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3화
그때 저편에서 말 두 필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고개를 드니, 백장간과 두형이었다. 나를 향한 백장간의 두 눈이 밝게 반짝였다. 속도를 높여 달려온 그는 내 차림새를 관찰하다 다정한 눈빛을 보냈다. 그가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군주, 정말 예쁩니다.”
난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장군도 위엄 있으십니다.”
두형도 가까이 다가오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장군과 군주께선 정말 남매의 정이 깊으십니다. 보는 저희가 다 부러울 지경이라니까요.”
그가 고개를 돌려 두씨 아가씨에게 말했다.
“너도 오늘 아주 예쁘구나.”
아가씨가 대답했다.
“오라버니도 정말 멋지셔요.”
난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나와 백장간을 일부러 따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곧 호각이 울렸고 다들 수풀로 내달렸다. 뒤에서 백장간의 외침이 들렸다.
“군주, 조심하세요. 너무 빨리 몰면 안 됩니다.”
“걱정 말아요.”
난 잔뜩 흥분한 채로 고삐를 당기며 대꾸했다.
“좋은 걸 잡아 올 테니 기다려요.”
숲은 내 예상보다 훨씬 컸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숲속으로 들어갔건만, 숲은 고요하기만 했다. 물고기 떼가 바다 깊은 곳으로 헤엄쳐 가듯,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는 운이 제법 좋은 편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사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사슴은 가볍게 숲속을 노닐고 있었다. 갈색 바탕에 하얀 반점, 촉촉한 눈망울까지 아주 예쁜 사슴이었다.
난 천천히 다가가 활을 들었다. 냄새를 맡은 것인지 사슴이 갑작스레 몸을 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결국 내 화살은 사슴을 비켜나가 풀숲에 떨어졌다. 난 서둘러 사슴을 뒤쫓았다.
반드시 사슴을 잡아 백장간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가 내게 말 타는 법과 활쏘기를 가르쳐 주었으니 체면을 세워 줘야지.
사슴에 이끌려 숲을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어디까지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사슴을 잡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숲을 가로질렀다. 결국 갈 길이 없는 곳에 다다라서야 멈출 수 있었다. 앞쪽은 깎아지를 듯 가파른 절벽이었다. 사슴은 차마 뛰어내리지 못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였지만 난 화살을 조준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시위를 놓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커다란 그림자가 매섭게 달려들었다. 난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하게 서 있었다.
그때, 화살이 날아와 거대한 그림자 곁을 스쳐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그림자는 방향을 틀었고, 나를 비켜 나갔다. 제대로 확인해 보니 거대한 그림자는 수사슴이었다. 예쁜 뿔을 가진 수사슴은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 수사슴은 천천히 암사슴 곁으로 다가가더니, 자신이 지킨다는 듯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어느새 말 한 필이 가까이 다가왔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갑작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상 어떤 사람이든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준다면,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하물며 이 사내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었던 백장간이 아니던가.
“군주,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난 고개를 저으며 코를 훌쩍였다.
“장군께서 조금만 늦게 오셨어도 큰일 날 뻔했어요.”
백장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몸을 틀고 활로 수사슴을 겨눴다.
순간 얼이 빠진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옆모습은 정말인지 너무 멋있었다. 높은 콧대와 남자다운 하관, 예리한 눈빛까지. 이 순간만큼은 내가 저 사슴이 되고 싶을 정도… 아, 아니지. 난 얼른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죽이지 말아요.”
백장간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어째서요? 방금 저놈이 군주를 들이받으려 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암사슴을 구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에요.”
내가 그를 설득했다.
“상대를 향한 마음이 깊은 사슴이에요. 저까지 감동했을 정도니, 그만 놓아주세요.”
백장간은 날 바라보다 가만히 미소 지었다. 내가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담긴 미소였다.
“정말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리 마음이 여려서야.”
그의 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가 왜 변해야 한단 말인가? 난 원래부터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는데…….
“죽이지 않을 거라면 그만 돌아갑시다.”
백장간은 고삐를 당겨 방향을 틀었다. 나도 그를 따라 말머리를 돌렸다. 몇 발짝 걷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슴은 서로 머리를 문지르며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수사슴이 놀란 암사슴을 위로하는 듯했다.
마음이 조금 시큰거렸다. 짐승들도 사람처럼 감정이 있었다. 암사슴이 위험에 처하니 수사슴이 도와주고, 내가 위험에 처하자 백장간이 날 구해 주고……. 별안간 가슴속에 꿀단지가 왈칵 쏟아진 듯했다. 난 곧장 백장간에게 물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계속 절 따라온 거예요?”
“네. 처음 사냥을 나온 것이니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니까요.”
백장간이 웃으며 말했다.
“말을 제법 잘 몰던걸요. 하마터면 놓칠 뻔했습니다.”
난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놓치지 않으셨잖아요.”
“그럴 리는 없지요.”
그가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놓치는 일 없을 겁니다.”
심장 소리가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지금 나에게… 고백을 한 것인가?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니, 나와 평생 함께하겠단 말이 아닌가! 달콤했던 마음속에 찬란한 꽃들이 만개했다. 나는 고삐를 힘껏 잡아당겼다. 말은 내 암시를 느낀 것인지 신나게 산길을 달려 나갔다. 뒤에서 백장간의 외침이 들려왔다.
