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6화
늘 궁 밖을 그리워하는 모후를 위해 부황은 자주 출궁을 했다. 두 분은 출궁할 때 황매皇妹와 황제皇弟를 내게 맡겼다. 난 여덟 살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동생들을 돌보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야 했다. 동생들은 쌍둥이인데, 여동생의 이름은 청양, 남동생의 이름은 외자인 성이었다.
모후께서 회임하셨을 때, 난 남동생이 태어나길 바랐다. 여동생은 걸핏하면 울 테니 성가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늘 울음을 터뜨리는 쪽은 남동생이었다.
여동생의 대담하고 늠름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놀라우면서도 기뻤다. 남동생에게 걸었던 기대를 여동생이 대신 성취해 주는 것 같았다.
청양이는 밥을 먹을 때마다 제멋대로 굴었다. 줄곧 떠들거나 성아에게 이상한 짓을 했다. 청양이를 가르치는 조趙 마마는 옆에서 입이 닳도록 잔소리를 했다. 청양은 듣기 싫었는지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안 들려, 안 들려, 정말 성가셔 죽겠네!”
목청을 높여 외치는 바람에 청양의 입에 있던 음식이 전부 식탁 위로 튀어나왔다. 성아는 자신의 밥그릇에 들어간 밥알을 바라보더니 창백해진 얼굴로 훈계했다.
“넌 공주라고. 어찌 이리 규율을 지키지 않는 거야? 모후께 일러야겠어.”
안 그래도 조 마마 때문에 솟구친 청양의 화가 성아에게로 향했다. 청양은 식탁을 내리치며 성아를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말해 봐. 내가 널 못 때릴 것 같아?”
청양이를 무서워하는 성아는 지지 않으려 하면서도 목소리가 작아졌다. 청양이는 소심하게 우물거리는 그의 모습을 가장 싫어했기에 또다시 식탁을 내리쳤다.
“묵용성, 말을 할 거면 크게 좀 해. 그렇게 작게 말하면 누구더러 들으라는 거야? 그러고도 네가 사내야?”
성아는 소심하긴 해도 자존심은 센 편이었다. 더구나 사내답지 않다는 말을 가장 싫어했기에 화가 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모후께 이를 거야.”
이른다는 말을 내뱉으면 원숭이처럼 줄행랑을 쳐야 하건만, 안타깝게도 성아는 어려서부터 착실히 가르침을 받은 탓에 황자다운 기개와 교양 있는 모습을 중시했다. 어쨌든 성아는 이 방을 빠져나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청양이 성아를 깔끔하게 넘어뜨렸다. 그리곤 성아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우쭐대며 노려보았다.
“이 누이에게 다시 한번 말해 봐. 정말 모후께 이를 거야?”
청양은 주먹을 들어 올린 채 시시덕거리며 성아를 바라보았다. 성아는 입술이 납작해질 만큼 힘을 주더니 절대 지지 않겠다는 얼굴로 맞섰다. 한편으로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불쌍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정말 이런 성아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담이 작은 아우를 보다 보면 내가 다 부끄러웠다.
부황은 일찍이 청양이와 성아가 싸울 땐 누구도 말리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래서 도와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긴 했다. 귀신보다 더한 청양 공주가 무서워 감히 나설 수 없었겠지.
청양이 주먹을 내리치기도 전에, 성아는 결국 눈물을 흘렸고 점점 더 서럽게 울었다. 싸움이 심해지기 전에 내가 나서야 했다. 난 두 동생들에게 다가가 청양이를 일으켰다.
“네가 이러고도 여인이야? 어찌 걸핏하면 성아의 몸을 깔고 앉는 거야?”
청양은 늘 나를 숭배하다시피 했다.
“태자 오라버니, 그럼 제가 어찌해야 하는데요?”
난 몸을 일으키던 성아의 다리를 다시 한번 밟았다. 그리곤 성아의 가슴 위에 발을 올려놓고 말했다.
“이렇게 해야지.”
청양은 감탄해 마지않는 얼굴로 날 보았다. 깔고 앉는 것보다는 확실히 이편이 훨씬 늠름해 보이기 때문이다. 성아는 분노와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가 꼭…….”
난 발에 힘을 실으며 허리를 숙였다.
“네가 꼭 뭐?”
성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그저 겁만 주려던 것뿐이었기에 성아를 일으켜 세워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이럴 땐 청양이도 제법 누이답게 손수건을 꺼내 성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나 성아에게 청양의 행동은 경악스럽기 짝이 없었다. 손수건이 너무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청양이 손수건으로 무얼 했을지 상상할 수 있었는지 성아는 뒷걸음을 치며 더 크게 울었다. 청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태자 오라버니, 때리지도 않았는데 왜 저리 우는 거예요?”
난 웃으며 말했다.
“너무 감동해서 그렇지.”
청양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꼬질꼬질한 손수건을 들고 다시 성아에게 다가갔고 성아는 질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난 서둘러 청양을 가로막고 노비들에게 눈빗을 보냈다. 성아의 유모가 재빨리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성아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성아는 그제야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힌 듯 조용해졌다.
