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3화
다행히 이번 입궁으로 어떤 결말이 나진 않았다. 황후 언니는 내 뜻을 존중해 준다고 했지만 황제는 화해를 권했다. 나에겐 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출궁할 때, 백장간을 마주쳤다. 금수교에 서서 궁 문 쪽을 바라보던 그가 날 발견하자 눈동자를 반짝였다. 황급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가까워지니, 오랜 시간 보지 못한 탓에 아주 조금 두근거렸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표정은 밝지 못했다.
“장군께서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누굴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당신을 기다렸소.”
“무엇 하러 절 기다리십니까?”
난 알겠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아, 제가 황상께 뭐라도 말씀드릴까 봐 겁이 나신 거군요?”
그는 헛기침을 한 차례 하더니 말머리를 돌렸다.
“황후께서 두형과 이어 주겠다고 하셨다 들었소.”
“장군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날 바라보며 말했다.
“소쌍, 진지하게 묻는 것이오. 정말 두형과 함께하고 싶소? 그렇다면 함께 황상께 찾아가 이혼을 윤허해 달라고 청을 드립시다. 난…….”
그의 목소리에 어느새 옅은 슬픔이 묻어났다.
“그대에게 피해를 주진 않을 것이오.”
울컥 화가 치밀었다. 난 그를 힘껏 밀치며 매섭게 소리쳤다.
“내 일에 상관하지 말아요!”
그는 다리 난간에 기댄 채 놀란 표정을 보였다. 나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궁문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망할 백장간, 어찌 나타날 때마다 이리 상처를 준단 말인가? 일부러 날 화나게 하려고 하늘이 내려보낸 자일까? 난 최대한 빠르게 나아갔다. 뒤에서 백장간의 외침이 들려왔다.
“소쌍!”
현이 끊어진 악기처럼, 백장간은 애달프게 날 불러 댔다. 결국 난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던 그가 입술을 꿈틀하더니 결국 침묵을 지켰다. 속으로 셋까지 세었지만, 그는 날 쫓아오지 않았다. 백장간, 넌 기회를 놓친 거야. 난 다시 앞으로 향했다. 소라가 내 옆을 바짝 따라붙으며 속삭였다.
“군주, 백 장군님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난 코웃음을 쳤다.
“네 눈이 침침한 거겠지.”
그는 무려 대장군이다. 피는 흘릴지언정 눈물은 흘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환한 대낮에 나 때문에 눈물을 보인다고?
* * *
난 홀로 골목에 서서 두형을 기다렸다. 측간에 간 그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두커니 서 있던 난 고개를 숙이고 발끝으로 땅을 끄적거렸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두형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웬 복면을 쓴 자였다. 복면 틈으로 보이는 눈매가 험상궂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서둘러 앞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복면을 쓴 또 다른 자가 어느새 내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냐? 대체 무얼 하려는 것이야?”
좁은 골목에 꼼짝없이 가로막혔으니, 난 가슴을 졸이며 어떻게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다격군주인가?”
“아니.”
난 손사래를 쳤다.
“사람 잘못 봤어. 다격군주가 어찌 이런 곳에 오겠어?”
“웃기고 있네.”
둘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네가 사는 곳에서부터 따라왔다. 네가 다격군주잖아!”
두 사람이 날 향해 다가왔다.
“얌전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럼…….”
그들은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웃었다. 복면에 가려져 있었지만, 입꼬리가 비틀어 올라간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멈춰!”
그때 매서운 호통소리와 함께 누군가 지붕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은백색 장포가 허공에 흩날리며 빛을 뿜어냈다. 어찌나 우아한지, 신선 같은 자태였다. 그는 내 앞에 가볍게 착지하더니 손을 뻗어 날 자신의 뒤에 숨겼다.
“군주, 겁먹지 마십시오. 제가 왔으니까요.”
두형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굳건했기에 절로 마음이 놓였다. 난 두형에게 말했다.
“네, 공자가 있으니 겁 안 나요.”
그는 날 담벼락에 바짝 붙여 세우더니 기합을 넣으며 두 괴한에게 달려들었다. 워낙 동작이 빨라 누가 이기고 지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과 흰옷을 입은 한 사람이 한데 엉켜 있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왜일까. 전혀 무섭지 않았던 터라 흥미진진하게 싸움을 지켜보았다. 결국 그들의 동작은 점점 느려졌고, 두 괴한의 머리에는 심한 상처가 났다. 괴한의 얼굴에선 붉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두형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는지 품위 있는 자태를 지켰다. 마침내, 두 괴한이 허겁지겁 도망을 쳤다. 두형이 내게 다가와 사죄했다.
