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5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백장간만 빤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고개를 든 그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좀처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점을 만회한 듯 통쾌함이 느껴졌다. 흥, 책임지기 싫으면 그리하라지. 나와 혼인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렇게 널리고 널렸는데, 누가 아쉬워할 줄 알고?
식사를 마친 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소라가 물었다.
“군주, 만약 내일 두 공자께서 또 일등을 하시면 어쩌십니까? 정말 그분께 시집을 가실 겁니까?”
난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일등은 못 할 거야. 내가 줄곧 두 공자만 쫓아다닐 생각이거든. 아무것도 잡지 못하게 방해할 거야.”
소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이 있으셨던 거군요. 괜히 걱정했습니다.”
잠시 뒤, 소라는 다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두 공자는 그렇다 쳐도, 백 장군님은…….”
백장간은 내 약점이나 다름없었다. 난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내키는 대로 하라고 해. 나도 강요할 생각은 없어. 임안성의 옛집으로 이사하면 되는 거고. 너도 함께 갈 거야?”
“물론이지요. 살아서도 죽어서도 군주 곁에 있을 것이니 당연히 함께 가야지요.”
“장군의 저택만큼 좋진 않을 거야. 더 고생스러울 테고.”
“괜찮습니다. 군주께서 고생하셔야 한다면 저도 당연히 할 것입니다.”
종일 가슴이 답답했던 내게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어쨌든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은 나와 함께 있으려 하지 않는가!
* * *
이튿날, 난 몰래 두형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그가 활을 들면 크게 기침을 해서 사냥감이 도망치게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몇 차례 하다 보니 그는 금방 날 발견했다. 뜻밖에도, 그는 책망은커녕 함께 사냥을 하자고 청했다. 결국 나는 태연하게 그와 동행했다. 그는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나는 무성의하게 대꾸했지만, 남들 눈엔 제법 친근하게 보였을 것이다.
얼마 뒤, 멀지 않은 곳에 백장간의 모습이 보였다. 사냥을 시작할 때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터였다. 아직 다리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말에 올라타다니 대체 무얼 하려는 것인가?
두형도 그를 발견하고는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백장간은 고삐를 당겨 방향을 돌렸다. 머쓱해졌는지, 두형이 손을 내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난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개의치 마세요. 장군은 사냥감이 놀라 도망칠까 봐 큰소리를 내지 않았을 거예요.”
두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가 다 낫지 않았을 텐데 사냥을 하러 오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백장간에 대한 말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멀지 않은 나무에 커다란 새가 앉아 있었다. 난 조용히 말을 건넸다.
“저기요, 새가 있어요.”
두형은 눈 깜짝할 사이에 활을 쏘았고 새는 그대로 나무에서 떨어졌다. 난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작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역시, 두형은 숨은 고수였다.
사냥감이 나타날 때마다 난 계속 기침을 하고 활을 먼저 쏘는 등 최대한 방해를 했지만, 두형의 수확은 적지 않았다. 말에 실리는 사냥감이 늘어날 때마다 점점 불안했다. 설마 또 일등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정말 이자한테 시집을 가야 하는 걸까? 쓸데없는 내기를 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날 정도였다. 내 마음과는 다르게 두형은 점점 목적을 달성해 가고 있었다.
행궁으로 돌아와 대충 살펴보니 두형보다 많이 잡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가 대인이 서책을 들고 수확물을 적기 시작했다. 주변을 서성이던 나는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슴 한 마리, 노루 한 마리, 참새 여덟 마리…….”
“여덟 마리라니요.”
내가 끼어들었다.
“가 대인, 눈이 침침하신 거 아니에요? 여섯 마리잖아요.”
난 손을 뒤로 숨긴 채 말했다. 손에는 참새 두 마리를 들고 있었다. 가동이 다시 한번 살펴보더니 당황해하며 말했다.
“분명 여덟 마리였는데, 설마 두 마리가 날아간 것은 아니겠지요?”
내가 말했다.
“날아갔다면 죽은 게 아니니 세지 말아야지요.”
가동은 내 말에 동의하며 다시 적기 시작했다.
“참새 여섯 마리, 산토끼 세…….”
그가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엥, 한 마리가 어디 갔지? 그렇군. 산토끼 두 마리.”
난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정말 예리한 눈을 가지셨습니다.”
그도 웃으며 말했다.
“군주, 어서 가시지요. 더 줄어들면 곤란하니까요.”
난 얼굴을 붉혔다. 다들 가 대인을 바보라 하지만 사실 예리한 사람이었다.
“군주께서 혼인을 원치 않으신다는 거 잘 압니다.”
가동이 내게 눈을 깜빡였다.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돌아갔다. 마음이 절로 따스해졌다. 가동은 황제의 사람이지만 황후 언니의 사부이기도 했고 지금은 태자 전하의 사부이다. 그런 그는 내게도 많은 배려를 베풀곤 했다.