* * *
묵용청양은 신이 나서 연무장으로 달려갔지만, 그녀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당혹스러워하는 찰나, 일렬로 서 있던 아이들과 사부가 일제히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공주 전하를 뵈옵니다.”
묵용청양이 손을 내저었다.
“어서 일어나요. 진陳 사부, 영안이는 오늘 안 왔어요?”
진 사부라고 불린 진계영陳啓英은 황자들에게 포고를 가르치는 스승이다. 태자는 이미 사부가 있었기에 묵용성과 묵용청양만 진계영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황자 묵용성은 황제에게 이끌려 억지로 배우러 오긴 했지만, 이런 야만적인 싸움을 싫어해서 늘 우두커니 한쪽에 서 있었다. 덕분에 그의 옷은 언제나 하늘에서 내려 준 것처럼 깨끗했다.
하지만 공주 묵용청양은 달랐다. 그녀는 포고에 엄청난 흥미를 보였다. 공주를 끔찍이 아끼는 황제는 그녀가 포고를 연습할 수 있게 왕손 귀족들의 자제들을 불러 함께 포고를 배우라고 명했다. 공주가 말한 영안은 일품 대도시위인 영 대인의 독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공주가 묻는 말이니 진 사부는 대답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영안이 공주를 봐주지 않아 심기가 불편해진 황제가 영안에게 출입금지 명을 내렸다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잠시 망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께 아룁니다. 영안은 몸이 아파 오지 못하였습니다.”
“아파요? 어디가 아픈데요?”
청양 공주가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의원한테 진찰은 받았대요?”
“쿨럭, 크흠, 영 대인과 부인께서 돌봐 주시면 금방 나을 병이니 그리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긴 하죠.”
청양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홍 고고는 누구보다 세심하니까 고고가 돌봐 주면 금방 나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다시 걱정에 잠겼다.
“오늘은 누구와 포고를 하죠?”
가지런히 서 있던 아이들은 앞다투어 소리쳤다.
“저요, 저요, 공주 전하, 저와 해요!”
청양 공주는 커다란 눈을 굴리며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더니, 마침내 묵용성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성아, 이 누이와 한 판 하자.”
묵용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같은 시간 한배에서 나왔는데 말끝마다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누가 들으면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이 부른다고 착각할 것이다.
안 그래도 하기 싫은 포고인데, 묵용청양과 겨루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다른 이들은 감히 그를 넘기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청양 공주만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아프게 넘어뜨렸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제법 영리해진 그는 속마음과 달리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황저의 기술이 너무 훌륭해서 나와 겨루는 건 재미없을 테니, 다른 애와 하는 게 어때?”
묵용청양은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성아와 하는 건 정말 재미가 없었다. 제대로 넘어뜨리지도 않았는데 어찌나 큰소리로 울부짖는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다시 대열을 둘러본 그녀가 제법 힘이 세 보이는 아이를 골랐다. 두 사람은 천천히 원을 돌다가 서로의 요대를 잡았다. 하지만 공주가 손에 힘을 주기도 전에 아이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공주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넘어진 아이가 벌떡 일어나 예를 갖췄다.
“공주,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곤 대열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묵용청양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이들이었다. 차라리 영안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그는 거짓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청양 공주가 식식대며 말했다.
“감히 날 봐주려는 자가 있다면 상으로 채찍을 맞을 줄 알아!”
아이들은 서로 눈짓만 주고받다가 일제히 진 사부를 바라보았다. 진 사부는 황공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공주 전하, 그, 그것이, 황상께서…….”
청양 공주가 코웃음을 쳤다.
“흥, 황상도 용서치 않으실 거예요.”
진 사부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황상께서는 공주를 넘어뜨렸을 때 용서치 않으실 것이다. 다시 연습이 이어졌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위축된 모습이었다.
그들이 겁을 먹는 데는 사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로는 힘 조절을 잘못하여 공주를 다치게 하면 황제에게 벌을 받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청양 공주가 성晟 황자를 깔고 뭉갠 채 힘껏 때리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 포악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을 차마 잊기 힘들었기에, 공주와 진정으로 겨루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주를 때리기 싫은 것과 이길 수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청양 공주는 시시했는지 발길질로 아이를 넘어뜨리더니 손을 털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래요. 영안을 보러 가야겠어요.”
“전하, 잠시만요.”
진 사부가 황급히 공주의 앞길을 막았다.
“공주 전하,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황상께서…….”
“부황을 핑계 삼지 마세요.”
제멋대로인 청양 공주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시종을 불렀다.
“소덕자小德子, 궁을 나갈 거니까 가마를 준비해. 영 대인 집에 가서 영안을 봐야겠어.”
소덕자는 그리하겠다 대꾸하고는 잰걸음으로 달려갔다. 청양 공주는 이윽고 성 황자 앞에 서더니 그의 허리를 가리켰다.
“이거 나 줘.”
그녀가 가리킨 것은 연청색의 옥 단추 두 개였다.
성 황자는 포고를 할 때 입는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 특별히 허리춤에 옥 단추를 달았다. 햇살이 내리쬐면 아름답게 반짝이는 옥은 성 황자의 보물이었다. 묵용성이 황급히 옥 단추를 감싸 쥐더니 질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