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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46)화 (645/1,192)

제646화

이튿날 아침의 분위기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황제는 두 용사에게 직접 술을 따라 권했다. 황후 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백 장군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다리는 다 나은 것이어요?”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황후 언니에게 말했다.

“잠시 기다리시면 제가 아주 큰 놈으로 잡아 오겠습니다.”

옆에 서 있던 난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게 해야 할 말이 아니던가? 호각이 울리자마자 하얀 말 한 필과 검은 말 한 필이 숲을 향해 내달렸다. 숲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친위병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황후 언니가 친히 내 방을 찾아와 물었다.

“소쌍아, 한번 얘기해 봐. 백 장군이랑 두 공자 중에 누가 마음에 드니?”

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넌 내 여동생이야. 오늘 승부가 어찌 되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거야.”

내가 물었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지면 어찌하실 거예요?”

“황상께 말씀드리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해 주실 거야.”

이 말을 듣자마자 언니가 황제에게 악역을 시킬 생각임을 알아차렸다. 정말 교활한 황후 언니였다! 난 내기를 걸고 싶었다.

“언니, 전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아요. 두 사람 중 이기는 자에게 시집을 가겠어요.”

“정말?”

“네, 정말로요.”

“그래. 그럼 언니도 네 말대로 할게.”

황후 언니가 말했다.

“혼인을 약속하더라도 혼삿날까진 시간이 있을 테니 잘 고민해 봐. 설령 혼사 당일에 마음이 바뀐다고 해도, 이 언니가 도와줄 테니까.”

“언니는 정말 따뜻한 사람이에요.”

황후 언니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옛날에 영 대인이 혼삿날 신부를 데리고 도망쳤다는데, 난 그때 자리에 없어서 늘 아쉬웠거든.”

“…….”

그래서 내 혼삿날 그걸 해 볼 생각인 걸까. 황후 언니가 이렇게까지 자유분방한 여인이라는 걸 황상은 알고 있을까?

황후 언니가 돌아간 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다들 한데 모여 내기를 거는 모습을 발견했다. 순간 기분이 들뜬 나머지 나도 두형이 이긴다는 데 돈을 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처럼 두형에게 돈을 걸었다. 설령 그가 사냥에서 진다고 해도 내가 백장간과는 혼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쨌든 나이를 따졌을 땐 두형과 더 잘 어울렸으니까.

한 바퀴 돌고 난 뒤, 난 소라에게 백장간에게 백 냥을 걸라고 했다. 지위가 낮은 소라가 어디에 걸든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을 게 분명했다.

세 시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태양이 산봉우리를 넘어갈 무렵, 두형이 숲을 나왔다. 뒤에는 거대한 크기의 짐승이 실려 있었다. 밖으로 튀어나온 기다란 이빨을 보니 절로 오싹해질 정도였다.

두형의 옷은 피로 물들었고 팔에도 큰 상처가 나 있었다. 다만 그의 자태만큼은 꼿꼿하고 씩씩했다.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용맹한 얼굴에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다들 박수를 보냈다. 황제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도 미소를 보였지만 사실 걱정이 태산이었다. 세 시진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만약 해가 질 때까지 숲을 나오지 않는다면 그 또한 백장간의 패배였다.

많은 이들이 두형에게 돈을 걸었기 때문에 모두 웃음꽃을 피웠다. 다들 두형을 용사라고 치켜세우며 그가 승리한 것처럼 행동했다. 하늘에 점점 어둠이 퍼져갔지만 백장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후 언니가 초조해하며 말했다.

“황상, 안으로 들어가서 장군을 데리고 나오는 게 좋겠어요. 만약 오라버니가…….”

황제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좀 더 기다리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둠 속에서 하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난 졸였던 가슴을 겨우 내려놓았다. 나도 황후 언니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가 패배하더라도 무사히 돌아오는 게 나았다. 소라가 내 소매를 붙잡지 않았다면, 달려 나가 그를 꼭 끌어안았을지도 몰랐다.

그가 정갈한 옷차림으로 숲을 달려 나오니 다들 의아해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사람만 돌아오면 될 일이었다. 다른 것들은 전부 의미 없는 것이니까. 두형은 입꼬리를 올리며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백장간이 황제 앞으로 다가가 예를 갖추었다.

“신, 사명을 완수하여 흑곰을 잡아 왔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다들 깜짝 놀란 얼굴로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말이 곰을 싣고 숲속을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곰이 너무 무거워서 말이 속도를 내지 못하니 백장간이 먼저 나온 것이었다. 황제는 놀랍지 않다는 듯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역시 천하무적이군. 군신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군주, 어제 한 약조를 지킬 수 있겠는가?”

난 백장간을 바라보며 감격스러운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한번 내뱉은 말은 책임을 져야지요. 당연히 지킬 것입니다.”

“좋다!”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짐이 칙서를 내리노니, 백 장군과 군주는 좋은 날을 택해 혼사를 치르도록 한다!”

