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9화
오후에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난 후, 소라를 데리고 호숫가에서 배를 탔다. 사실 연밥을 따고 싶었다. 뭐라도 해야 헛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라는 선미에서 노를 젓고 있는 하인을 바라보며 우물쭈물 망설였다.
지천으로 널린 연잎은 오늘따라 음침한 느낌이 들었다. 이따금 연잎 사이로 햇살이 내리쬘 때면 너무 밝은 탓에 눈을 감고 싶었다. 난 노를 젓는 하인에게 물었다.
“수영을 할 줄 아느냐?”
그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뭍까지 한숨에 갈 수도 있습니다요.”
“잘 되었구나. 하면 지금 당장 수영해서 뭍으로 나가거라.”
그는 멍한 얼굴로 날 보았다.
“군주, 소인이 가면 누가 노를 젓는단 말입니까…….”
난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나랑 소라가 노를 저을 테니 걱정 말고 그만 돌아가래도.”
난 거드름을 피우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이따금 얼굴을 굳히며 제법 위엄 있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하인은 군소리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점점 멀어지는 하인을 보며 백장간이 이 일을 알게 되진 않을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소라가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군주,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입니까? 첫날밤에 왜 홀로 후원에 돌아오신 거예요? 백 장군님과 합방은 하셨습니까? 백 장군님이 군주의 심기를 건드리신 거예요? 어째 소인이 느끼기엔 장군님을 대하는 군주의 태도가 예전과 달라 보입니다.”
난 씁쓸하게 웃었다.
“달라졌지.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 소라야, 나 참 바보 같지?”
“바보 같다니요. 군주께서는 그저 단순하신 것입니다.”
난 연밥 껍질을 까서 입에 넣었다.
“단순한 거랑 바보 같은 건 같은 뜻 아니야?”
소라는 초조했는지 계속 캐물었다.
“백 장군님께서 대체 군주를 어찌하신 겁니까?”
다시 연밥 껍질을 벗겨 소라에게도 주었다.
“네가 보기엔 백 장군이 날 좋아하는 것 같아?”
“물론이지요. 안 그럼 어찌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황상께 혼담을 꺼냈겠습니까?”
“내 어떤 면을 좋아하는 거 같은데? 외모? 집안? 재능? 아님 단아한 모습?”
소라는 말문이 막혔다. 내가 초라한 골목의 계집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계집이 무슨 재주로 황제의 처남인 우전원대장군에게 시집을 갈 수 있단 말인가! 소라는 결국 웅얼거리며 입을 열었다.
“소인 생각에 장군과 군주께서는 천천히 정을 쌓으신 것 같습니다. 장군께서는 천박한 분이 아니시니 허울이나 외적인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시겠지요.”
“천천히 정을 쌓았다고?”
난 냉소를 지었다.
“내가 귀찮게 쫓아다닌 거지, 언제 장군이 자발적으로 다가온 적 있었니?”
“사내들은 여인들이 치근덕대는 걸 무서워하니 장군께서도 백기를 든 것이고요.”
“그런 게 아니야.”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소라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근심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다. 이마저도 없다면 정말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몰랐다. 자초지종을 들은 소라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란 듯 보였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장군께서 황후 마마를 좋아한단 말씀이십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은 남매 사이인데요. 설령 친남매가 아니라 할지라도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인 것을요. 장군께서 어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내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변태라는 거지.”
소라는 내 말에 동의하며 연밥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정말 변태가 맞는 것 같습니다.”
뒤이어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고개를 숙인 채 연밥 껍질을 까며 연신 입에 넣었다. 소라는 쓴맛을 싫어해 연밥의 심을 일일이 골라냈지만, 난 반대였다. 한 알을 통째로 입에 넣고 쓴맛을 즐겼다. 그 쓴맛이 꼭 내 마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픔은 점점 더 커져만 갔고 아무리 마음을 달래려 해도 역부족이었다. 난 아예 소라가 골라낸 심까지 전부 입에 넣었다. 연밥의 심을 깨무는 순간 입안에 쓴맛이 확 퍼졌다. 숨에서마저 쓴맛이 느껴질 정도였다. 소라는 걱정스러웠는지 날 빤히 바라보았다.
“군주, 이제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선택지는 두 개야.”
난 연심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날 속이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의미 없는 삶을 살든가, 단칼에 끊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든가.”
“군주께선 어떤 선택을 하실 겁니까?”
연심을 꿀꺽 삼켰다. 절로 괴로움이 밀려왔다.
“아직 못 정했어.”
“군주께선 백 장군님께 아직 마음이 남으신 거 아닙니까?”
난 한참이 지나서야 대꾸할 수 있었다.
“장군을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 끝은 물에 비친 달이고 거울에 비친 꽃일 뿐이잖아. 모든 게 다 환상이야.”
소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빤히 바라보았다.
“좌절은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더니, 군주께서도 말투가 지적으로 변하셨습니다.”
“소라야, 내가 어찌하면 좋을까?”
