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647)화 (646/1,192)

제647화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나 때문에 화난 걸 아니까요.”

난 계속 캐물었다.

“왜 장군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데요?”

“왜냐면.”

그가 내 손을 움켜쥐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요. 며칠 동안 계속 반성했습니다. 군주께 사과…….”

난 다른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황급히 말했다.

“사과하지 말아요. 장군은 이미 제게 아주 잘해 주는걸요.”

난 조금 전 일을 그에게 전부 말해 주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감히 군주를 함정에 빠뜨리다니. 다리를 부러뜨려 놓을까요?”

나는 그의 농담에 몸을 휘청거리며 웃다가 슬쩍 그의 품에 기댔다.

“아니요. 일을 더 크게 만들지 마세요. 다시는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군주 말대로 하지요.”

그가 내 어깨를 감쌌다.

“며칠간 군주를 아프게 했습니다.”

“알았으니 되었어요.”

난 눈을 흘기며 그를 나무랐다.

“앞으로는 제게 더 잘하세요.”

“물론이지요.”

그가 내 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평생 잘할 겁니다.”

내 가슴에만 봄이 온 듯했다. 찬란한 봄꽃이 한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난 그저 눈망울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게 입을 맞춘다면 더없이 완벽한 순간일 텐데. 하지만 그는 내 암시를 느끼지 못한 듯했다.

“어찌 그리 대담하게 승낙할 수 있습니까? 내가 졌으면 어찌하려고요?”

“황후 언니가 혼삿날 말을 바꾸더라도 제가 원하는 사람이랑 혼인할 수 있게 해 준댔거든요.”

백장간이 웃음을 터뜨렸다.

“황후다운 생각이네요.”

그의 웃음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그는 어두운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이따금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서늘한 걱정이 일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그만 돌아가요.”

그는 짧게 대꾸하고는 내 손을 잡고 되돌아갔다. 숲을 나오니 평지에는 이미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많은 이들이 떠들썩하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아마 오늘 있었던 사냥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모닥불 쪽으로 다가가자 황후 언니가 우리를 맞이했다. 언니는 백장간의 얼굴을 바라보며 별 탈 없는 걸 확인하고는 내게 시선을 옮겼다.

“소쌍아, 언니랑 얘기 좀 해.”

난 황후 언니가 할 말을 알고 있었다. 긴 해명을 하고 싶지 않았던 터라 그와 맞잡은 손을 보여 주었다.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 백 장군께 시집갈 거예요.”

언니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두 사람은 내 가족이야.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난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야.”

나도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하지만, 백장간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 * *

혼사는 초여름으로 정해졌다. 백 장군의 저택 호수에는 연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보러 갈 순 없었다. 나는 구설을 피하기 위해 옛집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니까.

이사를 온 뒤로 마을 골목은 예전의 지저분하던 모습을 벗어났고, 늘 누군가 깨끗이 쓸어 놓았다.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 보기 어려웠고 고양이나 개도 얼씬거리는 일이 없었다. 예전엔 늘 이웃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지금은 다들 조용히 얘기했다.

한번은 밤에 이웃집 부부가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훔쳐 들으려고 했지만, 어찌나 목소리를 죽이고 싸우는지 한 글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장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었고 사나흘마다 인사를 왔다. 그의 조상들에게도 이렇게까지 정성을 다하진 않을 기세였다. 어느 날 그는 우리 집 입구에 빨간 양탄자를 깔아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럼 더 존귀해 보일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마을 골목은 백 장군의 저택 후원보다 더 적막해서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난 그에게 굳이 무얼 할 필요 없다고 말하며 예전의 정겨운 풍경이 그립다고 말했다.

그 후로 강아지가 짖거나 닭이 우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낮에는 이웃 주민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밤에는 종종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제야 예전으로 돌아온 듯해, 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난 괜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되도록 외출을 삼갔다. 이웃 주민들은 전부 우리 집 문의 동태를 신경 썼다. 문이 한 번 열릴 때마다 다들 목을 쭉 빼고 기웃거리며 다격군주의 모습을 보려 했다.

백장간도 거의 이곳을 찾지 않았다. 그 또한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이따금 시간을 내어 날 찾아왔다.

그날, 그는 하얀색 장포를 입고 말을 몰며 늠름한 자태로 이곳을 찾았다. 그에게서 우아하면서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개가 느껴졌다. 그가 나타나니 곧장 수많은 인파가 뒤따랐다. 다들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끊임없이 골목으로 밀려들었다.

그는 부끄러웠는지 말에서 내려 도망치듯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난 계단 아래에 서서 수줍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게 장난감 하나를 건넸다. 통통한 오뚝이였다. 참으로 뜻밖인 선물이었다.

“어째서 이걸 주는 거예요?”

혼인을 앞둔 여인에게 주는 선물은 보통 머리 장신구나 옥 팔찌 따위가 아니던가?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런 장난감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래, 날 어린아이로 여긴다 이거지. 하지만 이 느낌도 나쁘지 않았던 난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원에 새로 지은 집은 옛집과 똑같이 복원했다. 물론 예전부터 있던 물건은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찾아 모은 것들이었다. 난 벽에 걸린 그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저희 아버지 거예요. 저희 아버지는 도성에 오기 전에 물고기를 잡으셨거든요. 우리 마을에서 아버지보다 물고기를 잘 잡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어요. 그물을 쳤다 하면 늘 물고기들이 퍼덕였죠.”

