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4화
난 솜 더미 위를 걷는 사람처럼 위태롭게 앞으로 나아갔다. 옆에 서 있던 소라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군주, 백 장군님이십니다. 장군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날 발견한 두형이 서둘러 내 앞을 가로막았다.
“군주, 어찌 면사포를 벗은 것입니까? 어서 가마로 돌아가십시오.”
그가 날 가로막은 탓에 앞으로 갈 순 없었지만, 내 시선은 백장간에게 있었다. 그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시선은, 과거의 어느 날처럼 허공에서 닿았다. 그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두형은 조급해졌는지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가만히 서서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장군을 막거라!”
백장간도 부하들을 데려오긴 마찬가지였다. 은색 갑옷을 갖춰 입은 병사들이 두형의 수하들과 대치했다. 서슬 퍼런 빛을 뿜어 대는 사람들을 헤치고, 백장간이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두형을 사이에 두고 내게 물었다.
“어찌 이리 마른 것이오?”
난 미소를 지었지만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서 그가 은은하게 일렁였다.
“말라야 더 예쁘죠.”
“허튼소리, 살이 좀 붙어야 더 예쁘오.”
두형은 백장간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길 한복판에 서서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했다.
“백 장군, 비켜 주시지요. 오늘은 군주와 제 혼삿날입니다. 장군께서 제 체면을 봐주시겠다면 저택에서 축하주 한잔 들고 가시고, 일을 그르치시겠다면 우리 두씨 가문도 가만히 있진 않을 것입니다!”
백장간은 그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경멸이 담긴 미소를 보냈다. 그리곤 다시 날 보았다.
“군주, 정말 이자에게 시집가고 싶소?”
난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순간에, 나 자신을 속일 순 있겠지만 백장간을 속일 수 있을까? 난 눈꺼풀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군주, 고개를 들고 날 보시오.”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내 눈을 보고 내게 말해 주시오. 정말 이자와 혼인을 하고 싶소?”
결국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백장간의 눈망울은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맑게 닦아 놓은 거울처럼 환한 그의 눈이, 내 속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 앞에서 어찌 거짓을 말할 수 있을까? 두형은 긴장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군주,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나와 혼인하겠다고, 나 두형의 아내가 되겠다고 말이오!”
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두형.”
두형의 안색은 급변했다. 좀처럼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때로는 미안하다는 말이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나 역시도 잘 알았다. 백장간이 내게 이 말을 했을 때, 나도 두형과 같은 기분을 느꼈을 테니.
“아니, 군주, 이게 대체…….”
그는 고개를 저으며 비틀거렸다. 표정엔 슬픔이 여실히 드러났다. 백장간이 손을 내밀었다.
“군주, 나와 함께 갑시다.”
내가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소라가 날 슬쩍 찔렀다.
“군주, 가서 장군과 잘 말씀해 보시어요. 풀지 못할 매듭은 없는 법입니다.”
난 소라에게 떠밀려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백장간은 그 틈에 내 손을 붙잡고 자신의 말에 나를 태웠다. 내 허리를 감싸 안은 그가 고삐를 힘껏 당기니 말은 신나게 앞으로 달려갔다.
이 난장판을 어찌 마무리해야 할지 몰랐지만, 동시에 알 수 있었다. 날 짓누르고 있던 근심도, 머릿속의 다툼도 말끔히 사라졌음을. 뒤에는 하늘을 떠받칠 듯 단단한 사내의 가슴이, 앞으로는 찬란한 꽃이 만개한 거리가 펼쳐졌고 하늘에서는 금빛 햇살이 축복하듯 쏟아지고 있었다.
백장간은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앞으로 향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사방에서 금색 들판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밀 이삭은 고개를 숙인 채 바람에 한들거리며 금빛 물결을 만들었다.
황금 바다와 푸른 호수를 지나 여러 오두막을 뒤로하고, 우리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따금 새소리가 울릴 뿐, 산속은 고요하게 우리를 반겨 주었다. 짙은 풀 내음과 흙냄새가 끼쳐왔고,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은 우리 몸에 얼룩덜룩한 빛 그림자를 남겼다. 난 백장간에게 물었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는 뜸을 들이다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것이오.”
말은 험한 산길을 안정적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난생처음 말을 타고 산행을 하는 나로서는 다소 겁이 났다. 그때 백장간이 두 팔 사이에 날 꼭 가두더니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그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나지막이 울렸다.
“겁내지 마시오. 내가 있지 않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그가 곁에 있다면 무섭지 않았다.
숲을 뚫고 나오자 눈앞이 환해지는가 싶더니, 웬 무덤이 보였다.