소라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방법대로 하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백 장군님이 누굴 좋아하시든 군주께 잘해 주시니 그거면 된 거죠. 군주께서 모르는 척하시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실 수 있는걸요.”
난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물었다.
“만약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할 건데?”
소라는 곧장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라면 호되게 한 대 때려 주고 당장 보따리를 싸서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 못된 자식 옆에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그녀의 말이 나를 어두운 꿈에서 깨웠다. 그래, 어째서 나만 홀로 슬퍼하고 불쌍해져야 한단 말인가. 백장간이야말로 황후 언니의 대체품 따위는 구경도 못 하게 해야지! 내가 소라에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
뭍에 다다르니 뜻밖에도 백장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급히 손을 뻗었다.
“군주, 배를 타는데 어찌 날 부르지 않았습니까?”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아니면 감히 내게 손을 뻗으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백장간과 내가 호숫가에서 멀어지자, 하인들은 멀리서 쫓아왔다. 아마도 눈짓을 주고받으며 우리의 신혼을 방해하지 않으려 할 테지. 힐끗 보니 유일하게 소라만 근심에 잠긴 얼굴이었다.
사실 백장간을 어찌 대해야 할지 조금 막막했다. 그는 평소처럼 새하얀 장포를 입고 고상한 자태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모든 게 다르게 보였다. 내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이겠지. 마침내, 그는 내가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군주, 기분이 조금 좋지 않아 보이는군요.”
나는 속으로 차디찬 웃음을 흘렸다. 조금 좋지 않아 보인다고? 난 지금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아뇨.”
내가 말했다.
“조금 피곤한 것 같아요.”
“노를 저어 피곤한 것입니까?”
그가 물었다.
“한데 어찌 노를 젓던 하인을 돌려보냈습니까?”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내 마음속에 들어오려는 것처럼 날 빤히 바라보았다. 난 너른 소매 밑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지금껏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이젠 내 속마음까지 넘겨짚으려 하다니! 그와 더는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분을 참지 못해 그에게 손찌검을 할지도 몰랐다.
“백 장군,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가 날 붙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날 뭐라 불렀습니까?”
“백 장군이요.”
“너무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가 우리 사이를 상기시켰다.
“우린 이제 혼인을 한 사이인 것을요.”
“그게 뭐 어쨌다고요?”
내가 말했다.
“장군도 아직 절 군주라고 부르시잖아요.”
“좋아요. 앞으로는 군주가 아니라…….”
그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소쌍이라고 부르겠소.”
“아뇨.”
난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냥 계속 군주라고 불러주세요. 규율에 어긋나지 않도록요.”
그가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뗐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조금 이상하더니… 내가 어제 술에 취한 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오?”
그 말은 꺼내지 말지. 난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몇 발짝 가지 못해 그에게 붙잡혔다. 그가 날 품에 끌어안더니 조용히 타일렀다.
“소쌍, 미안하오. 술을 그리 많이 마셔선 안 되었는데. 당신이 날 오래 기다렸다는 말은 소라에게 들었소. 정말… 미안하오.”
그의 품에 안기니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꾹꾹 눌러 담았던 숨이 갑작스레 탁 풀리고 말았다. 난 정말 그의 품이, 그의 숨결이 좋았다. 그의 품에 있으면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그는 날 안고 나무 밑에 앉더니 한참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별안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날 또 황후 언니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얼른 그를 밀쳐 냈다.
“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남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우린 이미 부부인 것을, 뭐가 그리 두렵소.”
부부? 난 잠시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금세 다시 힘이 풀렸다.
“부모님은 언제 돌아가세요?”
그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부모님이 이곳에 있는 게 싫소?”
“아뇨.”
그저 이 일에 너무 많은 이들이 끼어드는 게 싫을 뿐이었다.
“황상께서 사흘을 주셨소.”
백장간이 말했다.
“모레 아침, 부모님을 모셔다드릴 사람이 올 것이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도성에 오셨으니 따로 계획한 일정이 있으시겠지요. 제가 곁에 있어 드리지 않아도…….”
“그럴 필요 없소.”
그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아직 낯설 테니 신경 쓸 것 없소. 오늘은 함께 저녁을 먹고, 내일은 아마 내 여동생 집으로 가실 것이오.”
잘된 일이다. 그들이 떠나면 백장간과의 일을 해결할 수 있을 테니.
사흘간 계속 백장간을 피해 다닐 생각이었다. 밤이 되자 나는 방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인들을 시켜 나를 찾더니 후원 처소에 있다는 걸 알았는지 곧장 찾아왔다.
막 목욕을 마치고 침대에 누운 참이었다. 방 안에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까지 피워 두었다. 침대의 장막을 내려 주던 소라가 갑작스레 놀라 소리쳤다.
“장군님.”
난 황급히 이불 밑으로 숨었다. 자는 척할 작정이었다. 백장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주는 잠이 들었느냐?”
소라가 말했다.
“아니요, 방금 누우셨습니다.”
“…….”
똑똑한 소라가 지금은 어찌 이리 바보 같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