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4화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던 그가 별안간 내 얼굴을 붙잡고 힘껏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코와 코가 맞닿고, 서로의 입술이 맞닿은 탓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대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거친 숨결을 느꼈는지 그가 결국 날 놓아주었다. 우린 육지에 떠밀려 온 물고기처럼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마음을 가다듬지도 못했는데, 그는 또다시 내게 다가와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곤 천천히 내 입술을 찾아 가볍게 입을 맞췄다.
조금 전처럼 묵직한 입맞춤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더 죽을 것만 같았다. 코와 입을 막은 것도 아닌데 여전히 숨을 쉴 수 없었다. 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속눈썹이 내 마음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날 품에 꼭 끌어안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점점 잦아드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불더미에서 불꽃이 튀었다. 우린 깜짝 놀랐다. 마침내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이 들었다. 난 황급히 그의 품에서 일어나 중얼거렸다.
“불이 꺼지겠어요. 가서 나뭇가지를 더 주워 올게요.”
그는 날 바라보지도 않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게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도 내 가슴은 저릿한 통증을 느꼈다. 난 바로 동굴 밖으로 나가 나뭇가지를 주웠다. 그때, 오른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맹수일까 걱정이 되어 황급히 소리가 나는 방향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맹수가 아닌 사람이었다. 사람 키만 한 잡초를 뚫고 나온 투구의 붉은 술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나를 찾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군주! 백 장군! 군주! 백 장군!”
우리를 찾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순간 난 고민에 빠졌다. 어렵게 만들어진 우리 둘만의 세상에 아무도 침범하지 않길 바랐다. 함께 고난에 빠졌지만 그 속에서 진실한 감정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백장간은 부상을 당한 상태다. 내 욕심 때문에 그의 상처가 더 심해질지 몰랐다. 때마침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환호를 질렀다.
“군주다, 군주께서 저기 계신다!”
난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뒤이어 씁쓸함이 차올랐다. 얼마나 얻기 힘든 기회인데 이렇게 끝나 버리다니.
* * *
백장간과 난 무사히 행궁으로 돌아왔다. 가장 걱정하던 사람은 황후 언니였다. 우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언니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뒤, 언니는 백장간에게 시선을 돌렸다.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는 그를 보고 황후 언니가 소리쳤다.
“큰오라버니, 어딜 다친 거예요?”
언니가 백장간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뒤따라 안으로 들어온 황제가 언니를 붙잡았다.
“당신이 태의도 아니고, 봐도 소용없소. 위 태의, 장군의 상태를 봐 주게.”
궁에서 함께 온 위 태의가 백장간의 다리를 살피더니 황제와 황후에게 고했다.
“황상, 마마. 그저 발목을 삐끗한 것뿐입니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니 마음 놓으십시오.”
황후 언니는 그제야 마음을 놓은 표정으로 백장간에게 말했다.
“오라버니는 대장군이잖아요. 소쌍이는 무탈한데 오라버니가 발을 삐끗하다니요.”
백장간은 시선을 줄곧 낮게 드리운 채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송구합니다. 신이 마마께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오라버니, 한 번만 더 신이라고 하면 정말 화낼 거예요.”
백장간이 입을 열려는데, 황제가 끼어들었다.
“신이라 하지 않으면 뭐라 칭한단 말이오. 아무리 밖이라 한들 규율은 지켜야 하거늘.”
백장간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어딘가 이상했다. 지난번 궁에 갔을 때도 두 사람 사이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둘만의 비밀이 있는 듯했다.
황후 언니는 백장간에게 몇 마디 잔소리를 더 건넸다. 함께 자란 남매이기 때문에 그녀는 백장간을 정말 끔찍이 생각했다. 황제는 황후 언니의 걱정이 더 길어지기 전에 그녀를 데리고 처소로 돌아갔다.
난 의자에 앉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방 안엔 그와 나뿐이었다. 백장간은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난 천천히 침대 옆으로 다가가 그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아직 아파요?”
그는 대답 대신 내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답지 않은 태도였다. 손을 뻗어 그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았다.
“왜 그래요?”
그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날 불렀다.
“군주.”
“네.”
“잠시 나가 주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애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총애가 가득 담겨 있던 눈빛도 사그라들었다. 아주 오래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장군은 앞뜰에, 난 후원에 각자 머물며 서로 소원하게 지내던 그때로.
가슴에 균열이 일어, 산산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날 안고, 입 맞추었던 것도 전부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날 외면했다. 마음만 더 심란해져, 난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방을 나섰다.
문 앞에는 소라가 서 있었다. 소라가 내 얼굴을 살피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군주, 무슨 일입니까?”
“돌아가서 얘기하자.”
난 얼굴을 굳힌 채 내 방으로 돌아갔다. 막 문 앞에 도착한 순간, 누군가 나를 불렀다.
“군주.”
고개를 돌려보니, 두형이었다. 그는 걱정 어린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산비탈에서 굴러떨어지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난 무성의하게 대꾸하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내가 이런 태도로 나올 줄 몰랐던 건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군주, 군…….”
소라가 곧장 문을 닫았다.
“군주, 피곤하시지요. 두 공자와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시어요.”