무덤은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넓은 부지 한쪽에는 정자도 있었는데, 돌로 만들어진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무덤 주변에 심어진 정갈한 나무와 풀을 보니, 누군가 일부러 조경을 한 듯했다. 무덤 양쪽으로는 커다란 계수나무가 가지마다 노란색 꽃을 가득 피워 짙은 향을 뿜어냈다.
녹나무도 몇 그루 보였는데 무성한 잎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다. 그 아래에는 국화, 난초, 월계 등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심겨 있었고, 꽃밭 사이에 색색이 돌을 깔아 무덤으로 가는 오솔길을 만들어 두었다.
날 이끌고 오솔길을 걷던 백장간이 무덤 앞에 멈춰 섰다. 이쯤 되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누구의 묘예요? 왜 저를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백장간은 아무 말 없이 향을 가져와 나눠 주더니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절을 했다.
난 그를 따라 절을 올린 후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읽어 보았다. 검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비석에 금색으로 글씨를 새겼다. 일품 고명부인 손씨의 영혼이 이곳에 잠들었다는 내용이었는데 수양딸 백천범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었다.
가슴이 멎는 듯했다. 황후 언니의 의모義母 무덤일 줄은. 난 언니에게 의모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더 의아했던 것은 날 이곳에 데려온 백장간의 의중이었다.
무덤 앞에서 오랜 시간 서 있던 백장간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유모, 제 부인입니다. 이제 마음 놓으세요.”
난 또 한 번 놀랐다. 유모라니, 그럼 황후 언니의 유모이기도 한 것인가? 소박하면서도 인자한 언니의 유모는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언니가 유모 얘기를 시도 때도 없이 꺼냈으니까. 그 와중에 백장간의 말이 가슴을 뛰게 했지만, 무덤 앞이니 얌전히 침묵만 지켰다. 이윽고 백장간은 날 데리고 정자로 향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왜 절 이곳에 데려온 거예요?”
그는 허리춤에 있던 작은 술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더니 건넸다.
“마시겠소?”
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저 그의 설명을 듣고 싶었다. 진심 어린 그의 속마음을 간절히 듣고 싶었다. 그는 술병을 들고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술에 취해야 내게 진실을 말할 용기가 생기는 듯했다.
“천범이에 대한 마음은 유모가 가장 먼저 알아챘소. 그때 유모가 경고를 했지. 천범이를 지켜 줄 능력이 되지 않거든 건드리지도 말라고. 그 말 때문에 군대에 들어갔고 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고자 노력했소. 좋은 성과를 얻어 금의환향하면 그 애를 지켜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소.
하지만 소원대로 이루어지진 않았소. 훈련병으로 있을 때 천범이가 초왕비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그땐 하늘이 매정하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모든 걸 포기하고 그 애를 찾으러 가고 싶었소…….”
여기까지 말한 그가 다시 술 한 모금을 들이켜더니 날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애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줘도 괜찮겠소?”
난 조용히 턱을 괸 채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해 난 열두 살이었소. 노는 걸 좋아해서 공부를 하지 않았다가 큰어머니에게 혼쭐이 났소. 사당에서 무릎을 꿇고 벌을 받아야 했지. 엄동설한에 음식도 주지 않고, 방석 하나 없이 차디찬 바닥에 무릎을 꿇게 되었소.
난 그때 겁 많은 아이였던지라 음산한 사당이 어찌나 두렵던지, 그대로 죽을 것만 같았소. 한편으로는 무정하고 냉혹한 집이 몹시도 미웠소. 밖에서는 세찬 바람까지 부니 두렵고 절망적인 마음만 들었지,
그때 자그마한 아이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소. 까맣고 커다란 눈으로 날 보며 웃던 그 아이가 품에서 찐빵을 건네주었소. 난 그 애가 하늘에서 내려온 요정인 줄 알았소. 당시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지만, 몇 년이 지난 뒤에 알게 되었지. 그 애가 날 구해 주고, 날 바꿔 놓았음을.
그 애가 아니었다면 난 여전히 나약하고 겁 많은 백씨 집안 공자이자 큰어머니의 눈치만 보던 서자였을 것이오. 그 집에서 나만 지옥을 견딘다 여겼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소. 내 고통은 그 애의 일 할도 채 되지 않는다는 걸…….”
그가 천천히 털어놓는 과거에 눈앞이 점점 뿌옇게 번졌다. 그는 조금 당황했는지 이야기를 멈추고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찌 우는 것이오?”
난 흐느끼며 말했다.
“언니가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서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줄 알았다. 하지만 황후 언니는 나보다 더 힘든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도 언니가 누구를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건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언니를, 황제는 자신의 햇빛이라 불렀다. 사실 언니는 나에게도, 백장간에게도 그런 존재였다. 이런 여인을 누가 좋아하지 않겠는가? 내가 사내였더라도 분명 언니를 좋아했을 것이다.