“군주를 놀라게 했으니 벌을 내려 주십시오.”
“절 구해 주셨는데, 벌이라니요.”
난 곁눈으로 골목 입구를 바라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누군가 저곳에 서 있었는데 사라지고 없었다. 두형이 괴한을 물리치긴 했지만, 내 기분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두형이 나타났을 때, 백장간도 골목 입구에 서 있는 걸 보았으니까.
내가 위협을 당하는 걸 빤히 보았으면서도 구하러 오지 않다니. 이제 일말의 정도 남지 않은 것이란 말인가? 먹먹한 슬픔만이 몰려왔다. 이대로 가슴이 찢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난 사흘 내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슬픔을 달랬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내 결심을 들은 소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군주, 그날 골목에서 일어난 일은 두 공자가 꾸며낸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고약한 심보를 아시면서도 어찌……”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 지냈는데 내가 결정을 내리지 않으니 초조해진 것이지. 그래서 계략을 쓴 것이고. 심보가 고약하긴 하지만 어쨌든 날 얻기 위해서 그런 짓을 꾸민 거잖아. 게다가 진짜 날 해할 생각도 없었고.”
소라는 내 결심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는지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성가셨던 난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열자 마부가 보였다. 자그마한 바구니를 든 그가 활짝 웃어 보였다.
“부인이 연근을 새로 절였다고 군주께 좀 가져다 드리라고 해서요.”
난 바구니를 받아 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가 날 몇 차례 힐끔거리며 말했다.
“군주, 근심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난 씁쓸하게 웃으며 문 옆에 기댔다.
“마부는 아내를 좋아해요?”
그는 얼굴을 붉히더니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고 말고요. 다른 이들은 부인이 절 업신여긴다고 하지만, 못된 사람은 아닙니다. 부인이 집 안팎의 일을 잘 돌봐서 그래도 잘 돌아가는 편이지요.”
그가 잠시 말을 끊더니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군주께서 절 좋게 봐 주셨을 때, 저도 고민에 잠겼지만 이제야 깨달은 것 같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면 더 원한다 한들 소용없다는 것을요. 보잘것없을지라도 저에게 주어진 삶을 착실히 살아가는 게 더 낫지요. 어떤 일들은 후회가 남을지 몰라도, 그 또한 아름다운 추억이죠. 과분하더라도 희망을 가져 보았으니까요.”
조금 놀랐다. 마부가 이렇게 철학적인 이야기를 할 줄이야. 게다가 백장간과의 관계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내 것이 아니면 아무리 원해도 소용없는 것을. 내 삶을 착실히 살면 그만이지.
마부의 말은 내 결심을 확고하게 다져 주었다. 그래, 사랑하는 사내와 함께할 수 없다면, 날 사랑해 주는 사내를 찾으면 되지. 어쩌면 그편이 더 행복할지도 몰랐다.
난 소라를 통해 백장간에게 서신을 보냈고, 함께 입궁해 황제에게 이혼을 청했다. 황제는 내키지 않아 했지만, 황후 언니를 이길 순 없었다. 우린 결국 황제의 옥새가 찍힌 이혼 문서를 받아 진짜 남남이 되었다.
출궁할 때 난 가마에, 백장간은 말에 올라탔다. 가마에 앉아 규칙적으로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있으니 씁쓸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마지막으로 집에 데려다줄 작정이란 말인가?
참을 수가 없던 난 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따라오던 사람은 백장간이 아니라 그의 수하이자 내게 활쏘기를 가르쳐 주던 풍천괴였다. 그는 말에 탄 채 두 손을 맞잡고 예를 갖췄다.
“군주를 뵈옵니다.”
내가 물었다.
“왜 날 따라오는 거죠?”
“장군께서 집까지 모셔다드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아주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난 무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필요 없으니 그만 돌아가세요.”
풍천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삐를 당겨 가마 뒤로 향했다. 여전히 말발굽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소위 장군이란 자들은 상부의 명을 하늘처럼 여기기 때문에 도중에 돌아갈 수 없을 터였다.
백장간이 이러는 이유를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는 남매도, 친구도 아닌 남남이 아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두형과 혼인 날짜를 정했다. 두 승상은 기뻐하며 저택에서 큰 연회를 열었다. 입구에 붉은 양탄자를 쭉 깔아 놓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원 담벼락에 줄줄이 홍등을 걸어 놓았다. 극단까지 불러 떠들썩한 연회를 즐겼다. 모르는 이들이 보면 이날이 두형의 혼삿날이라 여길 정도였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두형이 애걸복걸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참석했다. 두형은 신분이 높은 나를 후원으로 안내했다. 난 그곳에서 집안 여인들과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다들 날 상석에 안내하고 예를 갖춰 깍듯이 대했다. 내게 예쁘고 단아하다며 아첨하는 부인도 적지 않았다. 끊임없이 예쁘다고 하는데 무료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아, 듣자니 백 장군이 강남으로 떠난다더군요. 봄에 갓 짠 비단을 가지러 간다던데, 대장군이 어찌 그런 일을 한단 말입니까.”
