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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50)화 (649/1,192)

제650화

장막을 걷는 소리가 났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백장간일 테지. 그가 아무 말 없이 이불을 젖히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난 그와의 동상이몽을 더는 견딜 수 없었기에 몸을 돌려 물었다.

“백 장군, 뭐 하는 거예요?”

그가 당당하게 말했다.

“자려는 것이오.”

“장군 방으로 가서 자요.”

“함께 가겠소?”

“안 가요.”

“하면 나도 이곳에서 자겠소.”

“안 돼요.”

“어째서?”

그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혼인까지 한 부부가 아니오.”

난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뭐 어쨌다고요?”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화난 거 잘 아오. 소쌍, 어젯밤은 내가 정말 잘못했소. 어젯밤의 실수를 오늘 만회하면 안 되겠소?”

내가 물었다.

“어떻게 만회할 건데요?”

그가 얼굴을 붉히더니 말했다.

“합방을 하겠소.”

난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뻔뻔하긴, 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와 합방을 하려고 해?! 차라리 마부가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부는 나 때문에 처를 내쫓겠다고 하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두형보다도 못했다. 두형은 언제나 나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내보였으니까.

“전 싫어요.”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더니 손을 뻗어 날 안았다.

“화내지 마시오, 응?”

애정이 담긴 목소리는 달콤하고 눈빛도 따스했다. 그렇게 치명적이었던 것이, 지금은 아무 소용없었다. 그저 원망하는 마음만이 커져 갔다.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쳤지만, 그의 앞에서는 힘없는 병아리일 뿐이었다.

그의 손길 몇 번에 순식간에 두두만 걸친 차림이 되었다. 나는 곧바로 그의 손을 깨물었다. 죽을힘을 다해 힘껏 깨물었더니 고통을 참지 못한 그가 날 밀쳤다. 그는 깊게 상처가 패인 손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쌍, 어찌…….”

내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울 줄은 몰랐는지, 조금 화가 난 얼굴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치 않는다면 나도 더는 강요하지 않겠소. 그만 주무시오, 난 갈 테니.”

말을 마친 그가 몸을 돌려 침대를 내려갔다. 난 이불로 몸을 꽁꽁 감쌌다. 살아남은 감격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소라가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살폈다.

“군주, 괜찮으세요?”

“괜찮아.”

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날 어떻게 하진 못했거든.”

“군주.”

소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잘 생각해 보신 겁니까? 이대로 포기하시면, 앞으로 백 장군님과는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잘 생각했어.”

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 언니가 그랬어. 자존감은 뼈와 같아서 한번 잃어버리면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무른 사람이 된다고 말이야.”

“소인은 너무 안타까워서 그러지요.”

소라가 격한 어조로 말했다.

“군주께서 장군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겪으셨습니까.”

그 말이 목 안으로 씁쓸하게 퍼졌다. 그래도 나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난 아직 젊으니까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맞습니다.”

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주께선 더 좋은 분을 만나실 겁니다.”

* * *

그 후 이틀간, 난 처소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백장간도 찾아오지 않았다. 소라 말로는 저택 하인들이 우리 사이를 놓고 쑥덕거린다고 했다. 종일 붙어 있어도 모자랄 신혼에, 백장간과 나는 서로 왕래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남들 눈을 의식하지 않으니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백장간의 부인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진짜 여소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 느끼는 이 고통은 정말이지 날 숨 막히게 했다.

사흘 후, 백장간의 부모가 저택을 떠났다. 난 소라에게 붓과 먹을 준비하라고 이른 뒤, 새하얀 종이에 빠르게 글씨를 써 내려갔다. 그때, 백장간이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분명 며칠간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말을 걸었다.

“무엇을 쓰고 있소?”

“이혼장이요.”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혼장이라니, 누구의 이혼장 말이오?”

“당신이요.”

그는 서둘러 앞으로 다가오더니 내가 쓰던 글을 바라보았다.

“아내를 내쫓을 수는 있어도 지아비를 내쫓을 수는 없소.”

“난 군주예요. 지아비도 얼마든지 내쫓을 수 있어요.”

“소쌍, 대체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오? 말을 해 보시오. 설령 죽는다고 해도 이유는 알고 죽어야 하는 법 아니오?”

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니라 백 장군, 당신이 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잖아요.”

“내가 무얼 마음에 안 들어 했단 말이오?”

“제 전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말이 안 되는 건 당신이에요.”

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은 후안무치, 안하무인에 비열하고 뻔뻔한 소인배라고요!”

나는 내 말재간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사자성어가 연달아 튀어나오자 소라는 날 우러러보듯 바라보았다. 백장간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오늘은 똑바로 말을 해야겠소. 안 그럼 도무지 살 수가 없을 것 같으니 말이오.”

“안 살면 그만이지요.”

내가 받아쳤다.

“방해하지 말아요. 이혼장만 다 쓰면 깔끔하게 헤어지고 각자 갈 길을 가도록 해요.”

“군주, 잊지 마시오. 황상이 정해 주신 혼인이오.”

난 도도하게 고개를 들어 대꾸했다.

“그게 뭐 어째서요? 황후 언니가 계신데 황상을 무서워해야 하나요?”

그가 내 붓을 빼앗았다.

“소쌍,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마시오. 잘 얘기해 보면 되지 않소.”