다들 환호를 내질렀고, 난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축복을 받았다. 백장간도 얼굴이 붉어지긴 마찬가지였다. 곰을 잡았는데도 그의 하얀색 장포는 핏방울 하나 없이 깨끗했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그의 모습에서 비범한 기개가 느껴졌다.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소라였다. 내기에서 이겼으니 얼마나 많은 돈을 얻겠는가!

* * *

혼약을 했지만 나와 백장간은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멀리서부터 서로를 피해 다녔다. 남들의 구설에 오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냥에 흥미를 잃은 나는 매일 소라와 방에 머물면서 혼수에 대해 논의했다.

한창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두씨 아가씨가 들어왔다. 황상이 나와 백장간의 혼사를 정해 준 이후, 두씨 남매는 태연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난 그들이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두씨 집안이 원하던 두 혼사가 나란히 성사되지 못했으니 절망스럽지 않겠는가! 두씨 아가씨가 내게 예를 갖췄다.

“군주, 감축 드립니다.”

나는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고맙습니다. 이리 와 앉으세요.”

두씨 아가씨는 의자에 앉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군주를 올케언니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저희 오라버니는 그런 복이 없나 봅니다. 오라버니가 군주를 흠모했다는 거 알고 계시지요. 이 일로 충격을 받았는지 어젯밤엔 홀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더군요. 오늘도 방에 찾아가 보고 왔는데, 술이 깨긴 했지만 여전히 우울해하던 걸요. 사는 게 재미가 없으니 중이 되고 싶다고 할 정도였어요.”

조금 우스웠다. 어째서 감정적으로 충격을 받으면 다들 자포자기하는 걸까? 얼마 전 나도 비구니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가 스님이 되겠다고 하다니.

“정말 그런 길을 택할까 봐 걱정입니다. 부친께서 오라버니와 저에게 많은 걸 바라시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실 뿐인데. 오라버니가…….”

그녀는 탄식을 내뱉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오라버니가 좀처럼 나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마음이 여린 나는 두형을 지켜만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 조급해하지 말아요. 내 도움이 필요하면 뭐든 말만 해요.”

두씨 아가씨는 갑자기 내게 무릎을 꿇었다.

“군주, 부디 제 오라버니를 만나 잘 타일러 주시어요. 군주의 말씀이라면 오라버니가 귀담아 들을지도 모릅니다.”

애당초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내게도 책임이 있었다. 우린 다 함께 두형의 방으로 향했다. 두씨 아가씨는 소라에게 문 앞에서 기다려 줄 것을 요구했다. 사람이 많으면 두형의 체면이 깎인다는 게 이유였다. 두형은 자존심이 센 사내였기 때문이다.

결국 홀로 그의 방에 들어갔다. 그는 의자에 기대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눈을 반짝이더니 탁자를 짚고 일어났다.

“군주.”

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앉으세요.”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술잔 하나를 채웠다.

“제가 한 잔 줄게요. 훌훌 털고 일어날 두 공자를 위하여!”

두형은 술잔을 손에 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손을 뻗어 그의 술잔 밑을 받쳐 주었다.

“마셔요.”

그는 내 손을 잡더니 갑작스레 나를 품에 안았다. 내가 발버둥 치자 그가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너무 괴로우니 잠시만, 잠시만 안아 주십시오. 곧 나아질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슬픔이 가득했다. 벼랑 끝에 다다른 듯한 목소리에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내가 그의 등을 몇 차례 토닥이며 위로했다.

“깊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두어요. 인연이라는 건 강요한다고 이어지는 게…….”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백장간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안색은 솥의 바닥만큼이나 어두웠다. 뒤에는 황제와 황후가 서 있었다. 또 그 뒤에는 우르르 몰려온 사람들까지……. 난 천천히 손을 놓고 문밖을 바라보았다. 두형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상황을 해명하려 했다.

“백 장군,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린 그저…….”

‘우리’라면서 오해를 하지 말라니. 그저 함께 껴안고 온기를 나누려 했단 말인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각기 다른 표정이 보였다. 유일하게 황제만이 동요가 없었다. 그는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찌 설명해야 할까.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두씨 남매의 계략임을. 다들 내가 황제가 정해 준 혼사도 무시한 채 두형과 밀회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할 테지. 황제의 말은 한 번 뱉으면 바꿀 수 없는 게 원칙이었지만, 황후 언니도 다른 이들처럼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말을 바꾸게 할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백장간만은 달랐다. 그의 태도만이 나를 심판할 수 있었으니까. 난 마음을 졸이며 최후의 결과를 기다렸다. 뜻밖에서도 그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 내 손을 잡고 분쟁의 소굴에서 벗어났다.

그는 날 데리고 숲으로 향했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넘어가 숲에는 서늘한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잠시, 그가 나를 들짐승의 먹이로 주려는 건 아닐까 싶었다. 혼사를 치르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바람을 피운 것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숲속을 거닐던 그는 기괴하게 생긴 나무 옆에서 멈춰 섰다. 다른 나무는 곧게 자라는데 이 나무는 가로로 자랐다. 덕분에 함께 나뭇가지에 걸터앉을 수 있었다.

“날 화나게 하려고 이리 한 겁니까?”

그의 말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는 내가 두형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믿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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