?”
“…….”
네가 싫으니까. 하지만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공주의 세력을 생각하면 차마 미움을 살 순 없었다.
“정말 안 아팠던 거야?”
청양 공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안 아팠어요.”
진실을 말하니 영안은 더 용기가 생겼다.
“아, 알겠다.”
청양 공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내가 무서워서 아픈 척한 거였구나?”
“…….”
청양 공주의 머릿속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세계였다. 매번 영안이 그녀를 때려눕혔건만, 어찌 자신을 무서워하냔 말이 나온단 말인가?
“그렇게 담이 작아서야.”
청양 공주가 영안의 어깨를 토닥였다.
“대장부인 줄 알았더니 언제 성아처럼 변한 거야. 그러다간 남들이 널 무시할 거라고.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먼저 무시할 거고 말이야.”
그때, 영 부인이 시녀를 데리고 들어와 간식을 차렸다.
“공주 전하께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대접도 제대로 못 해드리네요. 이 기홍 고고가 직접 만든 간식 좀 맛보세요.”
아직 어린아이인 영안도 맛있는 냄새에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청양 공주가 접시를 빼앗았다.
“아파서 입맛이 없을 테니까 먹지 마.”
“…….”
청양 공주는 간식을 집어 입에 욱여넣더니 활짝 웃으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아, 맛있어. 진짜 맛나요.”
즐겁게 간식을 음미하는 청양 공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안은 조금 서러웠다. 훈련까지 빠지고 집에만 숨어 있었는데, 저 공주는 어째서 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