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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48)화 (647/1,192)

제648화

절을 마친 뒤, 난 뒤뜰 곁채로 자리를 옮겨 그가 면사포를 넘기고 합환주를 마시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니 머리가 너무 무거웠다. 소라는 몇 번이나 봉관과 덧옷을 벗겨 주겠다고 했지만, 난 한사코 거절했다. 오늘만큼은 조금도 규율에 어긋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난 꾸벅꾸벅 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누군가 찾아와 백장간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졌다고 전했다.

백장간이 술에 잔뜩 취했다는 소식은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어쨌든 오늘은 경사가 있는 날이니 그도 기뻐서 그랬을 테지. 다만 상상으로 그리던 면사포를 넘기는 일이나 합환주를 마시는 것, 서로 껴안은 채 땅콩과 용안이 가득 널브러진 침대를 구르는 장면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린 듯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인생이 어디 있다고. 황후 언니도 혼삿날 신방에서 화촉을 밝히지 못했다지만 지금은 모두의 부러움을 살 만큼 행복하게 지내고 있지 않은가?

난 하인을 불러 백장간을 데려오라고 분부했다. 땅바닥에서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신혼 첫날밤이니 합방을 하진 못하더라도 한 침대에서 자야 했다.

그리곤 소라에게 봉관과 두꺼운 예복을 벗기라고 분부했다. 옷을 벗은 뒤 목욕을 하고 오자 하인이 백장간을 데려왔다. 난 다른 이들을 전부 물리고 물을 떠서 그의 얼굴을 닦아 준 뒤, 힘겹게 옷도 갈아입혔다.

그의 옷을 벗길 땐 차마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생각해 보니 우린 부부인데 보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결국 난 얼굴을 붉힌 채 대범하게 그의 몸을 바라보았고 손으로 쓸어내리기도 했다.

마침내 백장간과 나란히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그의 손을 내 허리에 올려 두었다. 그의 숨이 머리에 닿으니 짙은 술 냄새가 훅 풍겨왔다.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그래도 술에 취하니 제법 온순했다.

난 내 지아비를 껴안고 두 눈을 감았다. 난생처음 남자와 동침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내가 늘 꿈에 그리던 사람과 말이다. 어찌나 감격스러운지, 한참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의 손을 쓰다듬다가 얼굴을 살짝 만지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아직 붉은 초가 켜져 있어 장막 안은 온통 붉은 빛이었다. 은은한 불빛 속에서 백장간의 얼굴은 유난히도 보드라운 굴곡을 그렸다. 손을 뻗어 그의 눈썹을 만져 보았다.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눈썹, 코, 다음은 입술, 그다음은 턱. 그렇게 조금씩 그의 윤곽을 그려냈다.

정말 아름다운 남자였다. 어찌 이리 잘생겼을까? 난 조심스레 다가가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의 매끈한 얼굴을 할짝이니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이번엔 더 용기를 내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은 부드럽고 달콤했다. 동굴에서 입을 맞춰 본 적이 있으니, 이미 그 맛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난 더더욱 그의 입술을 열망했다. 그때의 그 아찔했던 느낌을 다시 한번 느껴 보고 싶었다.

마침내 난 입맞춤으로 그를 깨울 수 있었다. 그는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몸을 틀어 날 짓눌렀다. 술이 깨지 않아 힘 조절을 잘 못 하는 탓에 숨이 턱 막혀 왔다. 그에게 눌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난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이러다 깔려 죽겠어요. 내가 위로 갈게요.”

그는 내 말을 듣고는 다시 몸을 돌려 날 올려놓았다. 등을 쓸어내리는 뜨거운 손길이 느껴졌다. 흥분과 기쁨이 동시에 밀려왔다. 합방은 힘들 줄 알았더니 이렇게 기회가 와 주었다.

난생처음 겪는 일인 만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역시 조금은 당황했는지 날 안은 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가늘게 뜬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흐릿한 빛을 띠었다.

그는 술이 반쯤 깬 듯했고 난 꿈에서 반쯤 깬 것 같았다. 우린 끊임없이 입을 맞추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난 불처럼 열정적으로 응했고, 백장간은 견디기 어려운 듯 연신 신음을 내었다.

“나를, 나를 큰오라버니라고 불러 다오…….”

“…….”

“날 큰오라버니라고 불러 줘…….”

나는 정수리에 일침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끓어오르던 피에 누군가 얼음물을 끼얹은 것만 같았다. 그를 큰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천하의 어머니, 황후 언니! 천천히 그의 위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내 허리와 목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저리 안 꺼져! 주먹을 휘둘러 그의 이마를 때리니 그가 악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 틈을 타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왔다.