난 침대에 엎드렸다. 조금 울고 싶었다. 동굴에서는 그렇게 행복했는데,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만 같았다. 우리 둘 사이가 예전으로 돌아갈 줄은 몰랐다.
“군주,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소라가 허리를 굽혀 날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난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소라야, 나 차라리 비구니가 되는 게 어떨까?”
소라가 질겁하며 말했다.
“군주,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대체 백 장군께서 어찌하셨길래요?”
난 이를 악물고 성을 내었다.
“장군이 날 책임지려 하지 않아.”
소라가 몸을 흠칫 떨며 물었다.
“두 분이, 그, 그걸 하신 겁니까?”
“아니.”
얼굴이 절로 뜨거워져, 난 모깃소리처럼 웅얼거렸다.
“입, 입만 맞췄어.”
“세상에.”
소라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진도가 정말 빠르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슬픔에 잠긴 내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곧 소라가 가장 중요한 문제를 물었다.
“한데 장군께서 군주를 책임지려 하지 않으신다니요. 대체 뭐라 하신 것입니까?”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 게다가 혼자 있고 싶으니 방에서 나가라고 하잖아. 아무래도 후회하는 것 같아.”
난 소라를 내 참모라 여기고 있었다. 그만큼 많은 문제의 답을 구할 수밖에.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해?”
“조급해하지 마세요.”
소라가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군주께선 보통 인물이 아니신데, 입만 맞추시고 끝내겠습니까? 황후 마마를 찾아가 해결해 달라고 청을 드리면 됩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순간, 망설임이 일었다.
“억지로 몰아세우다 사이가 더 나빠지면 어떡해.”
“입을 맞출 용기는 있으면서 책임질 용기는 없다니요. 예전에는 대장부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참 실망입니다.”
난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너도 장군을 좋아했던 건 아니지?”
“아니에요.”
소라가 손을 흔들었다.
“장군께 분에 넘치는 생각은 절대 해 본 적 없습니다.”
소라와 좀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황후 언니를 찾아가라는 말만큼은 듣지 않았다. 이 일로 그와 원수가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 * *
밤이 되자 밖에선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시종들은 모닥불 주변으로 탁자와 의자를 옮겼다. 듣자니 춘위의 행사 중 하나라고 했다. 낮에는 사냥을 하고 밤에는 사냥 결과를 따져 상을 내리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기쁨에 잠겼지만, 난 아니었다. 기분도 좋지 않았던 데다 아무것도 잡지 못했는데 상을 기대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황제와 황후 모두 참여하는 행사에 가지 않으면 시답잖은 말이 나올 게 뻔했다. 다른 이들의 뒷말은 상관없었지만, 황후 언니에게 철없는 아이로 보이는 것은 싫었다. 언니는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 나도 언니의 입장을 고려해야 했다.
앞뜰로 나간 난 오른쪽 아랫자리에 앉았다. 턱을 괸 채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모닥불 위에는 낮에 잡았던 사냥감을 손질해 걸어 두었다. 이따금 밤바람을 타고 고기 냄새가 풍겨 왔다. 입맛이 없었지만 냄새를 맡으니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주변은 시끌벅적했고 다들 끊임없이 움직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형체만 보일 뿐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쉴 새 없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때, 누군가의 말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백 장군. 다리는 좀 나아지셨습니까?”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시야에 담겼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모닥불 옆으로 걸어왔다. 한 사병이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가 지팡이로 사병을 가로막았다. 그는 천천히 왼쪽 아랫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내 정면에 위치한 자리였다.
지금 나는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천천히 시선을 올린 그는 내 얼굴을 가볍게 스치듯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어떠한 일렁임도 없이 잔잔히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의 차가운 그에게서, 불처럼 뜨거웠던 낮의 백장간은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았다.
가 대인이 황상 옆에 서서 큰소리로 사냥 결과를 읊었다. 잠시 귀를 기울여보니, 놀랍게도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은 사람은 두형이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두형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공적에 따라 상을 내려야 하니, 두 경이 원하는 것을 말해 보게.”
두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답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신, 감히 군주와 혼인을 하고 싶습니다!”
두형이 사람들 앞에서 구혼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도 적잖이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백장간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금세 평온한 모습을 되찾더니 두 눈을 내리깔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불빛이 흐릿해 그의 표정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황제는 흠칫 놀라는가 싶더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보아하니 군주를 향한 두 경의 마음이 보통 깊은 게 아니군. 짐은 물론 도와주고 싶지만, 군주의 생각은 어떠한가?”
똑똑한 황제는 내게 책임을 떠넘겼다. 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라가 뒤에서 가볍게 나를 찔렀다.
“군주, 황상께서 묻습니다.”
고개를 들어 황후 언니를 바라보니, 언니는 빙그레 웃으며 날 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기대와 응원이 담은 채. 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상, 두 공자께서 오늘 월등한 성적을 얻으셨으니 진정한 용사이십니다. 그런 용사께 은애를 받는다는 건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동시에 존경스럽기도 하지요. 만약 내일 두 공자께서 다시 높은 성적을 얻으신다면 저 소쌍, 이 혼사에 응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