이번엔 신발 밑창을 박는 송곳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이건 저희 어머니가 쓰시던 거예요. 제게 밑창 박는 법을 알려 주셨지요. 그래도 제게 신발 만드는 법을 알려 주고 떠나셔서 겨우 먹고살 수 있었어요.”

그는 진지한 얼굴로 송곳을 바라보더니 갑작스레 날 껴안았다.

“다 내 잘못이에요. 그대를 힘들게 했습니다.”

난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땐 그를 알지도 못했는데. 하지만 그의 포옹에 기분이 좋았던 터라, 다른 생각은 접어 두기로 했다. 지금은 이렇게 그의 품을 즐기는 게 좋았다.

이대로 그가 입을 맞추길 바랐다. 그와 입을 맞추면 벼락을 맞은 듯 짜릿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나를 꼭 안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말 성인군자가 따로 없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그날 밤, 밤새 오뚝이를 가지고 노는 나를 보며 소라가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백 장군님도 참, 너무 쩨쩨하십니다. 머리 장신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연지나 분첩 같은 것을 선물해 주셔야지, 어찌 군주께 이런 걸 주신단 말입니까?”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선물보단 마음이 중요한 거지. 넌 그것도 모르니?”

소라는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드디어 혼삿날이 밝았다. 나는 좀처럼 잠들지 못해 밤새 몸을 뒤척였다. 너무 감격한 탓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 밑이 퀭했다. 신부가 이리 예쁘지 않아서야 어찌한단 말인가?

다행히 기홍과 녹하가 치장을 도와주러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예쁜 얼굴만큼이나 치장도 잘했다. 한 사람은 머리를 단장해 주고 한 사람은 화장을 해 주었다. 난 줄곧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지켜보았다. 역시나 화장을 하다 보니 어여쁜 미인으로 변해 갔다. 다만 화장을 지운 내 모습에 백장간이 실망하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백장간은 커다란 말을 타고 날 맞이하러 왔다. 오늘은 늘 입던 하얀색 장포 대신 붉은색 예복을 입고 있었다. 관모에 꽂은 붉은 꽃 한 송이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는 모습보단 조금 답답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긴장한 탓일까?

하지만 날 발견한 그의 눈은 곧장 반짝였고 입가엔 옅은 미소가 흘렀다. 그가 웃으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곧 그는 내 얼굴을 보며 넋을 놓은 듯했다. 소라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군주, 장군께서 아무래도 군주께 홀리셨나 봅니다.”

“앞으로 늘 이렇게 화장해 줘.”

“이건 신부 화장이라고요. 평소에도 이렇게 하면 너무 화려하지 않겠어요?”

“뭐 어때. 장군에게만 보일 건데. 다른 사람이 보는 것도 아니고.”

“아, 그럼 괜찮겠네요.”

백장간은 다른 이들에게 이끌려 자리를 옮겼고, 나도 붉은 면사포를 쓰고 가마에 올랐다. 가마는 흔들거리며 앞으로 향했다. 골목에서 누군가 폭죽을 터뜨렸다. 사람들의 환호도 들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거리를 가득 메웠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난 너른 소맷자락 밑으로 두 손을 꽉 붙잡았다. 바짝 긴장이 되었다. 드디어 시집을 가는구나.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분명 나도 황후 언니처럼 행복한 삶을 살겠지.

너무 감격스러웠다. 봄 사냥을 떠날 땐 분명 커다란 놈을 잡아 오겠노라고 결심했는데 어쩌다 보니 멋있는 신랑을 얻어 왔다.

우전원대장군과 다격군주는 둘 다 황후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만큼 황제도 체면을 살려 주고자 축하주를 마시러 찾아왔다. 황제가 혼례에 참석하는데 어느 문무백관이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형도 두 승상의 강압에 못 이겼는지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보였다.

복잡한 과정을 거친 뒤, 난 마침내 본채로 이동해 백장간과 절을 올렸다. 첫 번째 절은 하늘에, 두 번째 절은 부모님께, 마지막 세 번째 절은 부부간의 맞절이었다. 허리를 숙일 때마다 그와 함께 잡고 있던 붉은 비단이 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가 나보다 더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듯했다.

허리를 깊게 숙일수록 더 경건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아 나도 많이 숙이려고 애썼다. 결국 머리에 쓰고 있던 붉은 면사포가 떨어졌다. 당황해 고개를 드니 백장간의 얼굴이 두 눈에 담겼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긴 했지만 두 눈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깨진 그릇처럼, 무엇도 담지 못하는 눈동자였다.

난 흠칫 놀라 그의 안색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시녀가 면사포를 다시 씌워 주는 바람에 더는 그를 관찰할 수 없었다. 분명 내가 잘못 본 것이리라. 오늘은 우리 두 사람의 경사인데, 어찌 저리 무심할 수 있단 말인가? 말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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