오늘은 나와 백장간의 초야이기 때문에 당직을 서는 이도 없었다.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가니 역시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밤이 깊었지만 경사가 있는 날인 만큼 곳곳에 걸린 붉은 등불이 두드러졌다. 화려한 등불 밑을 걸었지만 가슴에선 불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왜 그가 황후 언니에게 갈 때마다 황제가 곧장 뒤따라왔는지. 그가 황후 언니와 대화할 때마다 언니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도. 왜 날 그리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애정 어린 말투로 말을 걸어 주었는지도. 왜 이따금 내게 이상한 말을 건넸는지도. 모든 의혹이 이제야 다 풀린 것이다!

그는 황후 언니를 좋아했다. 난 황후 언니를 대신할 대체품이고! 어쩐지 내 평범한 외모나 미천한 출신에도 크게 개의치 않더니… 다 언니 때문이었다. 나를 언니 대용품으로 쓰려고! 치가 떨릴 만큼 화가 났다.

하지만 황후 언니를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언니는 백장간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을 터였다. 언니의 마음속엔 오직 황제뿐이니까. 난 오직 백장간만 미워할 수 있었다. 이 엄청난 사기꾼이 증오스러웠다. 따뜻한 눈빛과 애정 어린 말투로 날 홀린 그의 술수가 죽도록 미웠다.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호숫가를 지날 땐 당장이라도 물에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황후 언니는 늘 내게 죽는 건 쉬워도 사는 건 어렵다고, 삶엔 희망이 있으니 언제나 희망을 버려선 안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난 물에 뛰어드는 대신 예전부터 머물던 처소로 돌아왔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침대에 누워 있으니 슬픔도 어느새 졸음에 지워져 갔다.

이튿날 아침, 난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떠 보니 익숙한 풍경에 익숙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침대 옆에 누군가 앉아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백장간은 내게 이렇게 일찍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어리둥절해하는데 창밖에서 소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군주를 찾았으니 그만 돌아들 가.”

그제야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에 내가 사라진 걸 알고 사방팔방으로 찾아다니다 이곳에서 날 찾아냈을 테지. 예전엔 백장간의 그윽한 눈빛에 취하곤 했지만, 지금은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난 눈을 감고 그를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허리를 숙이고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왜요, 일어나기 싫은 것입니까?”

그가 술에 취해 날 황후 언니로 여긴 것까진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술이 깬 지금도 날 현혹하려 하다니, 하! 세상에 이리 위선적인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군주, 잊었나 본데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저택에 계십니다. 문안을 드리러 가야 해요.”

혼례 때, 황제는 그의 부모를 데려와 우리 두 사람의 절을 받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가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으니까. 결국 난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어젯밤 많이 피곤했지요?”

그는 나지막이 물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자고 싶으면 그리하세요. 부모님은 점심을 먹을 때 뵈면 되니까요.”

그의 말끝마다 걱정과 배려가 묻어났다. 그럴수록 그의 모든 감정이 위선 같았고, 내 가슴을 사정없이 베어 내는 것만 같았다. 난 가만히 등을 돌리고 그에게 무관심한 모습만 보여 주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것인지 아님 내가 이상하게 군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이불을 잘 여며 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 * *

난 결국 백장간의 부모를 만나러 갔다. 그의 아버지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이름은 백여름이고 예전 황조의 승상이었다. 당시 그의 영예가 극에 달했을 만큼 존귀한 존재였다.

딸 하나는 선황의 귀비였고, 다른 딸은 초왕의 적비였다. 세상에서 가장 권력이 막강한 두 남자가 모두 그의 사위였다. 훗날 황제가 죽고 초왕이 즉위하여 그의 딸은 황후가 되었다. 응당 국구가 되어야 할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황후 언니의 친부가 아니었다. 초왕과 원한도 깊어, 즉위하자마자 백씨 집안 사람들은 유배를 떠나야 했다.

내 눈엔 참으로 모순되는 일이었다. 백씨 집안 사람들은 유배를 떠났지만 아들과 딸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영예로운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난 한참을 고민한 끝에 이 모든 게 황후 언니와 관련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황후 언니에게 잘해 주는 사람은 황제가 눈여겨보았고, 황후 언니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았다. 백장간은 백씨 집안에서 언니에게 잘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황후 언니를 좋아했을지도.

난 짝사랑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짝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이 두껍게 쌓인다. 그 감정은 뼛속까지 깊게 스며들다가 헤어날 수 없는 미련으로 변하는 법이었다.

백장간의 어머니는 첩이었지만 첫째 부인이 죽은 뒤 정실이 되었다. 황제는 당시 백장간과의 사이를 고려해 그녀도 도성에 남을 수 있게 해 주었지만, 그녀는 끝끝내 지아비를 따라 유배를 떠났고 한다. 백여름은 그 마음에 감동해 그녀를 정실로 받아들였다고.

그녀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고 내게도 예를 갖췄다. 이야기를 할 때도 늘 시선을 내리깔고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난 그들에게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신분은 내가 더 높았다. 그들도 날 어찌 불러야 할지 고민하는 듯하더니, 예를 갖춰 군주라고 불러주었다. 그러나 백장간이 날 자꾸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예절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난 그와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곤 식사를 마친 뒤 곧바로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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