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5화
내 이름은 묵용린, 대동월제국의 황태자다. 조정과 재야를 통틀어 막강한 권력을 지녔지만, 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넘지 못할 산이 하나 있다. 바로 내 부황이자 대동월제국의 황제인 묵용감.
부황은 정말 대단한 분이시다. 예전엔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지만 모후를 위해 옛 황제를 죽음으로 몰고 태자를 죽이고,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난 부황의 선택이 아주 옳았다고 생각한다. 황가의 귀족이라면 누구든 천하를 군림하려는 경쟁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설령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피비린내를 풍겨야 할지라도 신성한 황권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지위가 막강한 사람을, 이웃 나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군신을, 만백성이 벌벌 떨 만큼 두려워하는 황제의 위에 군림하는 자가 있다. 바로 내 모후이자 대동월제국의 황후인 백천범.
사실 모후는 전혀 무섭지 않다. 상냥하고 친절한 모후를 모두들 좋아했다. 어쩌면 역사상 가장 황후답지 않은 황후일지도 모른다. 규율은 지키지 않았고 기분이 좋을 땐 시종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까르르 웃기도 했다. 그런 모후 앞에서, 부황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충성스러운 강아지였다. 머리와 꼬리까지 흔들며 넉살 좋게 웃을 땐 땐 정말 제왕답지 않았다.
그런 부황의 모습은 좀처럼 봐주기 힘들었다.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는데 어찌 천하를 뒤흔들 수 있단 말인가. 한데 아내를 두려워하는 게 전염이라도 되는 것인지 부황뿐만 아니라 두 수하마저 그러했다.
대단한 실력자인 영구는 본 태자에게도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온몸이 철로 만들어진 듯 차가워 보였지만, 기홍 고고가 나타나기만 하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곤 했다. 그는 촉촉한 눈망울로 기홍 고고의 움직임만 부산스럽게 쫓았다. 나조차도 안중에 없다는 듯이. 그리고 내 사부인 가동은 녹하 고고가 눈썹만 치켜세웠다 하면 온 궁 안을 헤집으며 도망치기 급급한 전형적인 공처가다.
부인에게 꽉 잡혀 사는 그들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봐 줄 수 없을 정도였다. 동시에 태자로서 무거운 짐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훗날 천고에 길이 남을 황제가 되는 것 외에도 부군의 기강을 다시 세우는 막강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못가에서 잠시 고민에 잠겨 있는데 내 측근인 소태감 사희가 다가와 말했다.
“전하, 황상과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난 고개를 들었다. 부황과 모후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모후는 날 보더니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셨고 부황은 그런 모후에게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 닭살이 돋을 정도로 애정 어린 시선이었다. 그러나 내게 시선이 닿았을 땐 엄동설한의 싸늘함만 남아 있었다.
부황만큼 빠르게 표정이 바뀌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황이 모후와 청양을 바라볼 때의 표정과 나와 내 아우를 볼 때의 표정은 확연히 달랐다. 종잡을 수 없이 감정을 바꾸는 그를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본 태자도 그리 나약하진 않다. 나 또한 부황을 뵐 때와 평소의 얼굴이 달랐으니까. 무시무시한 호랑이 아비 밑에 개처럼 나약한 자식은 없는 법이다. 난 앞으로 걸어가 두 분께 인사를 올렸다. 모후가 물었다.
“우리 린아, 무얼 하고 있었니?”
난 공손히 답했다.
“모후께 아룁니다. 소자,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부황이 말했다.
“경치도 좋은데, 어디 시 한 수 읊어 보거라.”
부황의 요구는 조금 불만스러웠다. 부황은 걸핏하면 날 시험하려 들었다. 엄청난 대문호가 부황으로 환생한 건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꼭 흠을 잡는 것이었다. 부황은 모후 앞에서 유난히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그 점이 가장 싫었지만, 부황은 황제이고 난 아들이자 신하니 고분고분 받들어야 했다. 난 잠시 망설이다 뒷짐을 지고 목청을 높여 시를 읊었다.
“봄이 오니 물도 따스한 기운을 품고, 푸르른 연못은 하늘까지 이어지는구나. 연잎 사이를 노닐던 물고기는, 발소리에 놀라 물결을 이네.”
난 제법 만족스러웠지만 부황은 늘 그렇듯 트집을 잡으려 미간을 찌푸렸다.
“앞의 두 구절은 그럭저럭 들어 줄 만한데, 뒤로 갈수록 가관이구나. 운율은 무시하고 재미로 짓는 것이더냐?”
마음속으로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겉으론 공손히 대꾸했다.
“부황께서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부황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실력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모후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정작 모후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지 물고기 구경에 한창이었다. 부황이 막 입을 떼려는데 모후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 소록小綠이가 왜 이러지? 기운이 하나도 없네.”
늘 모후가 최우선인 부황은 곧장 날 지나쳐 연못 가까이 다가갔다. 나도 모후 곁으로 갔다. 소록이는 귀한 비단잉어인데, 몸이 옅은 녹색을 띠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모후는 이름을 지을 때 아주 단순하게 붙여 주었다. 대부분 소小자로 시작해 뒤에 색을 넣는 경우가 많았다. 소홍이, 소록이, 소백이, 소회 등등.
부황은 모후와 관련된 것이라면 아무리 하찮은 일도 전부 큰일이라 여겼다. 그가 시종들에게 소리쳤다.
“가서 위 태의를 데려오너라.”
내가 다 부끄러웠다. 위 태의는 모후의 옛 수행 의관으로, 모후의 진맥뿐 아니라 모후가 기르는 각종 동물들의 진료도 봐야 했다. 예전엔 모후의 토끼를 치료하기도 했고 나중엔 표범까지 돌보았다.