“천천히, 조심하세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길가에 튀어나온 굵은 나뭇가지에 걸리고 말았다.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고삐를 놓쳐 버렸다. 이윽고 나는 가파른 산비탈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기쁨이 극에 달하면 슬픔이 온다더니, 지금이 딱 그 상황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두꺼운 기마복이 나를 살려 주었다. 어깨에도 갑옷을 걸치고 투구까지 쓴 덕에 크게 다친 것 같진 않았다. 손이 긁히고 머리가 어지러운 게 다였다.
무엇보다 백장간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 끌어 올려줄 테니,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막 몸을 일으켜 앉는데, 누군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는 게 아닌가. 놀랍게도… 백장간이었다. 내 앞에 몸을 세운 그가 허겁지겁 기어와 내 팔다리를 확인했다.
“어찌 된 겁니까? 어딜 다친 겁니까? 걸을 수 있겠습니까?”
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까닭으로 날 따라왔단 말인가? 위에서 끈이라도 내려서 올려 주면 되는 일을. 둘 다 떨어져 버렸으니, 밧줄은 누가 내려 주고? 말에게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내가 멍청하게 앉아만 있으니, 그는 더 안절부절못했다. 아예 내 팔을 덥석 잡고 소매를 쓸어 올렸다.
“어딜 다쳤냐니까요. 어서 말해 보십시오.”
그의 커다란 손이 팔을 스치니, 절로 귀가 뜨거워졌다. 괜스레 손끝이 간지러웠지만,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전 괜찮아요.”
난 그의 손에서 팔을 빼내고, 벌떡 일어나 그를 부축했다.
“어서 일어나요.”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가 별안간 숨을 헉 들이마셨다. 그러더니 오른쪽 다리를 부여잡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난 쪼그려 앉아 그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왜요? 다리를 삔 거예요?”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그런 듯하군요.”
이번엔 내가 초조해졌다. 그가 날 구해주길 바랐건만, 오히려 그가 내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선 잠시 쉴 곳을 찾아봐야겠어요.”
난 그의 손을 내 어깨에 올려 부축했다. 주위를 둘러보다,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최대한 내게 힘을 싣지 않으려 절뚝거렸다. 다행스럽게도, 얼마 가지 않아 동굴 하나가 보였다. 난 눈을 크게 뜨며 동굴을 바라보았다.
“어서요, 저쪽에서 잠시 쉬어요.”
백장간이 말했다.
“만약 안에 맹수라도 있으면 어찌하려고요?”
“…….”
그가 내 어깨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
“이런 꼴로 어찌 간다는 거예요. 제가 보고 올게요.”
그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보고 올 수 있겠습니까?”
사실 겁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난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당연히 할 수 있지요.”
다행히 활과 화살은 지니고 있었다. 비탈을 구를 때 화살 주머니에 있던 화살이 대부분 튀어 나가긴 했지만. 일단은 화살 하나를 활에 걸고 조심스럽게 동굴로 다가갔다. 동굴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 냄새를 맡아보니, 피비린내나 악취는 나지 않았다. 그 말은 야생 동물이 살지 않는 빈 동굴이란 뜻이었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도 축축하고 냉랭한 기운만 풍겨 왔다. 난 서둘러 백장간을 부축해 동굴로 데려왔다. 그를 동굴 벽에 기대게 한 뒤, 바깥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가져왔다. 백장간이 화절자로 불을 붙여 모닥불을 피웠다. 불을 피우니 냉랭한 기운도 다소 가셨다.
불빛이 동굴 벽을 타고 붉게 퍼져나가는 모습이 은은한 정취가 있었다. 백장간은 분주히 나뭇가지를 주워 오는 날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난 조금 부끄러워 수줍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리 빤히 보는 거예요?”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서 좀 안아 주십시오.”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넘어지면서 머리도 다쳤단 말인가? 어찌 저리 설레는 요구를 한단 말인가? 난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면서도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날 끌어당기더니 제 품에 안았다.
“춥지요?”
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날 꼭 끌어안더니 내 머리에 턱을 괴며 나긋하게 말했다.
“아주 오랜만에 이리 안아 보는군요.”
조금 의아했다. 분명 처음 안기는 것인데… 오랜만이라니?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행복하니까. 꿈속에 잠겨 있는 듯 정신이 몽롱했다. 난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날 좋아하세요?”
“물론이지요.”
그의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인 것을요.”
세상에… 너무 행복해 숨도 쉬기 힘들었다. 눈앞이 이토록 찬란하니,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혼미한 와중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억나요? 그날 밤에도 밤새 품에 안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 황홀함에 잠겨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으리라.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장간의 시선이 느껴졌다. 날 빤히 보는 눈빛이 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눈망울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분명 날 좋아한다. 날아갈 듯 기쁜 마음을 억누르며, 시선을 그의 입술로 옮겼다. 짙은 붉은 빛 입술은 얇고 촉촉했고, 입꼬리는 아주 살짝 올라가 있었다. 난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계속 뜨거운 눈빛만 보냈다. 일종의 암시가 아닐까? 나는 마음 편히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한데 그는 또 벌에 쏘인 듯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빼는 게 아닌가. 나도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당혹스러움이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