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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42)화 (641/1,192)

제642화

“벌써요? 조금 더 놀다 가세요.”

내 말에 두씨 아가씨가 백장간을 힐끔 보았다. 백장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심히 가십시오. 나중에 짬이 나시거든 또 놀러 오십시오.”

두씨 아가씨의 눈은 살짝 붉어졌지만, 곧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곤 멀어져 갔다.

난 일부러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장군, 아가씨를 어찌 그렇게 대하실 수 있어요?”

백장간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를 싫어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제가 두씨 아가씨를 싫어한다고 장군께서도 싫어하시는 거예요?”

“물론이지요.”

백장간은 별안간 내 볼을 꼬집었다.

“군주가 싫다면 이 오라버니도 싫습니다.”

난 얼굴을 굳히며 몸을 틀었다. 처소로 돌아가려는데 그가 날 붙잡았다.

“왜 또 성이 났습니까?”

더는 그와 남매 사이에 관한 일로 다투고 싶지 않았다. 난 그저 그가 좋았다. 이따금 오라버니 행세를 하며 분위기를 깨긴 해도, 우리 사이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적어도 그는 나와 가까워지려 하지 않는가. 예전처럼 억지로 거리를 두려고 하지도 않았다. 난 일부러 두씨 아가씨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어떡해요. 두씨 아가씨는 황상께서 장군과 맺어 주신 여인인데.”

“황후가 계시니 황상께서도 밀어붙이진 못하실 겁니다.”

백장간이 말했다.

“황후께서 군주를 두형에게 시집보내지 않으시는 것처럼요.”

“네. 황후 언니가 지켜 주니 우린 천하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지요.”

백장간은 별안간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호수에 핀 연잎을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내가 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왜 그래요?”

“아닙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내일 노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내일 떠나는 거예요?”

난 기쁜 마음에 깡충깡충 뛰었다. 매일 저택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모처럼 밖으로 나가 놀 기회가 생기지 않았는가. 내 웃음에 전염된 듯 백장간도 환히 웃었다. 그가 날 붙잡으며 말했다.

“그만 뛰고 밥 먹으러 갑시다. 내일 이른 아침에 떠나야 하니 일찍 쉬어야 해요.”

* * *

이튿날,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깼다. 전날 준비해 둔 짐을 챙긴 뒤 나는 말을, 소라는 가마를 타고 앞뜰로 향했다. 날 발견한 백장간이 곧장 한마디 내뱉었다.

“어허.”

황제 폐하와 황후가 함께 가는 여정인 만큼 규율을 제대로 지켜야 했다. 규율대로라면 군주가 말을 타고 시녀가 가마를 타는 법은 없었다. 더욱이 군주는 귀한 신분이기 때문에 쉽게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되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소라와 함께 가마에 올랐다.

제법 긴 노정이었기에 난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한 가운데 가마가 멈춰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창 옆에서 소라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더니, 피풍으로 내 몸을 덮어 주었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얼굴을 스친 순간, 난 눈을 뜨고 그에게 환한 미소를 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던 탓에 또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누군가 날 흔들어 깨웠을 땐 이미 점심시간이었다. 눈을 뜨니 허리를 숙인 채 나를 들여다보는 백장간이 있었다. 그가 날 빤히 바라보았다.

“어찌 이리 조는 것입니까? 어제 편히 잠들지 못했습니까?”

난 짤막하게 대답하며 눈을 비비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았다. 어젯밤 너무 신이 났던 나머지 푹 잠들지 못했다. 그는 내가 가마에서 내릴 수 있게 부축해 주었다.

사방은 푸른 녹음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을 한참 벗어난 모양이다. 길옆으로는 산과 들이 그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산들바람에 일렁이는 풀은 상쾌한 색이었고, 찬란히 피어난 꽃은 진한 향기를 풍겼다. 어깨에 내려앉은 금빛 햇살이 눈부셨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니,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호위들이 장작을 쌓아 불을 지피자 궁에서 나온 요리사들이 밥을 지었다. 음식 냄새가 꽃향기를 덮고 주변을 가득 메웠다. 냄새만 맡았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말았다. 백장간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을 안 먹은 것입니까?”

“먹었어요.”

서두르느라 조금만 먹었을 뿐이었지. 그와 들판에서 밥을 먹고 싶었지만, 황후 언니가 함께 어선을 들자고 부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언니에게 갔다. 백장간도 동료들에게 불려가 사내들끼리 술과 음식을 즐기게 되었다.

서로 등을 돌려 나아가던 중, 난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마침 그도 뒤를 돌아보았다. 허공에서 우리의 시선이 닿았다. 진득하게 마주친 시선 끝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는 가볍게 손을 흔든 뒤,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난 소라에게 으스댔다.

“봐 봐, 나랑 장군은 이제 암묵적으로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라고.”

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도 군주 전하에 대한 백 장군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난 늘 소라의 말을 믿었기에 절로 신이 났다.

식사를 한 뒤, 가마로 돌아가니 아직 백장간이 보이지 않았다. 난 그가 준 피풍을 덮고 눈을 감았다.

오는 길 내내 졸았던 탓일까, 잠이 오진 않았다. 눈을 감고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가마 옆에서 들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행궁에 도착한 후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곁에 있는 게 익숙해진 만큼, 혼자 있으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이런 야외에서는 더욱더. 모닥불을 피워 두긴 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황후 언니는 내게 숙소로 놀러오라고 했지만, 난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었다. 시무룩해진 나는 모닥불 앞에 쪼그려 앉아, 나뭇가지로 바닥을 끄적거렸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별안간 내 앞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지만,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림자가 움직이더니 내 옆에 멈춰 섰다.