그가 힘을 주자 붓은 쉽게 내 손에서 벗어났다. 난 곧장 손에 묻은 먹물을 그의 옷에 문질러 닦았다.

“얘기할 것도 없어요. 전 이미 결정했으니까요.”

그가 결국 화를 참지 못했는지 붓을 있는 힘껏 바닥에 던졌다.

“여소쌍, 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내가 원치 않을 땐 그렇게 날 쫓아다니더니, 뜻을 이룬 후엔 대체 무슨 태도란 말이오? 날 일부러 가지고 노는 것이오? 황후 마마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나 본데, 황후는 내 여동생이기도 하오. 게다가 우린 함께 자랐소. 황후께서 누굴 더 중시하겠소?”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급기야 난 그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드디어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는군요. 당신이 나와 언니 중에 누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도 잘 알겠지요!”

“그게 무슨 소리요?”

“무슨 소린지는 본인이 잘 알 텐데요. 굳이 터놓고 말하지 않는 게 나은 것들도 있지요.”

“터놓고 말해 보시오. 난 그릇된 행동을 한 적 없으니 터놓지 못할 말 따위는 없소.”

“그래요?”

난 그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고 나지막이 내뱉었다.

“큰오라버니.”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여소쌍, 어찌… 어찌 이리 담이 크단 말이오!”

난 여전히 냉소를 짓고 있었다.

“큰오라버니라고 부른 것뿐인데 담이 크다니요. 내게 누명을 씌울 생각 말고 황상을 찾아가 시비를 가려 달라고 하죠. 황상이 어찌 말씀하실까요?”

황상을 언급하니 그는 곧장 냉정을 되찾았다.

“황후 마마처럼 날 큰오라버니라고 부르고 싶소? 당신과 황후 마마는 다르오. 우린 부부가 아니오? 세상에 어느 부인이 부군을 큰오라버니라고 부른단 말이오?”

아직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다니. 난 화가 나서 단숨에 쏘아붙였다.

“내가 부르고 싶은 게 아니라 당신이 큰오라버니라고 부르라 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사흘 전, 초야를 치를 때, 큰오라버니라고!”

백장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꼿꼿하게 서서 굳어 버렸다. 이렇게 터놓고 말한 이상,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겠지. 보아하니 그도 기억을 떠올렸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는 한참 동안 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세우고 자리를 떴다. 하지만 첫 걸음을 내딛자마자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자칫하면 넘어질 듯 휘청이던 그는 혼이 완전히 나간 듯했다. 나는 방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군주.”

소라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제 앞에서 그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셨으니, 백 장군께서 제 입을 막으려 죽이시는 게 아닐까요?”

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장군이 나를 죽이시진 않을까 걱정이야.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떠나자.”

소라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혼인 전 옛집에서 잠시 지낸 덕에 그곳엔 내 물건이 전부 구비되어 있었다. 돈이 될 만한 물건만 챙겨서 나가면 될 일이었다. 소라는 탁자 가득 물건을 늘어놓더니 내게 봐 달라고 했다. 난 물건을 훑어보고 말했다.

“백장간이 내게 준 건 남겨 놓고 다른 건 다 가져가자.”

그가 준 선물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황후 언니가 준 선물이나 황상이 내린 상만으로도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소라와 난 크고 작은 보따리를 하나씩 싼 뒤 가마를 타고 옛집 골목으로 향했다.

가마에서 내리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혼장은 백장간의 책상에 두고 왔다. 난 다시 혈혈단신이 되었고, 행복을 좇을 권리를 되찾았다. 물론 백장간이 너무 큰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저택 관리인에게 옛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전해 두었으니, 분명 백장간에게 보고했으리라. 하지만 옛집으로 온 당일에도, 며칠 뒤에도 백장간은 날 찾아오지 않았다. 이 일은 이렇게 끝나 버린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에게 시집을 갔건만. 신혼 첫날 밤 풍비박산이 나고 아직도 숫처녀라니. 이게 무슨 혼인이란 말인가!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같이 마부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을 모는 게 무언가 암시를 주는 듯했다. 소라는 그 소리에 짜증을 냈다.

“제가 가서 만나 봐야겠습니다. 다른 이들은 눈치껏 조용히 지나가는데, 어찌 저자만 소란을 피운단 말입니까. 일개 마부가 참 오만합니다.”

난 웃음을 터뜨렸다.

“오만하게 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래.”

소라는 이유가 궁금한 눈치였다.

“정말입니까? 이유가 무엇인데요, 제게도 알려 주시어요.”

“예전에 저자한테 고백을 했었거든.”

소라는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마부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주께서 정말 마부에게 고백을 하셨다고요? 그 머리도 크고…….”

“그땐 머리가 크면 똑똑한 줄 알았어.”

군주가 아닌 여소쌍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누구든 함께 지낼 사람이 필요했다. 소라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누구보다 존귀한 군주이십니다. 예전이랑은 다르지요. 한데도 어찌 저리 요란을 떤단 말입니까…….”

“한 달 전쯤에 백 장군을 압박하려고 그의 면전에서 마부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했거든. 그때 또다시 용기를 얻었나 봐.”

소라는 눈을 희번덕이며 고개를 저었다.

“군주, 백 장군님을 얻기 위해 정말 별짓을 다 하셨군요.”

나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 꼴이 되어 버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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