밤이 되자 또다시 상을 내리는 시간이 찾아왔다. 가동이 황제 곁에서 큰소리로 사냥 결과를 발표했다.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두형의 결과를 발표할 땐 유독 더 집중했다. 다들 어젯밤 내가 제시한 조건에 승패를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두형의 수확물은 남들보다 월등히 많았다. 소라는 잔뜩 긴장했는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충동적으로 무슨 짓을 할까 봐 걱정한 듯했다. 하지만 난 제법 냉정하게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백장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어제처럼 두 눈을 내리깐 채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처럼. 화살이 가슴을 관통하면 이런 아픔일까? 정말 죽을 만큼 그가 미웠다! 그때 황제가 두형에게 찬사를 보냈다.
“역시 용감무쌍할지어다. 용사라는 칭호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구나. 여봐라, 두 경에게…….”
“황상.”
가동이 갑작스레 끼어들었다.
“아직 발표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들 가동의 말에 깜짝 놀랐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두형보다 더 많이 잡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가 남았다고? 감격스럽기도, 조금 무섭기도 했다. 아무리 용맹하다고 한들 추한 몰골을 가진 사내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황제는 그를 힐끔거리더니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소리쳤다.
“어서 발표하거라!”
가동은 목청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말했다.
“백 장군의 사냥 결과입니다. 참새 스무 마리, 산토끼 여덟 마리, 사슴 두 마리, 노루 두 마리…….”
가동의 한마디 한마디에 모든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장간 또한 한때는 군신이었다. 이 칭호는 예전의 황제만을 가리키는 것이었기에 누가 진정한 용사인지 다들 명백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놓였다. 백장간은 내게 구혼을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두형을 이겨 간접적으로 날 도와준 것이다.
황후 언니는 기뻐했고,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니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 장군, 무얼 갖고 싶어요? 어서요. 황상께서 상을 내리실 거예요.”
백장간은 술잔을 내려놓고 모닥불 옆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상. 신, 군주와 혼인을 하고 싶사옵니다!”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나 이따금 부는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난 탁자 가장자리만 꽉 붙잡았다. 작은 바람에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영혼은 이미 허공을 떠돌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내 껍데기는 입을 쩍 벌린 채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표정도 모두 똑같았다. 모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제가 가장 먼저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는 너른 소매 밑으로 황후 언니의 손을 붙잡았다. 언니를 안심시키려는 것 같았다.
“백 장군, 다시 한번 말해 보게. 원하는 게 무엇이라 했는가?”
백장간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 군주와 혼인을 하고 싶습니다.”
“그건.”
황제는 황후를 바라보았고, 황후 언니는 날 바라보았다.
“소쌍아, 네 생각은 어때?”
이 심정을 어찌 표현해야 할까? 하늘에서 저승으로 떨어져 온갖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누군가 갑작스레 미안하지만 잘못 알았다고, 넌 다시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해 준 것만 같았다. 우롱당한 기분에 화가 나는 한편 기쁨이 차오르고 있었다. 두 감정이 한데 뒤섞이니 정말 어찌할 도리 없이 미칠 것만 같았다.
두형은 초조해졌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와 황후에게 예를 갖췄다.
“황상, 마마! 장군께선 군주의 오라버니입니다. 오라버니가 어찌 여동생을 아내로 맞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도리와 규율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황상, 신은 군주와 친남매도 아니고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입니다. 마마께서는 군주를 보살필 사람을 찾기 위해 제 저택에 보내신 것뿐입니다. 전 이미 군주와 깊은 정을 나누었고, 군주의 마음 또한 저와 같습니다.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황상.”
황제는 늘 그렇듯 내게 결정권을 넘겼다.
“군주의 뜻은 어떠한가?”
난 여러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고했다.
“황상, 마마! 사냥물의 많고 적음으로는 무언가를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진정 용감함을 논하자면 더 크고 사나운 사냥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일, 다시 한번 더 겨뤄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좋네!”
황제가 호탕하게 승낙했다.
“군주의 말대로 내일 다시 한번 겨뤄 보도록 하지. 공정을 위해 내일은 그 누구도 숲에 들어갈 수 없다. 백 장군과 두 경은 시종 없이 각자 건량乾糧(먼 길을 가는 데 지니고 다니기 쉽게 만든 양식)을 지니고 세 시진 동안 사냥을 하도록 한다.”
황제가 규칙을 정하니 주변은 또다시 웅성거렸다. 다들 까닭 없이 들뜬 줄 알았는데, 자세히 들어 보니 다들 나와는 목적이 완전히 달랐다.
“이런, 판돈이 더 커지겠군. 난 백 장군이 이긴다에 백 냥을 걸겠네.”
옳거니, 그래서 이리 신이 난 것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