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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51)화 (650/1,192)

제651화

종이가 불을 완전히 감싸지 못하듯, 내가 백 장군의 저택을 떠났단 소식은 황후 언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언니는 사람을 보내 궁으로 들라는 말을 전했다. 황후 언니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동고동락하며 서로 의지하던 사이였다. 가난하지만 즐거웠던 그 시절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따뜻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궁 안에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 언니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언니 덕분에 군주가 되었다. 또 언니 덕분에 백 장군의 저택으로 보내져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기도 했다.

그래서 언니를 만나니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황후 언니는 모르겠지만, 이제 언니와 나의 관계는 자매에서 연적으로 변해 버렸으니까.

“소쌍아.”

황후 언니는 여느 때처럼 친근하게 나를 불렀다.

“어서 앉아. 기홍이 새로 만든 연꽃 전병인데 먹어 봐. 얼마나 향긋한지 몰라.”

나는 편히 손을 뻗어 전병을 집어먹었다.

“언니, 전병을 맛보라고 절 부르신 거예요?”

“당연히 아니지.”

그녀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요 계집애, 까닭 없이 옛집으로는 왜 돌아간 거야? 백 장군이랑 말다툼이라도 한 거야?”

“아뇨.”

“한데 왜?”

난 말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원치 않는다면 언제든 혼약을 깨도 좋다고. 한데 네가 백 장군을 제법 마음에 들어 하길래 내버려 두었지. 큰오라버니가 워낙 인정이 두텁고 배려심이 깊으니까 두 사람이 혼인을 하면 걱정이 한 번에 해결될 줄 알았어. 한데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다 제 잘못이에요. 언니한테 걱정만 끼쳐드렸어요.”

황후 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 두 사람도 행복하길 바라는 거야. 너와 오라버니가 이렇게 되었으니 난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소쌍아, 정말 되돌릴 수는 없는 거야?”

난 언니에게 되물었다.

“백 장군이 언니를 찾아왔었어요? 어떻게 하겠대요?”

“오라버니는 당연히 너와 잘 지내고 싶어 하시지. 오라버니의 마음은 진심이야.”

난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가식밖에 없는 사람에게 진심이 있겠는가? 황후 언니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겠지.

“장군이 왔을 때, 황상도 곁에 계셨죠? 황상께서는 뭐라고 하셨어요?”

“너와 오라버니는 내 친정 식구들이니까 황상께선 내 의견을 따르겠다고 하시지. 물론 난 너와 오라버니의 의견을 따를 거고. 난 그저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었으면 좋겠어.”

황후 언니는 내 손을 잡고 가볍게 쓰다듬었다.

“소쌍아, 너에게 달렸어. 네가 마음을 정하면 곧장 오라버니에게 널 데리러 가라고 할게.”

난 천천히 손을 빼내고 조용히 말했다.

“언니, 아무래도 언니한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황후 언니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알겠어. 언니도 더는 강요하지 않을게. 어쨌든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좀 더 생각해 봐. 단칼에 자르지 말고. 오라버니에게도, 너 자신에게도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거야. 어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언니 말대로 할게요.”

황후 언니는 궁녀에게 갓 담근 과실즙을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언니가 직접 담근 것인데 초여름이라 유난히 새콤달콤했다. 내가 맛있게 먹으니 언니는 가져가서 먹을 수 있게 따로 담아주었다. 내 기분이 좋아 보이자 언니가 조심스레 물었다.

“소쌍아, 오라버니와는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된 거야? 오라버니는 절대 말하려고 하지 않던데.”

당연히 말 못 하겠지. 말하는 순간 목이 날아갈 테니까. 만약 누군가 언니를 흠모한다고 말한다면 황상은 구족을 멸하려 들 것이다.

나도 말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말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일이니까. 우리 두 사람이 묻고 가면 평화롭게 끝날 일이었다. 난 웅얼거리며 말했다.

“언니, 그건 묻지 말아 주세요.”

알아 봤자 근심만 깊어질 테니. 황후 언니는 아무리 궁금하다고 해도 강요하거나 몰아세우는 법이 없었다. 말하기 싫어하는 내 모습에 언니는 곧장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언니는 내게 식사를 하고 가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황제와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워낙 무시무시한 사람이라 그에게까지 내 속내를 속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하늘은 날 약 올리는 듯 결국 그와 마주하게 되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황제가 갑작스레 날 불러 세웠다. 그는 상냥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내게 손짓했다.

“군주가 왔었군. 한데 어찌 밥을 먹지 않고 그냥 가는 것인가?”

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소쌍, 황상을 뵈옵니다. 약조가 있어 출궁 후에 먹으려던 참입니다.”

황제는 짧게 대꾸했지만, 그만 가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차분하게 물었다.

“듣자니 백 장군과 다투어 옛집으로 들어갔다지?”

황제는 그간 내게 어떤 것도 물은 적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대놓고 이 일을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신경 쓰는 일을 나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난 황제 앞에서 늘 신중하게 행동했기에 두 눈을 내리깔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황제의 용포를 수놓은 금색 실이 햇살에 반짝이는 순간, 엄청난 압박을 느꼈다. 이 세상에 황후 언니를 제외하고 감히 황제 앞에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난 솔직하게 인정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예,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다.”