다른 이가 말했다.
“사실 그 일은 저희 바깥양반이 하시던 일이었어요. 매년 이맘때마다 강남을 다녀와야 했는데 이번엔 백 장군이 직접 이 일을 맡겠다고 황상께 청을 드렸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서방님은 더 편해졌으니 장군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난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백장간이 그런 선택을 내린 이유는 참으로 뻔했다. 나와 두형의 혼사를 알고 일부러 피하려는 게 아닌가.
* * *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날씨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여름 내내 내 마음은 칠월의 이글거리는 날씨처럼 초조하고 불안했다. 온갖 수를 써 봐도 좀처럼 잔잔해지지 않았다.
백장간은 수 개월간 깜깜무소식이고, 두형과의 혼삿날이 다가올수록 초조함이 커져 갔다. 머릿속에선 늘 두 소인배가 다퉜다. 한 명이 “두형은 믿고 의지할 만한 좋은 사람이야. 하늘의 달을 따 달라고 하면 분명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 할걸”이라고 주장하면, 다른 한 명은 “두형은 군주라는 내 신분 때문에 잘해 주는 것뿐이야. 가식에 불과하다고. 두형에게 시집가면 아마 근심에 잠긴 나날을 보내게 될걸”이라고 반박했다.
난 하루하루 야위어 갔다. 턱이 뾰족해진 날 보고 소라가 마음 아파했다.
“군주, 어찌 이리 스스로를 괴롭히십니까? 백 장군님께 서신을 쓰시어요. 어서 돌아오시라고 말이에요.”
난 고개를 저었다.
“무엇 하러 서신을 써. 장군이 돌아온다고 바뀌는 것도 없는데. 장군과 나 사이엔 넘을 수 없는 강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원치 않는 자에게 시집을 가신다면 앞으로 얼마나 괴로우시겠습니까.”
“내가 은애하는 사내는 날 은애하지 않는걸.”
이제 난 거의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아무한테나 시집을 가도 상관없잖아?”
“군주!”
“아무 말 마.”
난 축 늘어진 채 그대로 엎드렸다.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이렇게 할 거야.”
그만 편해지고 싶었다. 초조함도, 머릿속의 다툼도 날 지치게만 만들었다.
* * *
입추가 되니 마음은 제법 가라앉았다. 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묵묵히 하루하루를 견뎌 냈다. 마침내 팔월 초파일, 대길일이자 두형이 나를 맞이하러 오는 날이 되었다.
신부를 맞으러 오는 대열은 지난번보다 훨씬 더 길었다. 꽃가마가 지날 땐 온 하늘에 꽃잎이 흩날렸다. 꼭 꽃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거리로 나온 백성들이 꽃비를 맞으며 한마디씩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군주께서 또 시집을 간단 말인가? 몇 달 전에 백 장군과 혼인을 한 것이 아니던가?”
“혼인하고 사흘째 되는 날 군주께서 장군의 저택을 떠나셨다더군. 그 후로 이혼을 했다네.”
“그랬군. 아녀자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법이거늘, 다격군주의 팔자도 그리 좋진 못한가 보군.”
“쉿, 함부로 말하지 말게. 누가 듣겠어. 다격군주는 황후 마마의 의매가 아니던가. 황상께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분이시라네.”
난 붉은 면사포를 벗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녀자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니. 안타깝지만 이번이 마지막 혼사일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앞으로 세 번째, 네 번째 혼인을 치른다면 그땐 또 뭐라 할까? 아니, 이제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난 눈을 감고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앞에서 부는 나팔 소리는 하늘을 울릴 만큼 시끄러웠지만 어쩐지 졸음만 쏟아졌다. 난 그대로 가마 벽에 기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가마가 멈춰 섰다. 바깥에서 화를 내는 두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 장군, 어찌하여 길을 막는 것입니까?”
엄동설한에 냉수를 끼얹은 듯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가마에서 뛰어내려 보니 누군가 대열 앞을 가로막은 게 보였다. 눈처럼 하얀 장포를 입고 나타난 백장간이었다. 잠들어 있던 심장이 세차게 내달리며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