“군주.”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백장간이 아니었다. 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뜻밖에도 두형이 서 있었다.

“공자가 어떻게 여기 있어요?”

“전 군기처의 영위營尉입니다. 당연히 와야지요.”

두형이 무관이란 건 방금 알았다. 하긴, 그날 계단에서 날 안고 착지했던 걸 보면 실력이 제법이긴 했다. 그가 내 옆에 붙어 앉았다.

“군주,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난 대충 둘러댔다.

“저녁을 많이 먹어 배가 불러서요.”

“저와 산책을 하며 소화 좀 시키시겠습니까?”

“아니요.”

“소화를 하지 않으면 계속 배가 불편하실 텐데요.”

두형이 끈질기게 말했다.

“제 누이동생도 가끔 과식을 할 때면 저와 산책을 하곤 합니다. 설마 백 장군과 산책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지금 백 장군께선 바쁘셔서 짬이 나지 않으실 겁니다.”

내가 물었다.

“왜 바쁜데요?”

“장군께선 이번 춘위의 총책임자이니 모든 일은 장군의 지시를 따라야 하죠.”

두형이 덧붙였다.

“제가 이곳으로 오기 전엔, 제 누이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난 깜짝 놀랐다.

“두씨 아가씨도 왔다고요?”

“예. 저희 아버지께서 황상께 청을 드리시어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두형은 자랑하듯 늘어놓았다.

“남들은 제 누이동생이 그림이나 서예처럼 고상한 것들만 잘한다고 여기지요. 하지만 사실 기사에도 능하답니다. 제가 그 애에게 가르쳐 주었거든요. 이번 춘위에서도 황후 마마를 제외하고는 그 애보다 사냥을 잘하는 여인은 없을 것입니다.”

난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녀와 겨뤄 보았으니 나보다 뛰어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사냥은 운과 빠른 반응이 필요한 법이다. 운과 순발력! 이 두 가지는 내가 그녀보다 뛰어날 터였다.

이번 사냥에서 백장간에게 그럴싸한 모습을 보여 줄 계획이었다, 이제 두씨 아가씨까지 왔으니 덩치 큰 놈으로 잡고야 말 테다. 두형의 유일한 장점은 눈치가 빠르다는 것이었다. 내가 꿈쩍도 하지 않으니 그도 더는 강요하지 않고 인사를 건넨 뒤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나니 백장간이 돌아왔다. 백장간은 두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자가 이곳은 어쩐 일로 왔답니까?”

“저랑 이야기를 나누려고요.”

그의 표정이 곧바로 엄격해졌다.

“남들에게 시답잖은 말을 듣고 싶은 것입니까?”

난 코웃음을 쳤다.

“장군과 두씨 아가씨는 따로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공자와 이야기하는 것은 안 된단 말이에요?”

그는 잔뜩 골이 난 내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이고, 그게 신경이 쓰였군요.”

난 가만히 모닥불만 바라보았다. 그도 머리를 괸 채 내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른대는 불빛이 그의 속눈썹 아래 작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덕분에 그윽한 두 눈동자가 더욱더 검게 빛났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스스로 생각해도 난 너무 못난 사람이었다. 늘 이렇게 그에게 혼을 빼앗겨 버리다니.

이튿날, 새로 지은 기마복을 입고 말에 올라탔다. 내 기마복은 하늘처럼 밝은 청색이었다. 가슴에 달린 매듭단추는 밝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단추를 매만지고 있자니 꼭 새가 된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었다.

넓은 풀밭에 모두 집결했다. 황후 언니는 새빨간 기마복에 붉은 술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었다. 기마복에는 금실로 봉황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늠름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졌다. 황후 언니와 황제는 말에 올라탄 채 나란히 앞을 보고 있었다.

황제가 손을 뻗어 삐뚤어진 언니의 투구를 매만져 주었다. 슬그머니 언니 볼을 꼬집으며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은애를 할 땐 종종 점잖지 못한 모습이 새어 나오는 법이었다.

다른 이들 눈에는 황제가 마냥 어렵게 보이겠지만, 난 이미 황후 언니에게 달라붙어 히죽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땐 잔뜩 겁을 먹어 다리까지 후들거렸지만, 이제는 제법 차분하게 인사할 수 있었다.

사실 황후 언니가 너무 부러웠다. 이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사내가 언니 치마폭 밑에 있지 않은가. 내 눈엔 황제보다 황후 언니가 대단해 보였다. 나도 날 떠받들어 주는 사내를 갖고 싶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사람들 틈에서 백장간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 대신 두씨 아가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검붉은 말을 타고 녹색 기마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기마복은 조금 독특했다. 소매와 옷자락에 술이 가득 달려 있었는데,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술이 생동감 있게 움직였다. 나를 발견한 두 아가씨가 고삐를 잡아당기며 다가왔다.

“군주를 뵈옵니다.”

“그리 예를 차릴 것 없어요.”

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무얼 잡고 싶으세요?”

“잡히는 대로 잡아야겠지요.”

고삐를 잡아당기는 그녀의 손동작은 곱고 아름다웠다.

“작은 산토끼 한 마리만 잡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작은 산토끼라니 이 얼마나 시시하단 말인가. 난 꼭 사슴을 잡아서 그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고 말 테다.

“군주께서는 무얼 잡고 싶으십니까?”

난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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