“맞소. 아주 힘들게 지냈소.”
백장간이 말했다.
“하지만 난 그 애처럼 고통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은 보지 못했소. 그 애는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고 있었지. 그때 난 이미 그 애와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은 내 감정을 점점 크게 만들었소.
그러나 우리 인연은 딱 거기까지였소. 그 애를 먼저 알게 된 건 나였지만, 그 애는 내 사람이 되지 않았지. 그래도 그 애가 이렇게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위안이 되오. 황상께서는 줄곧 중매를 서 주시겠다 했지만, 난 매번 거절했고 그러다 그대를 만나…….”
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찌하다 내 이야기로 화제가 바뀌었단 말인가.
“그댄 어린 천범과 닮았소. 겉으로 보기엔 겁이 많아 보이지만 주관이 뚜렷해서 말썽을 피우기 시작하면 골치가 아플 지경이오. 처음엔 그대를 정말 여동생으로 여겼지만, 나중엔…….”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솜씨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이따금 그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그 애로 여기기도 했소. 그 애에게 해 주지 못한 것들을 다 해 주고 싶었으니까. 그대를 잘 보살피고 아껴 주어 언제나 내 곁에 두고 싶었소. 다른 이에게 시집을 보내긴 싫었기에, 춘위 때 두형을 이겨 황상께 혼인을 청한 것이오.”
그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혼삿날이 다가오니 복잡한 감정이 들었소. 그 애를 대신해 그대를 내 옆에 두는 건, 너무 비열하다는 생각에 괴로웠지. 점점 그대를 마주할 낯이 없어, 일부러 술에 취한 것이오. 하지만 그대가 날 신방으로 오게 할 줄은 몰랐소. 술에 취해 한 실언으로 그대가 내 마음을 알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날 떠난 이유를 알게 되자 오히려 홀가분했소. 하지만 미안한 마음을 어찌 갚아야 좋을지 몰라 그저 그대가 행복하기만 바랐소. 그대가 두형에게 시집을 가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난 두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해 줄 생각이었소. 그리하겠다 다짐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에서 두형이 수작을 꾸미는 것을 보았소.
사실을 폭로하지 않은 것은 한 사내가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작을 꾸미는 걸 이해했기 때문이오. 그 후 그대와 두형이 혼삿날을 정했고, 난 황상께 강남에 보내 달라고 청했소.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모두에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적어도 그편이 덜 민망할 테니.”
그의 말이 멎었다. 그는 이제 술을 마시지 않고 술병만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이렇게 해야 진정으로 그대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했소. 그대를 향한 내 감정은 그저 죄책감뿐이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강남에서 지내는 동안, 단 한 순간도 그대를,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잊을 수 없었소. 그 애가 아니라 오직 그대 생각만 떠올리고 있었지.
당신이 두형과 곧 혼인을 한다는 생각을 하면, 초조하고 불안했소. 무얼 해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저 그대와 두형이 절을 올리고, 두형이 그대를 신방으로 끌고 가는 모습만 눈앞에 아른거렸소.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당신을 찾아온 것이오, 소쌍.”
그가 내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내게 다시 한번 시집을 오면 안 되겠소?”
그의 솔직한 말 앞에서, 난 또다시 울음을 터트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지금껏 오직 백장간만 좋아해 왔다. 그가 털어놓은 마음은 찬란한 햇빛 같아서, 꽁꽁 얼어 있던 그간의 응어리를 다 녹여 버렸다. 한데 어찌 싫을 수 있겠는가? 그가 날 품에 안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시오. 우린 이제 행복할 날만 남았소. 날 믿으시오. 산을 내려가 저택에서 혼사를 치릅시다.”
“아뇨.”
내가 말했다.
“지난 혼사 때 아직 못다 한 일이 남았어요. 그거부터 마무리해야 해요.”
그가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그게 무엇이오?”
난 부끄러움을 억누르며 웃었다.
“합방이요.”
난 그가 다시 후회할까 봐 조금 걱정되었다. 그러니 두 번 다시 쓸데없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관계를 확실히 하는 편이 나았다. 그는 입을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좋소. 그대에게 맡기겠소.”
난 그의 진심을 믿었다. 사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참 단순한 일이다. 상대가 원하는 것에 응하면 되었다. 그래서 그가 다시 혼인을 하자는 말에 난 그리하겠다고 했고, 내가 합방을 하자는 말에 그가 그리하겠다고 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온갖 장애물을 넘으며 몸도 마음도 다 지쳤지만… 백장간이 옆에 있으니 그 무엇도 문제 될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