“무슨 이유로 다투었는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역시 황제였다. 그는 굳이 말을 돌리지 않았고, 난 황후 언니 앞에서처럼 무성의하게 굴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찌 답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고……. 내가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못하니 재차 질문이 돌아왔다.

“어찌, 말할 수 없는 것인가?”

평소와 똑같은 말투였지만, 목소리에는 한껏 무게가 실렸다. 그가 지금 경고를 보내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아닙니다.”

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큰일은 아닙니다. 혼삿날 들어온 축의금 때문에… 장군과 의견이 달라서 말다툼을 한 것입니다.”

황제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백 장군이 고작 돈 때문에 군주와 말다툼을 했다? 내가 아는 백 장군은 그리 쩨쩨한 사람이 아니거늘.”

“그것이 아니라 장군은 제게 사비로 쓰라며 돈을 다 주려고 했지만, 전 그리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부부라면 돈에 있어서도 응당 공평히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 일로 말다툼을 하게 된 것입니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빤히 바라보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백 장군이 군주와 혼인을 한 건 큰 복이군. 장군이 빨리 군주의 화를 풀어 주어 함께 저택에서 행복한 날을 보냈으면 좋겠네.”

황제에게 백장간과의 이혼을 윤허해 달라고 청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차마 언급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신을 썼다. 반드시 백 장군 본인에게 줘야 한다는 말과 함께 소라에게 건넸다. 혹여나 황제가 백장간에게 다툰 이유를 물었다가 대답이 서로 다르면 황제를 기만한 죄가 되기 때문이었다.

소라가 떠난 뒤에야 비로소 백장간이 나보다 먼저 궁에 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황제가 이미 그에게도 이유를 물었던 것이라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소라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라의 모습이 보였다. 한데 어째서 백장간도 함께 온단 말인가?

지난번과 달리, 소라는 방에 남지 않았다. 이제 황제까지 이 일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백장간도 무서워하는 그녀인데 황제는 오죽 무서울까.

백장간은 방 안으로 들어와 탁자 앞에 앉더니 침묵을 지켰다. 우리 두 사람은 조각상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난 바닥을 보았지만, 백장간은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던 것 같았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으니까.

“어째 좀 마른 것 같소.”

난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르면 더 보기 좋잖아요.”

“아니, 살이 좀 있어야 더 예쁘오.”

그가 날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소라의 솜씨가 요리사보단 못하는 듯하니 저택 요리사를 이곳에 보내 주겠소.”

“아뇨. 여긴 저택보다 작아서 많은 이들이 지낼 수 없어요.”

그의 가식적인 관심이 싫은 만큼,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런 쓸데없는 말이나 하려고 오신 거예요?”

그는 품에서 내가 쓴 서신을 꺼냈다.

“왜 이런 걸 보냈소? 황상께서 날 벌하실까 봐?”

“아뇨. 황상께서 절 벌하실까 봐요. 어쨌든 제가 황제를 기만했으니까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이미 내게도 이유를 물으셨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황상께서 물으시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요?”

“안 했소.”

난 불쑥 그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단하네요!”

“황상은 종이호랑이나 다름없으니 그리 겁낼 것 없소.”

백장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후께서 계시니 황상께서 감히 그대를 어찌하진 못하실 거요.”

“해서 장군도 황후 언니만 믿고 그리 막 나가는 것입니까?”

“아니.”

그는 조금 불편해졌는지 내 시선을 외면했다.

“예전에 황제와 여러 번 전투를 한 적 있소. 그는 날 몇 번이나 붙잡았지만 죽이지 않고 풀어주었소. 그래서 그가 날 죽이지 않을 걸 아는 것이오.”

“황후 언니를 향한 장군의 마음을 아셔도 죽이지 않으실까요? 그는 황제예요. 체면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겠어요?”

백장간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에 서리가 내리는 듯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배웅하려 했다.

“그만 가세요. 이혼장을 드렸으니 우린 남이에요.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세요. 혼인하지 않은 남녀가 왕래하면 시답잖은 말이 오갈 거예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그러다 대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소쌍, 미안하오.”

분명 괜찮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정말이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난 그를 거칠게 밀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꺼져!”

백장간은 내 손길에 밖으로 밀려났다. 허리에 손을 얹고 식식거리는데 길모퉁이에 서 있는 마부가 보였다. 그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내 화는 그에게까지 뻗쳤다.

“뭘 봐, 썩 꺼져!”

진노한 내 모습에 깜짝 놀랐는지 마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아났다. 소라가 날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군주, 그리 화를 내면 몸에도 좋지 않습니다. 옥수수 갈비탕을 끓였으니 금방 내어 드리겠습니다.”

난 정원 의자에 앉아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정말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다. 이미 백장간에게 자존심이 짓밟혀 갈기갈기 찢어졌는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미안하오’? 미안하긴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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