표범 정원으로 불려갈 때마다 위 태의는 죽을상을 했다. 그가 아픈 곳만 만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점박이는 그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했다. 매번 방울처럼 부리부리한 눈으로 위 태의를 노려보는 탓에 정원을 나올 때마다 그의 옷은 땀으로 흥건했다.
그러던 그가 지금은 모후의 잉어까지 진료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난 아무 말 없이 한쪽에 서서 소록이를 걱정하는 척했다. 사실은 위 태의에게 잉어를 치료하란 말을 했을 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구경하려던 참이었다.
황제의 명에 위 태의는 아주 빠르게 달려왔다. 역시나, 소록이의 상태를 살펴보라는 말에 그의 안색이 오락가락했다. 창백해졌다가 벌게졌다가, 또 자줏빛이 되었다가 파래졌다. 황당무계한 황제의 요구에 내가 다 억울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모후가 나섰다.
“황상, 위 태의가 어찌 잉어를 치료하겠어요. 난처하게 하지 마시어요.”
모후가 곁에 있던 소태감에게 말했다.
“소록이를 따로 물독에 넣어 정성스럽게 돌봐 주게. 상태가 좋아질지 아닐지는 하늘에 맡겨야지.”
소태감은 조심스럽게 소록이를 건져 물독에 넣었다. 아주 예쁘게 꾸민 물독이었다. 작고 동그란 연잎이 떠 있고 자색과 분홍색 수련이 두세 송이 피어나 있었다. 여기에 홀로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먹이도 뿌려 주었다. 모후는 물독에 기대어 한참 동안 잉어에게 이야기를 해 주며 힘을 북돋웠다.
모후는 늘 동물들과 이야기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부황은 모후 옆에 서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황의 애정 어린 눈빛은 촘촘한 그물처럼 모후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태감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와, 다시 생기를 찾았습니다. 마마의 말씀을 소록이가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위 태의도 곧장 알랑거렸다.
“마마의 따뜻한 마음이 천지를 감동시킨 듯합니다. 그 어떤 묘약도 견줄 수 없을 것입니다.”
옆에 서 있던 노비들은 하나같이 아첨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들이 모후를 칭찬하면 할수록 부황은 기뻐했고 사랑이 넘치는 눈빛으로 모후를 바라보았다. 결국 부황과 모후는 기쁜 얼굴로 다정히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 사희가 조용히 고했다.
“사실 소록이는 몸이 약해 다른 잉어들에게 먹이를 빼앗겨서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홀로 먹이를 독차지하니 생기가 넘칠 수밖에요.”
위 태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어찌 함부로 입을 놀리는가. 황상께서 마마를 달래는 것이거늘,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곤장이라도 맞고 싶은 겐가?”
사희는 혀를 날름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모후에게 근심이 있을 때마다 부황은 어떻게든 모후를 달래 주려 했다. 물론 나도 모후가 매일 즐겁길 바랐지만 훗날 난 내 부인에게 절대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 * *
현실에 안주하는 부황, 만백성의 어머니를 마다하는 모후, 귀신조차 꺼리는 여동생에 마음이 너무 여린 아우까지. 과인은 아마 역사상 가장 근심이 많은 황태자일 것이다. 심지어 부황은 날이 갈수록 게을러졌다. 매일 아침 조회 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신하들이 발언을 마치면 느긋하게 내 얼굴을 훑으며 묻곤 했다.
“태자는 어찌 생각하는가?”
진지하게 대답해야 했기에 최대한 조리 있고 이치에 맞게 내 생각을 고했다. 부황은 침착하게 내 대답을 듣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일은 태자에게 맡기겠다.”
어이가 없었다. 이미 부황이 일곱 건의 일을 맡긴 뒤였다. 부황이 내게 일을 맡기는 건 날 가르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부황이 성가시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자로서 응당 어려운 일을 도맡아야 했다.
조정에 발을 들인 후로 신하들 사이에서 내 지위가 월등히 높아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스승인 한림원 대원사 양승해는 예전에 날 볼 때마다 살짝 허리를 숙이며 가볍게 인사하곤 했는데, 지금은 저 멀리서도 정중히 읍하며 최대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권력의 정상에 선 느낌이 몹시 좋았다. 내 방에는 지도가 굉장히 많았는데 동월의 것과 주변 국가들의 지도였다. 지도를 보고 있으면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그럴 때면 나는 천하를 군림하는 상상에 빠졌다. 부대를 통솔하여 이웃 나라들을 하나하나 평정하고 모두를 본 태자의 발밑에 복종하게 하는 그런 상상 말이다.
이 위대하고 숭고한 목표를 위해 지금껏 그 늙은 무당을 죽이지 않았다. 심지어 몰래 그녀를 보호할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지난번 위지 가문에서 비밀리에 남원으로 요원을 보내 그녀를 죽이려 했는데, 내가 보낸 사람이 겨우 막아 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태의에게 그녀가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건강을 지켜 달라고 분부했다. 그녀는 내가 남원을 평정하는 그날까진 살아 있어야 했다. 그녀의 눈앞에서 남원의 어좌에 오를 테니까. 여러 계획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어 사부에게 말했다.
“과인은 이번 생에…….”
말을 마치기도 전에 스승이 내 이마에 꿀밤을 놓았다.
“일곱 살 아기가 어찌 이번 생이란 말씀을 하십니까. 황상과 마마는 안중에도 없으신 겁니까? 이 스승도요?”
사부 또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전형적인 바보인데도 무려 이품 대원의 관직을 받았다. 바보 가 대인은 스승다운 모습을 보인 뒤엔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히죽댔다.
“헤헤, 전하! 오늘은 황상과 마마께서 출궁하셔서 전하와 공주, 황자께서 다 함께 어선을 드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